Ⅰ. 들어가며
사회의 발전으로 기술과 지식의 양이 많아짐에 따라 우리는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상황에 직면하거나 또는 종전의 규율 방식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다. 법률상 친자관계와 관련해서도 그러하다. 명문의 규정은 없지만 분만과 출산이라는 사실로부터 인정되는 모자관계와는 달리, 부자관계는 민법 제844조1)에서 아내가 혼인 중에 임신한 자녀는 남편의 자녀로 추정하는 한편(제1항), 혼인이 성립한 날부터 200일 후에 출생한 자녀와 혼인관계가 종료된 날부터 300일 이내에 출생한 자녀는 혼인 중에 임신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제2항과 제3항). 그리고 이와 같은 친생자 추정이 미치는 혼인중의 출생자의 지위는 제846조 이하의 친생부인의 소 제도를 통해 매우 강력한 보호를 받는다. 그런데 과학과 의료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子의 출생과 관련하여 전에는 알지 못했던 상황에 놓이게 되고 이와 같은 현행 규정의 의의와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제3자의 정자를 사용한 인공수정(AID, artificial insemination by donor)에 배우자인 남편이 동의하여 출생한 자녀의 경우 민법 제844조에 따라 그 남편의 친생자로 추정되는지 여부가 대법원에서 다투어지게 되어 선고를 앞두고 있다.2) 본 사건의 사실관계는 다음과 같다. 원고(남)는 A(여)와 1985년에 결혼하였으나 무정자증으로 자녀가 생기지 않자 제3자로부터 정자를 제공받아 시험관시술을 통해 자녀를 갖기로 하고, 제3자의 정자를 사용한 인공수정으로 A는 1993년 3월 20일 피고 B를 출산하였다. 원고는 1993년 3월 29일 자신과 A의 자녀로 피고 B의 출생신고를 마쳤다. 한편 A는 1997년 7월 15일 혼외 관계를 통해 피고 C를 출산하였고, 원고는 1997년 8월 6일 자신과 A의 자녀로 피고 C의 출생신고를 마쳤다. 이후 원고와 A는 2013년경 부부갈등으로 협의이혼신청을 하였는데, 출생 이후 원고, A와 함께 동거해 왔던 피고들(B와 C)은 원고와 A가 다투면서 자신들이 원고의 친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비로소 위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13년 9월 26일 원고는 피고들을 상대로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을 구하는 이 사건 소를 제기하였다. 원고와 A의 위 협의이혼의사 신청은 이후 취하되었으나, 계속 된 이혼소송 중 2015년 10월 30일 원고와 A가 이혼하는 내용으로 조정이 성립하였다.
이에 대하여 원심3)은 다음과 같이 판시하였다. 우선 피고 B에 대하여는, AID의 경우 배우자인 남편이 동의한 경우에 한하여 인공수정에 의해 출생한 자녀는 제844조 제1항에 의하여 그 夫의 친생자로 추정되고 금반언의 원칙에 따라 그 夫은 친생부인권도 행사할 수 없으므로,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의 소를 통해 그 친생자관계의 부존재확인을 구하는 것은 부적법하다고 하였다. 한편 피고 C에 대하여는, 제844조 제1항의 친생자 추정 규정은 부부의 동서의 결여뿐만 아니라 유전자형 배치의 경우에도 그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고 봄이 타당하지만 원고와 C사이에는 위 출생신고와 입양의 실질적 요건이 충족됨으로써 이미 양친자 관계가 유효하게 성립되었고 파양에 의하여 양친자 관계를 해소할 특별한 사정이 없으므로 친생자관계부존재의 확인을 구하는 이 사건 소는 확인의 이익이 없어 부적법하다고 하였다.
AID를 포함한 보조생식술과 관련한 우리나라의 입법으로는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에 일정한 행위를 규제할 목적으로 약간의 규정을 두고 있을 뿐 그 밖의 당사자들의 법률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규정을 마련해 놓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입법적 노력이 촉구된다.4) 한편 입법적 해결이 되지 않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결국 친자관계를 규율하는 우리 민법의 규정을 이용하여 당해 문제를 해결하는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위에서 소개한 사건의 원심에서도 민법 제844조의 친생추정 규정과 금반언 원칙 등의 법리를 통해 해결을 도모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제로서 우선 친생자 추정의 범위에 대한 해석론을 검토하고(Ⅱ) AID로 출생한 子의 지위에 대한 논의를 살펴본 다음(Ⅲ) 그 내용의 정리와 함께 입법론적 해결을 촉구하고자 한다(Ⅳ).
Ⅱ. 친생자 추정이 미치는 범위에 대한 해석론
혼인이 성립한 날부터 200일 후에 출생하거나 혼인관계가 종료된 날부터 300일 이내에 출생한 子는 제844조의 친생자 추정을 받지만, 도저히 母의 남편과의 친자관계를 인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이런 때에도 법이 요건을 엄격하게 규정한 친생부인의 소에 의해서만 추정을 번복5)할 수 있다면 혈연적 실체와 부합하지 않는 법률관계가 유지되도록 강제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형식적으로는 친생자의 추정을 받는 자여도 일정한 경우에는 친생자 추정의 효력이 미치지 않도록 하는 해석론이 발달하게 되었다. ‘친생자 추정이 미치지 않는 子’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하지만 ‘친생자 추정이 미치지 않는 子’의 개념을 인정하더라도 이와 같은 친생추정의 예외를 인정하는 범위를 어디까지 정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논의는 예전부터 있어 왔다. 특히 과학기술 발전에 따라 적은 비용으로도 부자간 혈연관계를 높은 정확도로 증명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6) 과학적으로 증명된 혈연에 관한 사실을 현행 법체계에서 어떻게 다룰 것인지 견해가 나뉘고 있다.
