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글
법과 관련해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에 ‘法網’이 있다. ‘법’을 ‘그물’에 비유했으니, 그리 긍정적 호의적 어감은 아닌 듯하다. 실제로 집단범죄나 나쁜 사람들을 한꺼번에 체포·소탕할 때 ‘一網打盡’한다거나, 영리하고 교활한 악인이 법의 허점이나 빈틈을 미꾸라지처럼 ‘법망을 잘도 빠져 나간다’고 표현한다. 우리 동아시아 전통문화에서 ‘법’ 자체도 그리 호감 받지 못하지만, 게다가 ‘그물’에 빗댄 ‘법망’은 왠지 우리 신체를 구속하고 정신까지 옭매려는 올가미처럼 부정적 느낌이 강하다. 그물로 물고기를 건져 올리듯 죄악 범한 사람을 잡아들인다는 의미상 유사성이, ‘법망’이라는 흥미로운 비유를 형성한 것이다. 법망에는, 물고기를 그 생존 환경인 물속으로부터 강제 이탈시키듯, 죄인을 인간사회로부터 강제 격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는 고대법 일반에 공통된 형법(형벌)의 응징보복 기능에 치중한 사고의식의 반영일 것이다.
‘법의 그물(法網)’ 비유는 과연 언제부터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거기에 함축된 구체적 철학사상은 어떠한 것일까? 본고는 동아시아 고전문헌과 역사서를 통해 그 전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그물의 등장과 유래
원시시대에 인류가 채집으로 식량이 모자라 포획과 사냥에 나서면서 수렵어로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맨손으로 하다가 나무나 돌 같은 도구를 이용하고, 어려움과 실패를 거치면서 시행착오에서 싹튼 잔꾀로 창이나 활도 만들고, 물고기 잡는 엉성한 나뭇가지 발도 고안했을 것이다. 나무통발은 원시적 그물로 여겨지고,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실과 끈이 세련되면서 점차 지금과 같은 그물 형태로 발전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초창기 그물 원형은 어떻게 유래했을까? 동아시아 역사 및 고전문헌에 그에 관한 믿을 만한 기록이 다수 전한다.
그물의 기원에 관해 關尹子에 참신하고 독특한 견해가 나온다. 聖人이 벌을 본받아 君臣관계를 세웠고, 거미[蜘蛛]를 본받아 그물[網罟]을 만들고, 두더지를 본받아 禮를 제정했고, 전투개미를 본받아 병력을 설치했다. 대중은 현인을 스승 삼고, 현인은 성인을 스승 삼으며, 성인은 만물을 스승 삼는다. 오직 聖人만이 만물과 일심동체를 이루어 無我경지에 노닌다.1)
周易 繫辭傳에 구체로 그 성인이 나온다. 상고시대 복희씨[包犠氏]가 王이 되어 천하를 다스릴 적에, 위로 우러러 천문을 관찰하고 아래로 굽어 鳥獸의 무늬[文]를 관찰해 땅에 적합한 법도를 삼았는데, 가까이는 사람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여러 사물에서 취했다고 전한다. 주역 八卦도 이렇게 시작하여, 神明의 德에 통하고 萬物의 정황에 비슷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새끼를 엮어[結繩] 그물[網罟]을 만들어 수렵어로에 활용했는데, 離[☲] 괘에서 형상을 취했다.2) 64괘 중 離卦는 8괘 중 離괘를 중첩한 것으로, 본디 불(火)이나 해(日)와 같은 광명(明)을 상징한다. 이에 대해, 옛날에는 풀섶이나 새끼줄 따위로 서로 중첩되어 엮어진 것이 그물이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또는 리괘가 상징하는 광명은 곧 인간의 눈(目)도 포함하는데, 눈 모양의 그물눈 두 개가 서로 중첩되어 엮어진 것이 그물이라고 해설하기도 한다. 그물은 유래가 結繩·楔形문자와 동일한 연원임을 알려주는데, 離[☲]괘 상징도 사방이 줄로 둘러싸여 속이 빈 그물 모습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離자 자체도 들러붙다(麗)·만나다(遭)·걸리다(罹)는 뜻이 있어, 그물로 물고기나 짐승을 포획하는 것까지 함축한다. 또 上古시대에 새끼줄을 엮어 다스렸는데, 후세 성인이 문서와 법도로 바꾸었다고 전한다.3) 여기서 결승이란 설형문자일 텐데, 이것이 후대 文物典章의 前身이라는 뜻이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하면, 새끼줄로 엮은 그물이 직접 수렵 어로의 경제활동 수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간접으로 은연중에 국가통치의 방편제도(禮法)까지 암시함을 느낄 수 있다.