친생추정(및 친생부인) 제도의 취지가 가정의 평화와 부부간의 프라이버시 비공개에 있어 부부생활의 내부 영역에까지 들어가선 안 된다는 점을 들어, 이에 저촉되지 않는 남편의 실종·원정·수감·외국체재, 부부의 사실상 이혼 등 아내의 임신기간 중 부부의 ‘동서(同棲)의 결여’에 의해 아내가 남편의 子를 임신할 수 없었음이 외관상 명백한 경우로 한정하여 추정배제 사유를 인정하는 견해이다.7) 이에 따르면 남편의 생식불능 및 혈액형이 배치되는 등의 경우에는 외관상 명백한 사유가 없는 한 제844조의 친생추정이 배제되지 않기 때문에, 법률상 부자관계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친생부인의 소에 의하여야 한다.
종래 통설적 지위를 차지하던 학설이지만 현재는 주장하는 문헌이 많다고는 할 수 없다. 외관설을 따르게 되면 친생추정의 배제가 되는 범위가 매우 좁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8) 그리하여 친생추정의 예외 범위를 외관설보다 확대하여 혈연진실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다 넓혀야 한다는 견해가 오히려 다수이다.9) 물론 어디까지 예외를 인정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10)
‘동서의 결여’가 외관상 명백한 경우는 물론이고, 남편의 생식불능, 혈액형의 불일치, DNA 검사 등 구체적인 심사 결과 아내가 남편의 子를 임신할 수 없음이 과학적·객관적으로 증명되어 정상적인 부자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한 경우에도 제844조의 추정이 배제되어야 한다는 견해이다.11) 친자관계에 있어서의 혈연 혹은 진실을 중시하고 그에 기인하는 친자관계를 확정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전제(혈연진실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혈연설에 따르면 친생추정이 배제되는 범위가 지나치게 확대되므로 친생추정 규정의 의미가 없어져버린다는 비판이 있으며, 부자관계를 다투는 소송의 전제 단계에서 부자관계의 존부를 실제로 문제 삼아 버리게 되어 모순이라는 지적도 있다.
‘가정파탄설(가정평화설)’은 종래의 외관설이나 혈연설의 대립을 ‘가정의 평화 vs. 혈연주의’의 공식으로 이해하여, 이와 같은 양자택일적인 논리를 사용하지 않고 양자의 조화를 꾀하려는 견해이다. 즉 가정의 평화 보호, 父와 子의 보호, 혈연주의 등 친생추정과 친생부인 제도의 근거가 되는 가치를 각 조건마다 비교형량하여 개별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법의 정신에 합당하므로, 가령 양친이 별거 혹은 이혼하여 모 혼자 子를 양육하고 있는 등 子가 처한 가정에 더 이상 지켜야 할 평화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혈연주의를 우선하여 부자관계부존재의 주장을 긍정하고, 반대로 가정의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경우에는 혈연주의를 양보하더라도 가정의 보호를 우선한다.12)
그러나 언제 가정의 평화가 없어지는지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애매하고, 이후에도 남편 혹은 아내의 의사가 바뀜에 따라 상황이 변동하면 결국 子의 양육을 위한 안정적인 친자관계를 구축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있다.13) 한편 실제 사안에서는 부부의 이혼이나 별거가 일반적으로 수반되는 점을 고려하면 가정의 평화를 존중하는 경우는 한정적이어서 혈연설과 선명하게 구별되는 의미가 있거나 유용한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비판, 가정의 붕괴를 엄격하게 인정하지 않으면 가정파탄설(가정평화설)은 사실상 혈연설과 다를 바 없다는 비판 등을 외관설과 혈연설 양쪽에서 받고 있다.14)
문제가 되는 부부와 子의 합의가 있으면 친생추정이 배제되고 친자관계부존재확인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15) 그 근거는 친생부인 제도의 근거인 가정의 평화 유지, 부부간 비밀의 비공개 등은 당해 부부와 子의 합의가 있으면 보호의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16) 우리 판례는 친생자 추정을 받는 子에 대하여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의 소를 제기하여 판결이 확정된 경우에 부적법한 청구여서 당연무효가 되지 않으며, 이 확정판결의 기판력은 제3자에게도 미치게 되므로 이와 충돌하는 친생자로서의 추정의 효력은 사라져버렸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17) 이러한 판례의 태도가 우리 법에서 동의설(합의설)로 설명할 수 있는 실무 경향이 형성되는데 영향을 주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주장되는 동의설(합의설)이 종래 통설이었던 외관설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원칙적으로 외관설에 따라 명백한 ‘동서의 결여’가 있을 때에만 친생추정의 예외를 인정하되, 그 밖의 사안에 대해서는 당사자 혹은 관계인의 동의가 있는 경우에 한하여 추정이 미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한편 일본의 가정재판소 실무에서는 당사자의 합의가 있으면 가사사건절차법 제277조(구 가사심판법 제23조)의 ‘합의에 상당하는 심판’에 의해 해결하는 것이 일반적18)이라고 하는데, 이와 같은 규정이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인용될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동거의 결여로 아내가 남편의 자녀를 포태할 수 없는 외관상 명백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물론, 외관상 명백한 사유가 없더라도 아내가 남편의 자를 포태할 수 없음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고 남편과 자녀 사이에 사회적 친자관계도 소멸한 경우라면 친생추정의 예외를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도 주장되고 있다.19)
여기서 ‘사회적 친자관계’란, 혈연관계가 없는 남편과 子 사이에 부자로서의 정서적 유대가 형성되어 있고 남편이 父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의사를 가지고 子를 양육하는 등 생활의 실태가 형성되어 있으며 사회적으로도 친자관계로 인식되고 있는 상태를 지칭한다.20)
이상의 논의들은 친생부인의 엄격한 요건으로부터 발생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고안된 해석론이다. 애초에는 제844조의 문언을 그대로 엄격하게 해석하여 친생추정에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무제한설이 주장되었고 이것이 초창기 우리 대법원의 태도이기도 하였다.21) 하지만 그와 같은 해석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 이후 형식적으로는 친생자의 추정을 받는 자라고 하여도 일정한 경우에는 친생의 효력이 미치지 않도록 하는 제한설(‘친생추정이 미치지 않는 子’를 인정하는 견해)이 발달하게 되어 무제한설은 한동안 학설로서 사실상 폐기되었다.
그런데 우리 민법은 2005년 개정을 통해 종전의 친생부인권자(夫만 인정), 출소기간(子의 출생을 안 날로부터 1년)에 대하여 엄격했던 제한을 다소 완화하였다.22) 현행 민법에서는 처(妻)도 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할 수 있으며(제846조), 출소기간은 그 사유가 있음을 안 날로부터 2년이 되었다(제847조 제1항). 이 점을 감안하여, 이제 우리 민법은 종전처럼 ‘친생추정이 미치지 않는 子’라는 논의로 대응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친생자 추정 규정의 기능을 반감시키는 해석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일종의 무제한설23)이 새롭게 주장되고 있다.
이와는 조금 결이 다르지만, 子와 생부에게도 친생추정을 다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 친생부인의 소의 요건을 완화하여 이들에게도 원고적격을 인정할 필요가 있으며, 이와 같은 입법적 해결이 이루어지기 전이라도 子와 생부 등 이해관계인이라면 누구든 친생추정이 미치는 경우에도 친생자관계존부확인의 소를 통해 제소기간의 제한 없이 친생추정을 번복할 수 있도록 종래의 해석24)을 변경한다면, 그 때에는 더 이상 제844조의 친생추정의 예외를 인정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25)도 주장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친생자 추정제도는 부자관계를 신속하게 확정함으로써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고 출생자의 지위를 보호하는 것이 그 목적이자 기능이라고 설명한다.26) 그런데 이와 같은 설명은 친생추정 제도의 목적과 친생부인 제도의 목적을 엄밀하게 구별하지 않아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친생추정에 관한 제844조 규정만으로는 자녀의 법적 지위를 조속히 안정시키거나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불가능하고, 이것은 친생자관계존부확인의 소가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별도로 제소권자와 제소기간의 제한이 있는 친생부인의 소를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달성된다는 것이다.27) 친생추정 제도는 혈연관계 증명의 어려움을 고려하여 자녀가 태어난 시점을 기준으로 혈연상의 부일 개연성이 가장 높은 사람에게 일차적으로 법률상 부의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 고안된 제도이며, 이를 통해 子의 출생시 ‘父의 공백’ 상태를 해결하는 것을 주된 입법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28)
과학·의학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생물학적 친자관계를 규명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된 오늘날에도 친생추정 제도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자가 없는 것을 보더라도, 친생추정 제도는 여전히 父의 공백 상태를 해결한다는 고유의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이와 같은 친생추정 제도와 친생부인 제도가 사실 별개의 제도라는 서술은 정확한 지적이다. 하지만 개별적인 양 제도 각각의 입법 목적의 내용만큼 중요한 것은 우리 민법 제846조가 “친생부인 제도의 적용범위를 친생추정이 미치는 범위와 일치시켜”29) 놓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친자관계의 결정에 있어 혈연진실주의를 강조하는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보자면, 혈연을 바탕으로 하는 자연적 친자관계를 전제로 설계된 친생추정 제도가 친생부인의 소라는 특유한 소송형태와 결합됨으로써 오히려 자녀의 법적 지위의 조속한 안정이나 가정의 평화와 같은 명분하에 혈연과 배치되는 부자관계를 영구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30)는 설명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그와 같은 장치를 통해 혈연관계 이외의 요소 및 가치도 고려하겠다는 입법자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31)
특히 출생신고 내용에 대하여 가족관계등록공무원이 형식적 심사권만을 가지는 우리 법제 하에서 많은 경우 부자관계를 단절하기 위한 친생부인 제도와 관련해 제844조의 친생추정 효력 여부가 검토되고 있음을 고려하면, 사실상 친생추정을 규정하는 제844조는 친생부인의 소를 규정하는 제846조 이하와 하나의 세트로서 단단히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최근의 개정으로 우리 민법에 들어온 친생부인의 허가청구(제854조의2) 또는 인지의 허가청구(제855조의2) 제도32)의 예를 들어, 종래 불가분적으로 결합된 것으로 이해되어 왔던 친생추정과 친생부인의 제도는 분리가능한 제도임이 명확해 졌으며 그로 인하여 친생추정은 더 이상 확정판결을 받아야만 하는 번복할 수 있는 강한 추정이 아니게 되었다는 주장33)도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어디까지나 법에 의한 입법적 해결일 뿐 현행 법률 해석에 의한 것은 아니며, 그에 앞서 헌법불합치 결정의 대상이 되었던 “혼인관계가 종료된 날로부터 300일 이내에 출생한 자녀”의 경우(제844조 제3항)34) 그 자녀가 출생신고 되기 전에만 제한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한 것으로 이것을 들어 친생추정 제도와 친생부인의 소 제도 사이의 결합 관계를 부정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현행법에서도 일정한 예외는 있지만 친생추정 규정과 친생부인의 소 관련 규정은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친생부인의 제소권자와 제소기간에 대한 민법 개정에 따라 친생추정 여부는 법문에 충실하게 子의 출생시기만을 가지고 정하고 외관설과 같은 예외도 인정할 필요가 없다는 최근의 무제한설35)도 타당한 면이 있다.36) 그러나 현행 민법도 ‘친생자 추정-친생부인의 소’라는 기본적 구조는 개정 전과 동일하며, 여전히 외관설을 비롯한 이른바 ‘제한설’을 통해 친생자 추정을 배제시킬지 여부를 논의할 실익이 있는 경우37)가 존재한다. 