한편, 漢書에는 그물의 유래에 관해 太昊帝易에 “炮犧氏의 王天下”를 인용해, 炮犧씨가 최초 왕으로 그 德이 나무[木]여서 帝太昊라 부르고, 그물을 만들어 어로수렵을 해서 희생을 취했기에 炮犧氏라 부른다고 전한다.4) 潛夫論에는 雷澤에 출현한 큰 거인[大人] 발자국을 華胥가 밟아 伏羲를 낳았다고 전한다. 그 얼굴모습이 해뿔[日角]과 같아 太皞라 불렀는데, 陳에 도읍해 그 德은 나무[木]였다. 龍과 인연이 깊어 龍師가 되어 八卦를 만들고 새끼줄을 맺어 그물을 만들어 어로수렵을 시작했다.5) 또 抱朴子內篇에는 太昊가 거미줄을 본떠 그물을 만들고, 金天이 九戶鳥에 근거해 시간을 정했고, 帝軒이 봉황 울기를 기다려 음률을 조율하고, 唐堯가 艸冥莢을 보고 달[月]을 알았다고 전한다.6) 太昊는 보통 太皞 또는 太皓로 적으며, 동이족 수령으로 姓은 風이라고 전하는데, 일설에는 伏羲氏라고 한다.
宋代 편찬된 유명한 도교 경전에는, 太上老君의 開天 道統을 밝히면서, 伏羲씨가 陰陽八卦를 짓고, 아직 오곡을 모르던 인류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그물을 만들어 禽獸를 포획해 먹도록 가르쳤다고 전한다.7) 점차 문명이 발전하면서 소박한 천성을 잃는 과정은 이렇게 묘사한다.
“神은 본디 道에서 생긴다. 道는 아무것도 없는 清靜인데, 변하여 神明이 되어 광명이 나고 心意가 생겨 온갖 지혜가 나온다. 지혜란 五欲六情이다. 오욕이란, 귀가 소리를 좇아 미혹되고, 눈이 빛깔을 좇아 淫亂發狂하며, 코가 향기를 좇아 정신을 분산하고, 입이 맛을 좇아 죄악을 지어 법의 ‘그물[網羅]’에 빠지며, 마음이 愛憎을 좇아 사사로이 치우쳐 平正을 잃으니, 이 五欲은 惑亂에 뒤덮임이다. 六情이란 형체와 혼식이 고통과 가려움을 알아 섬세한 원활을 욕망함이니, 귀로 소리를 듣고 눈으로 빛깔을 보고 코로 향기를 맡고 입으로 맛을 보고 몸으로 細滑 의복을 입어, 각각 마음으로 좋아하고 기뻐하며, 게다가 좋아하는 걸 얻으면 마음으로 기뻐함이다. 이 六情으로 정신을 잃기에, 六情이 사람을 망친다고 말한다.”8)
오랜 역사 연원을 반영하듯, 詩經에 “魚網을 설치해 기러기가 걸리는데, 준수한 미남 구해 구부정정 못난 늙은이 얻었네.”라는 비유가 등장한다.9) 周禮에는 수렵용 그물과 사냥을 담당하는 ‘獸人’이란 직책이 나온다. 사냥철에는 그물을 잘 관리하고, 비수기에는 매 같은 사냥새를 우리에 잘 보살핀다.10) 大戴禮記에도 그물[罔罟] 설치를 주관하는 梁[관직]이 나온다.11)
고대 사전인 爾雅에 각종 기물 해석을 보면, 그물은 모두 10여종 분류명칭이 있었다. 요즘 차의 부품명칭이 엄청 세분되듯, 말이 주된 교통수단인 고대에는 말과 마차에 관한 명칭이 엄청 전문화되었고, 고대 주된 생산 활동 어로수렵에 도구인 그물도 놀랍게 세분화한 것이다. 그물의 대표는 종고緵罟로, 구역九罭으로도 부르는 어로용 그물[魚罔]이다. 과부의 통발은 류罶고, 새둥지 모양[새둥지 겨냥한] 그물은 산汕이며, 대로 만든 것은 조罩, 나무로 만든 것은 잠涔, 새 그물은 羅, 토끼그물은 저罝, 사슴 그물은 모罞, 멧돼지 그물은 란羉, 규모가 큰 물고기 그물은 고罛, 수레 위를 덮을 정도로 작은 새 잡는 그물은 동罿 또는 철罬이다.12)