현행법에 의하더라도 子 본인이나 그 생부는 여전히 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할 수 없으므로 기본적 실현의 관점에서 충분하지 않다는 비판도 여전히 유효하다.38) 그러므로 제소권자와 제소기간과 관련하여 친생부인 규정이 개정되었음을 근거로 무제한설을 주장하는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친생부인의 소와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의 소를 통해 부자관계를 단절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재 父로 기재된 남편과 子 사이에 실제 혈연상의 관계가 없음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이다. 반대로 가정위탁 제도를 통해 실제 부모·자녀와 같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더라도 현행법에서는 입양을 하지 않는 한 위탁부모와 위탁아동 사이에 법적 신분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우리 법에서 부자관계를 포함한 친자관계의 성립은 역시 혈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우리 민법은 친생부인의 소는 그 사유가 있음을 안 날로부터 2년 내에 제기하여야 한다(제847조 제1항)고 제한하는 이외에도 子의 출생 후에 친생자임을 승인한 자는 다시 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하지 못한다(제852조)고 규정하는 한편, 子 기타 이해관계인은 인지의 신고있음을 안 날로부터 1년 내에 인지에 대한 이의의 소를 제기할 수 있다(제862조)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친양자 입양이 성립하면 원칙적으로 친생부모와의 친족관계는 종료한다(제908조의3 제2항). 이것으로부터 우리 민법이 친자관계의 발생과 관련하여 혈연의 진실‘만’을 추구하는 입장에 서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입법자는 혈연의 진실성 이외에도 ‘子의 지위 보호’와 같은 다른 가치를 보호하고자 결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혈연설 등 혈연진실주의를 강조하는 견해의 목적은, 상대적으로 요건이 엄격한 친생부인의 소를 우회하여 신분법상 부자관계의 추정을 번복하려는 것에 있다. 혈연설에 의하면 나중에 언제라도 법률상의 父(母의 남편)와 子 사이에 생물학적 관계가 없다는 점이 확인되면 친생부인의 소가 아닌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의 소를 통해 부자관계를 부정할 수 있게 된다.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의 소는 제소기간에 제한이 없으며 제소권자의 범위도 매우 넓기 때문이다.39) 하지만 이것은 ‘친생자 추정-친생부인의 소’ 제도의 취지와 근간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법률상 친자관계는 생물학적인 혈연 관계로만 결정된다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적극적인 혈연진실주의는 (입법론으로서의 가치는 차치하고) 해석론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40)
같은 이유에서 그 밖의 가정평화설, 新가정평화설, 사회적관계설도 子의 지위 보호라는 친생추정 제도의 취지에 비추어 찬동할 수 없다. 각 학설에서 고려하는 후속적인 상황에 따라서 장래의 신분관계가 부정될 수 있고, 나아가 그와 같은 후속적인 상황은 관련 당사자들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친생추정 규정의 효력이 미치는지 여부에 대한 판단 기준이 되는 사실이 당사자들의 의도에 의해 얼마든지 변경되거나 만들어질 수 있다면, 과연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의 소에 의한 친자관계 단절을 제한하는 친생추정 제도의 기능을 올바르게 수행한다고 볼 수 있을까. 혈연설과 관련하여 앞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 제도의 취지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子가 출생하면 누구를 그 아버지로 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인 ‘친생추정 여부’는 출생 당시를 기준으로 하여 부모가 언제 혼인하였는가, 아내가 자녀를 언제 임신하였는가에 따라 결정되므로 출생 이후의 사정을 이유로 하여 친생추정이 미치는지 여부가 달라질 수 없다는 비판41)도 경청할 만하다. 앞서 각주에서 소개한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42)의 소수의견에 속하는 金築誠志재판관의 반대의견에서도 지적하듯, 친생추정 제도에 예외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외관설과 다른 학설은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해석론의 한계를 넘고 있는지 여부에서 외관설과 그 밖의 학설들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외관설은 친생추정의 예외를 인정하는 폭이 지나치게 좁다는 이유로 혈연진실주의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현행 우리 민법은 종전과는 달리 처(妻)에게도 친생부인권을 인정하고 있다. 종래 우리나라에서의 논의들은 우리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일본의 학설과 판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43) 일본은 여전히 개정 전 우리의 규정과 동일하게 남편만이 子의 출생을 안 때부터 1년 이내에 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할 수 있다. 일본민법의 해석론에서 벗어나 이제는 우리 법 규정의 내용을 토대로 한 해석론을 전개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남편이라면 부자관계를 스스로 부정하거나 아내(妻)가 부정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44) 따라서 현행 민법 하에서는 종전에 친생추정의 예외가 인정되지 않아 발생하던 문제의 상당수가 해결될 것으로 기대된다.
물론 처의 친생부인권 행사와 제소기간의 기산점 조정(사유가 있음을 안 날)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봉착할 수 있다. 이 때는 ‘부득이하게’ 동의설(합의설)에 따른 해결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법은 출생신고시 가족관계등록공무원에게 실질적 심사권한을 인정하고 있지 않으므로 당사자 사이에 합의만 있으면 임신(포태) 시에 실제로는 동거하고 있었더라도 그 당시에 이미 부부관계가 파탄하고 있었다고 말을 맞춤으로써 외관설에 따라 친생자 추정을 뒤집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친생자관계는 공서에 관한 문제이므로 그 추정여부에 관하여 당사자에게 처분권을 인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지적45)이 있다. 하지만 우리 법이 일정한 경우 친자관계의 성립에 있어 개인의 의사가 개입하는 것을 이미 예정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큰 흠이 되지 않는다.
비록 우리 법에서는 일본과 같은 ‘합의에 상당하는 심판’을 정하는 규정이 없지만, 실제로 현재 하급심에서는 친생자의 추정을 받는 子에 대하여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의 소가 제기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경우 실무에서는 부자 사이에 혈연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명백하고(예를 들어서 유전자감정결과가 제출된 경우) 당사자가 다투지 않는 이상, 제척기간이 지나지 않았으면 친생부인의 소로 변경하도록 유도하고, 이미 경과되었다면 되도록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의 소송에서 이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한다.46)
한편, 자녀 복리의 측면에서 친생부인에 실패한 남편이 자녀에 대한 부양의무를 성실히 이행할 것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외관설을 지지할 수 없다는 종래의 지적이 있다. 그러나 이 때 필요한 것은 부양의무를 강제하는 행정적·형사적 절차의 정비이며 법률상 父라면 부양의무를 부과하고 피상속인이 되어야 하며 그 의무를 면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반론47)도 있다. 특히 문제는 ‘子의 이익(복리)’이 무엇인지 구체적이거나 분명하지 않은 데에 있다.48) 일정한 상황 하에서 母의 남편과 부자관계를 유지하기 보다는 혈연상 父와 부자관계를 인정하는 것이 당해 子의 복리라는 관점에서 직관적으로 바람직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개별적인 사건마다 당사자들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은 각각 다를 수 있고 그와 같은 우리의 판단이 일종의 선입견이어서 오히려 우리가 기대한 것과 반대의 결과에 마주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일부 견해49)에서는 현행 제도와 판례의 해석론(외관설)이 자녀의 복리 실현에 바람직하지 않은 사례50)를 들고 있는데, 이는 너무 예외적인 사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회가 변화하여 예외적인 사례가 종전보다 흔해졌다고 하더라도 일부일처제와 배우자간 정조의무가 인정되는 우리 혼인 제도를 고려하면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의 ‘예외’가 아닐까?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와 관련한 혼인의 기능과 그 가치를 고려한다면 법은 이와 같은 혼인 제도를 유지하고 보호하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혈연진실주의를 추구한다면 결국 子가 태어나면 즉시 그 유전형질을 검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내가 혼인 중에 임신한 子를 모두 의심하여 일일이 남편의 子임을 입증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비경제적인 동시에 아내에 대한 인격 모독이라는 지적51)도 있다.
그런 점에서 위 문제가 되는 사례의 경우에는 당사자가 이를 감수하여 돌파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입양이라는 다른 제도를 통해서도 문제에 대응할 여지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친생자녀를 양자녀로 기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기형적인 법제도는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는 비판52)은 일응 수긍할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현행법의 해석에 있어 혈연진실주의를 만능으로 여겨서야 되겠는가? 앞서 소개한 민법의 여러 조문(제847조 제1항, 제852조, 제862조)에서 친자관계에 있어 혈연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 않음을 이미 확인한 바가 있으며 친양자 제도, 인지되지 않은 혼인 외 출생자의 경우를 생각하더라도 역시 그러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통설과 판례의 외관설 때문에 생부가 혼외자를 출생신고조차 하지 못해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53) 그렇지만 이와 관련하여 출생신고와 관련한 규정을 정비하는 방법은 없는지 의문이며, 나아가 신분관계 등록 절차상 문제가 있다고 하여 실체법의 친자관계 발생 원리를 수정한다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Ⅳ. AID로 출생한 子의 지위
AID로 출생한 자의 부자관계 결정과 관련하여 최초로 제기된 견해는 입양관계설이다.56) AID로 태어난 자에 대한 출생신고는 허위의 출생신고이지만, 허위의 출생신고에 의한 양친자관계를 인정하는 해석론57)을 이용하여 혈연부에게는 친생부, 의뢰부에게는 양부의 지위를 각각 인정함으로써 AID 자녀와 자연생식 자녀 간의 일관성 있는 규율이 가능하다고 한다.58)
한편 민법 개정으로 친양자 제도가 도입되기 전부터 남편의 동의 있는 비배우자간 인공수정자에 대하여 남편과 인공수정자 사이에 친양자(완전양자) 관계를 인정하자는 견해59)가 있었고, 친양자 제도의 도입 후에도 비배우자간 인공수정에 대한 남편의 동의를 친양자 입양의 의사로 보아 친양자 관계 인정에 찬성하는 견해60)가 있다.