고대 그물의 중요성은 여러 고전 문헌기록에도 다채롭게 나타난다. 莊子와 史記에는 宋 元王 꿈에 어부 그물에 걸려 갇힌 신령스런 거북이 나타나 풀어달라고 하소연해 살려준 고사가 전한다.13) 論衡에는 공자가 老子를 만난 뒤 불가측의 신비감을 龍으로 비유하면서, ‘헤엄치는 물고기는 그물질하고 허공을 나는 새는 주살을 쏠 수 있지만, 龍은 풍운을 타고 상승하는지라 알 수 없다!’고 찬탄한 대목이 나온다.14) 抱朴子는 文體를 평론하면서, 영특하고 웅굉한 것은 천지 바깥까지 網羅하고, 악착같이 얽매임은 새장 안에 갇힌 것 같다고 비유한다.15) 도교 고전인 抱朴子內篇에는 老子가 長生久視를 중시한 정신과 함께, 莊周가 차라리 진흙탕 속에서 꼬리를 흔들망정 그물 속에 갇힌 거북이나 비단옷 걸치고 희생으로 끌려가는 소 신세는 되지 않겠다던 기개가 나란히 소개된다.16) 世說新語에는 公孫度가 邴原을 지목해, 구름 속 白鶴은 燕雀 그물로 잡을 수 없다고 평한 대목이 나오고,17) 提婆가 불경인 阿毗曇 강의를 마치자, 東亭이 法罔道人한테 질문했다는 일화가 실려 있다.18)
Ⅲ. 민생에 핵심도구로서 중대한 그물 정책
원시 수렵어로 사회에서 그물은 민생에 가장 중요한 핵심도구였다. 농경사회로 들어선 뒤에도 여전히 중요한 어로수렵은 안정된 생계방편 유지를 위하여 지도자의 각별한 관심 사안이었다.
우선 공자는 낚시질은 했지만 그물질은 하지 않고, 주살을 쓰더라도 밤에 잠든 새를 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온다.19) 공자가 빈천해 봉양과 제사를 위해 더러 부득이 낚시질과 주살로 어렵을 하긴 했어도, 큰 새끼줄로 엮어 시냇물을 가로질러 물고기를 모조리 잡는 그물질은 仁人의 本心에 어긋나 차마 하지 않은 것이다. 개인의 어짊[仁] 수행 관점에서 공자의 그물질 원천 배제는, 맹자에 이르면 공동체 민생경제 안정 관점에서 그물질의 적절한 제한으로 바뀐다.
맹자는 왕도정치에 핵심 선결요건으로, 농사에 때를 어기지 않아 곡식을 넉넉히 거두고, 촘촘한 그물을 던지지 않아 물고기와 자라가 넉넉히 번식하며, 숲에 때 맞춰 벌목해 나무가 무성하여 민생경제가 풍요함을 으뜸으로 내세운다.20) 또, 제선왕이 천하 패권을 꿈꾸며 제환공과 진문공의 패업에 대해 묻자, 맹자가 仁政과 王道에 핵심으로 일정한 직업생산(恒産)을 강조하면서, 일반 인민이 恒産이 없어 恒心을 지니지 못하고 放辟 사치해져 죄악의 함정에 빠진 다음에 형벌로 다스리면, 이는 인민을 그물질(罔民)하는 것이라고 힐난한다.21)
그물눈이 너무 촘촘하면 새끼 물고기까지 잡아 씨를 말려 어자원이 고갈되므로 예로부터 엄격히 절제했다. 그물눈은 반드시 네 치[四寸] 이상으로 제한해, 한 자[尺] 미만 물고기는 시장에서 팔 수도 없었다. 반드시 越尺만 잡아먹는 원칙이다. 순자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聖王의 제도에는 초목이 무성히 자랄 적에는 산림에 들어가 도끼로 요절내지 않고, 자라나 물고기 미꾸라지 등이 산란할 적에는 그물이나 毒藥을 연못에 넣어 요절내지 않는다. 春耕·夏耘·秋收·冬藏의 四時를 놓치지 않아 오곡이 끊이지 않으면 백성들 식량이 남아돌고, 연못이나 냇물에 그물질 시한을 엄금해 물고기가 넉넉하면 백성들 식용이 남아돌며, 수풀의 간벌 시한을 잘 지켜 조림을 잘하면 백성들 집 지을 재목이 넉넉해진다.”22)
춘추 시대 魯 宣公이 泗淵에서 남획하자 里革이 그물을 잘라 내버린 사건은 아주 유명하다. 예로부터 추위가 닥치면 산천에 어로수렵을 엄금해 짐승과 물고기 번식을 도왔는데, 지금 군주가 물고기 산란 즈음에 그물질함은 씨를 말리는 지나친 탐욕이라고 엄중히 훈계했다. 그나마 좀 현명한 선공은 “내 잘못을 里革이 바로잡아주어 훌륭하지 않은가?!”라고 감탄하며, 찢겨 버려진 그물이 훌륭한 교훈을 일깨워주어 아주 ‘좋은 그물[良罟]’이니, 잊지 않도록 잘 보관하라고 명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樂師 存이 “그물을 보관하느니, 里革을 곁에 두고 충간을 들으며 잊지 않음이 더욱 좋겠다.”고 말했다.23) 여기에도 수많은 고대 그물 명칭들이 등장하고 그에 대한 주석들이 뒤따라, 爾雅에 내용을 방증하기도 한다.