친생추정의 범위와 관련하여 앞서 검토한 외관설을 전제로 남편의 동의 하에 제3자의 정액을 사용하여 인공수정을 한 때에는 남편의 子로 추정 받는 혼인 중의 출생자가 된다고 해석하고, 나아가 남편이 친생부인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 여부와 관련하여 인공수정자에 대하여 시술에 동의한 남편이 나중에 마음을 바꿔 친생부인권을 행사하는 것은 금반언의 원칙(신의칙)에 반하므로 부정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이것이 다수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비배우자간 인공수정에 동의한 남편이라도 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여기에서는 子의 법적 지위에 관련한 문제는 부모의 합의 여하로 좌우될 수 없으며, 비록 인공수정에 동의를 하고도 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하는 것은 종전의 행위와 상반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자신의 의사표시가 무효임을 주장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그 자체로는 신의칙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61)이라고 설명한다. 우리 법체계가 예상한 것과는 거리가 있으나 결과적으로 현행법 상 남편에게 출소기간 내에서는 제한 없이 친생부인권이 부여되어 있으므로 AID 시술에 동의한 남편이라도 친생부인권을 행사할 수 있다62)고 주장하기도 한다.
자연적인 성관계를 통하여 子를 출산하는 관계가 아닌 인공생식을 통하여 子를 출산하는 경우에는 혈연관계보다는 인공생식에 관여하게 되는 이해관계자들의 의도와 목적에 의하여 子를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다63)는 주장이 있다. 이에 따르면 인공생식에 있어서 이를 기획하고 주도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쪽은 의뢰부부라고 할 것이므로 의뢰부부의 남편이 그 혈연관계와 관계없이 그 자의 父라고 보게 된다.64)
같은 맥락에서, 신분귀속의 문제에 있어 남편의 동의로 대표되는 의사에 의의를 두고 AID에서는 의사원리를 도입하여 남편과의 부자관계가 정자제공자와의 부자관계에 비하여 우월적 지위를 갖는다는 설명65)도 있다.
우리 민법에서 규정하는 친생추정과 그 부인제도는 자연적인 남녀간 성관계로 子가 출산하는 상황을 상정한 것이다. 입법자는 타인의 정자를 이용하여 출산한다는 것을 염두해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과학·의료기술의 발전에 따라 종래 알지 못했거나 발생하지 않았던 문제에 대해서 새로운 입법을 통해 대응하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그와 같은 규정이 없는 현 상황에서는 결국 종래의 법 규정 중에서 적용할 수 있는 것을 이용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위에서 소개한 학설들 모두 이와 같은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으며 모두 일면의 타당성이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친생추정의 범위와 관련한 외관설을 전제로 하여 친생자관계존부확인의 소를 허용하지 않으며, 친생부인의 소도 신의칙에 근거하여 행사할 수 없다는 학설이 ‘결론적으로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AID에 대하여 남편의 동의가 있으면 이때는 우리 민법 제852조를 적용 또는 유추적용하여 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하지 못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혈연이 없는 남편과 子 사이에 혈연관계가 없음을 이유로 하는 친생부인의 소를 부정하는 근거가 ‘신의칙(금반언)’에 기대어 있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버거워 보인다. 신의칙은 명확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으며 사회의 변화와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르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편과의 친생자 관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인공수정에 동의한 남편이 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견해69)가 있음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다. 또한 강제인지(재판상 인지)와 관련하여 인지청구권은 일신전속권으로 포기할 수 없으며, 심지어 상당한 금전을 받고 그 대가로 인지청구권을 포기하는 재판상 화해나 조정이 이루어진 경우에도 혼인외 출생자가 나중에 인지청구의 소를 제기할 수 있고 실효의 법리도 적용되지 않는다는 판례의 태도70)를 생각하면, 과연 신의칙(금반언)을 근거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한편 결과적으로 타당한 이 학설을 비롯하여 나머지 견해들도 결국 AID로 태어난 子가 남편과는 혈연관계가 없고, 정자제공자와는 혈연관계가 있다는 공통의 전제에 서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하에서는 이 전제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리 법에서 친자관계를 인정하는 근거는 혈연(혼인 중 출생자, 혼인외 출생자)과 의사(법정친자, 혼인외 출생자)에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혈연의 의미가 단순히 父의 유전자를 이어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혈연이 있는 자에게 친자관계를 인정하려는 이유는 어디에 있고, 혈연관계가 있는 子에 대해서는 친생부인과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단순히 생물학적 유전형질을 물려받았다는 사실 때문일까.
혼인외 출생자의 경우에는 생부와 생물학적 유전형질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생과 동시에 그 생부와의 부자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 실제로 혈연관계가 없어도 子의 출생 후에 친생자임을 승인한 법률상의 父는 다시 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하지 못한다는 제852조의 규정은 어떠한가. 이는 결국 친자관계에 있어 혈연을 고려하는 경우에도 혈연관계만이 아니라 그 밖의 의사적 요소도 고려된다는 의미라고 설명할 수 있다. 즉 유전형질의 유무가 친자관계의 결정에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혈연을 근거로 하는 이유도 단지 ‘유전형질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이것이 법률 제도상 중요한 다른 무엇인가를 가리키기 위한 도구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여성이 혼자서 본인의 생식세포만으로 子를 출산할 수는 없다. 따라서 子가 태어나고 어떤 남자와 그 子 사이에 혈연이 있다는 의미는 그 남자가 子의 출산에 관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여를 했다는 것은 어떠한 행위를 했다는 것이고 이는 곧 출산(출생)이라는 결과에 의사가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子의 출산을 위하여 남녀 사이에 벌어지는 일은 너무나 개인적이고 은밀한 것이므로 그와 같은 행위(의사의 개입)가 있었는지는 외부에서 쉽게 알 수 없다. 이처럼 알기 어려우니까 우리의 경험칙에 따라서 子를 출산한 母와의 혼인관계가 있는 남자와 그 子와의 부자관계를 강하게 추정하는 것이다.71)
예전에는 ‘의사의 개입’과 ‘혈연의 존재’는 항상 같이 움직이는 것이었으므로 의사의 개입(행위) 여부를 생각할 필요도 없이 혈연 유무만 따지면 되었다. 그런데 과학, 의료기술이 발전하면서 子의 출생에 대한 부모로서의 의사개입과 혈연(생물학적 유전형질)의 유무를 분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AID로 子가 출생하는 장면에서 子를 세상에 존재하게 만든 원인을 표면적인 생물학적 관계의 유무가 아니라, ‘(제공된 정자의 존재를 포함하는) 제공자의 의사’와 ‘(AID 시술에 대한 동의를 포함하는) 남편의 의사’ 중에서 찾는 문제로 바뀌게 된다.72) 당연히 제공자의 의사보다는 남편의 의사가 子의 출생에 직접 관여한 것이 된다. 비록 그 子와 유전형질을 공유하지 않았음이 분명하지만 AID 시술에 동의를 한 남편으로서는, 子의 출생에 ‘의사가 개입한다’는 점에서 남녀 간 일반적인 성관계를 통해 子를 생산하는 장면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생식 활동의 결과로 子가 태어나는 경우 혈연이 있으므로 친생부인의 소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처럼, 금반언(신의칙 위반)을 내세울 필요도 없이 남편의 친생부인 소송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지 않을까?
반대로 정자제공자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자. 표면적인 생물학적 기준의 유무에 따라서만 판단하면 몰라도 위와 같이 혈연이라는 개념을 규범적으로 이해한다면, 제공자를 생부로 인정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자제공자는 자신의 정자제공 행위로 인하여 父가 된다는 의식도 없으며 따라서 父로서의 책임을 부담하겠다는 의사도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73)은 참고할 만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자제공자가 유전적·생물학적으로 子와 연결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지를 할 수 없으며 반대로 정자제공자에 대한 子의 인지청구권도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74) 정자제공자는 보수를 얻고(무상의 경우도 있겠지만) 자기의 정액을 의사에게 제공하는 자이고 그 지위는 흡사 혈액을 제공하고 의사에 의해 보수를 받는 자의 지위와 유사하다고 지적하는 견해75)도 있다.76) 私見으로는 혈연(유전형질의 유무)에 따라 제공자를 친생부, 夫을 양부로 하기 보다는 정자제공자와의 유전적 연결을 고려하지 않은 채 子와의 친자관계를 부정하고 필요하다면 오히려 제공자가 입양을 통해서 부자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AID에 의한 출생자에 대한 종래의 논의에 대해서는 보조생식이 유형별로 친자관계의 결정기준 중 어떤 것을 적용할 것인가를 논의하였을 뿐 보조생식 자녀의 친자관계 결정이 친자법 전반과의 관계에서 가지는 의미를 명확하게 하는 데에는 소홀하였다는 비판77)이 있다. 혈연 개념을 규범적으로 해석하려는 私見은 이와 같은 비판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AID 출생과 관련한 관계자들의 의도와 목적, 역할을 강조하는 견해78)와 私見은 유사한 부분도 있으나, 행위자의 의사를 주된 기준으로 한다는 점에 개념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리고 미혼모가 제3자로부터의 정자를 받아 출산한 경우에도 그 제공자를 법률상 친생부로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경우와는 달리 정자제공자가 자신의 정자가 미혼모에게 제공된다는 사정을 알 수 있는 경우에는 정자제공자를 子의 친부로 인정한다79)는 위 견해와 실제 결과적으로도 다르다.
또한 AID로 출생한 子의 신분귀속과 관련하여 남편의 의사원리를 강조하는 다른 견해80)도 子와 정자제공자 사이에 유전적 연속성이 있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고 서술한 다음 남편과의 부자관계와 정자제공자의 부자관계 사이의 우열을 확인하는 장면81)에 비추어 보면, 여전히 정자제공자와의 혈연관계를 법적인 것으로 평가하려는 종래 논의들과 전제를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82) 그런 점에서 私見과는 다르다.
한편 子의 출생 과정에 있어 의사적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母와 성행위를 했으나 子의 출생에 대한 인식 및 그 子의 父가 될 의사는 전혀 없었다고 주장하는 자의 경우와 비교하여 AID의 정자제공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의사라는 요소에만 집중하면 전자의 경우와 관련하여 AID 정자제공자를 법적 의미가 있는 친생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경우에 결정적인 차이는 행위의 종류가 다르다는 점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子가 태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감수하고 관련 행위를 하는 것이며, 그 행위만으로 子가 태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AID의 정자제공자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다. 정자제공자도 정자제공이라는 행위에 대한 인식은 가지고 있지만 그 행위만으로는 결코 子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성행위를 하는 자는 子가 생길 개연성이 높은 행위를 하는 점에서 그렇지 않은 AID의 정자제공자와는 다르며, 子의 출생에 직접 관여한다는 측면에서 양자는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입양관계설에 대해서는 계약이라는 구조를 가지는 입양에 있어 우선 형식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입양의 승낙은 누가 하며 미성년자에 대한 법원의 허가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 민법상 13세 미만의 미성년자 입양83)에는 법정대리인의 대락이 행해지는데, 子가 태어나기 전, 나아가 母의 모체에 착상하여 태아가 되기도 전 단계에서의 대락이 가능한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대락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母가 한다는 견해84)와 정자제공자가 한다는 견해85)로 나뉘고 있어 이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미성년자의 입양에 대한 법원의 허가 요건과 관련해서는 실질적 요건의 추인이론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견해86)가 눈에 띈다. 미성년자 입양에 있어서의 법원의 허가라는 실질적 요건이 추인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대법원 판례가 아직 없는 상황에서 일응 설득력 있는 설명이라고 생각되지만, 혹시 본 사안에서와 같이 이미 그 밖의 다른 실질적 요건이 없어지면(공동생활의 파탄 등) 여전히 입양의 효력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또한 이 경우 남편의 의사의 내용이 ‘입양을 하겠다’는 의사인지 여부도 확인이 필요하다. 입양보다는 ‘실제 내 아이처럼’ 키우겠다는 의사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면 입양보다 친양자 제도를 인정하는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효과 면에서 보자면 입양을 인정하는 것이 어떠한 실익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파양 과정에서 법원의 개입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기대하는데87), 친생자 관계를 통해 아예 부자관계를 부정할 수 없도록 하는 편이 더 바람직한 방안이 아닐까.
무엇보다, 정자제공자와 母의 남편이 서로 子를 원하는 경우에는 입양으로 대응하여 子를 두텁게 보호한다는 목적을 달성하더라도,88) 만일 정자제공자와 母의 남편 모두가 원하지 않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입양이든 친양자든 신분상 계약의 구조를 기본으로 한다. 그러므로 AID로 태어난 子를 남편이 더 이상 원하지 않는 경우라면 그 때까지의 친자관계 유무는 차치하고 앞으로 남편과의 입양관계를 이용하여 子를 보호할 수는 없게 된다. 그렇다면 결국 父가 될 의사도 전혀 없는 정자제공자에게 친생부로서의 의무를 강요하게 될 것인데, 어차피 의사가 없는 자에게 의무를 강요해야하는 상황이라면 일반적으로 신분 확보의 면에서도 훨씬 유리하고 子가 존재하는데 크게 기여한 母의 남편에게 父로서의 부양 등의 의무를 강제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고 실효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Ⅴ. 나가며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친자감정이 날로 손쉬워지는 상황에서 친자관계에 대한 다툼이 소송으로 발전할 정도가 되면 이미 지켜야 할 가정의 평화란 없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최근 혈연진실주의를 중시하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친생자 추정을 우리 법 질서를 이루는 전체 제도의 측면에서 파악하면 혈연적 진실 이외에 여러 가지의 가치 요소들(현재 父와 子 사이에 형성된 관계, 父 또는 子의 의사 등)도 고려해야 할 범위에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1990년대 중반에 법적 친자관계는 子의 안전한 성장을 확보하기 위해 법이 결정하는 ‘제도’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견해가 등장하여 당시 혈연주의로 경도되고 있던 학설과 실무의 경향에 경종을 울렸고 그로 인하여 학설과 실무도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89) 우리 법의 해석과 향후 입법적인 해결을 위한 논의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이상의 논의는 어디까지나 현재 법 규정과 입법자의 의사를 존중한 해석론이었다. 해석론과 입법론이 무관하지 않지만, 해석론이라면 현행법에 내재한 질서와 입법자 의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위의 여러 가지 가치를 고려하더라도 만일 입법론이 된다면 입법자의 의사로부터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지므로 결론이 달라질 가능성도 높을 것이다.
본 연구의 서두(Ⅰ)에서 소개한 대법원 사건의 사실관계를 처음 접하고, AID로 출생한 子에 대하여 친생추정이 미치지 않는다면 이해관계인이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을 구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AID로 태어난 子가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 본인과 유전 형질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편이 부자관계로부터 도망칠 수 없게 만들려면, 子와의 친자관계를 단절하려는 남편의 시도 자체를 막아야 한다는 데에도 생각이 미쳤다. 그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현행법의 제도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AID를 이용한 子의 출생과 관련하여 혈연 개념을 규범적으로 파악하는 해석론을 전개하였다. ‘혈연’이라는 문언적 의미의 한계와 관련해 자연스럽지 않다는 비판이 있을지 모르겠다. 현재의 문제 상황과 관련한 법 규정이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방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현행 제도상 친자관계의 본질에 대하여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향후 관련 입법을 통해 정리된다면 이와 같은 문제의 해결이 보다 간명해질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입법적 해결을 위해서는 앞으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본 연구가 향후 입법을 위한 논의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마무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