제 환공을 보필해 춘추 첫 패업을 이룬 관중과 그 전통을 계승한 전국시대 제나라 직하학파 실용 목민학을 집대성한 ‘管子’서에는 민생안정과 풍요균부를 위한 방책이 무수하다. 여러 토지 형태에 따라 士農工商의 생산력 균배를 도모한 구체 방안에 보면, 시냇물이나 연못에 그물질할 물고기가 있으면 5畝를 일반 농경지 1무로 환산한다는 토지균배[地均]법이 나온다.24) 또 천재지변으로 인한 흉년이나 뜻밖에 전쟁 같은 비상시에 인민을 굶주리지 않도록 도모하는 식량비축 방안에도 그물제한이 나온다. 강·연못·바다가 제아무리 넓고 물고기·자라가 제아무리 많아도, 그물은 반드시 담당관리[올바른 규격]가 있다. 물고기나 초목을 사사로이 아껴서가 아니라, 배와 그물 한 가지 생업만으로는 살 수 없어서, 인민들이 곡식생산을 전폐하지 않도록 산림천택에 제한을 가한 것이다.25) 주식 생산비축을 확보하려는 독특한 그물질 제한규정이다.
呂氏春秋에도 만물이 소생하는 봄철[季春, 음3월]에 司空 직무로, 각종 어로수렵용 그물·사냥도구·독약 등은 아홉 성문[九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 사명이 나온다.26) 또 농업생산성 향상을 위해 각종 제한규제가 나오는데, 四時의 금지로 산림재목 벌채 금지와 사냥도구-수렵용 그물의 성문 밖 반출 및 어로용 투망금지 등이 포함된다.27)
한편, 貧寒곤궁의 극치로서 ‘그물 짜기’가 나와 눈길을 끈다. 呂氏春秋에는 불우한 때 극한 빈궁의 상징으로 그물이 등장한다. 舜은 손수 밭 갈고 물고기 잡을 적에도 그 현명함이 天子 때와 똑같았지만,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해 가솔들과 땅 파고 물 대며 방석과 자리 엮고 그물 짜며 손발 쉴 틈도 없이 부지런히 일해 겨우 추위와 굶주림의 환난을 모면했다.28) 說苑에도 원대한 포부를 안고 사소한 것을 잊은 영웅호걸 사례로서, “강태공은 농사에서는 종자도 못 건지고, 어로에서는 그물 값도 못 벌었으나, 천하를 다스리는 지혜는 넉넉히 남아돌았다.”는 흥미로운 비유가 나온다.29) 抱朴子外篇에도 姜태공이 지극한 도덕군자이지만 농사에 씨앗도 못 건지고, 순임금[重華] 위대한 성인이지만 고기잡이에 그물 값도 못 건졌다는 일화가 나온다.30) 또 한말 삼국정립 초기에 은둔한 안빈락도 처사의 우활함을 힐난하면서, ‘魚網을 험준한 산봉우리에 펼치고 낚시 줄을 큰 나무 꼭대기에 드리우는’ 격이라는 비유가 나온다.31)
한편, 呂氏春秋에는 學業에 관해 제자의 기본 도리로 ‘스승존경[尊師]’을 강조하면서, 스승 섬기는 방법으로 생전 봉양과 사후 제사에 자원 마련을 위해 몸소 채전 가꾸고 나무 심으며 신발 엮고 그물과 방석 돗자리를 짜며 논밭에 耕耘도 하여 五穀을 생산하고 山林과 川澤에 들어가 물고기와 짐승도 잡는다는 구체 내용이 나온다.32) 군사부 일체 사상에서 ‘하루 스승이면 종신 아버지’라는 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晏子春秋에는 그물 짜고 짚신 엮어 어머니를 봉양하던 北郭騷란 현인이 너무 곤궁해 안자한테 노모 봉양식량을 구걸한 일화가 나온다.33)
옷감과 종이도 기본상 그물 짜기 원리를 확장한 소치라는 흥미로운 기록도 나온다. 淮南子에 보면 의복도 그물 원리를 이용한 듯하다. 당초 伯余[黃帝 신하 또는 황제 자신]가 처음으로 옷을 만들 적에는 삼 껍질을 가늘게 찢어 올을 길게 잇고 손으로 씨줄을 만들고 손가락으로 날줄을 걸쳐 완성된 모습이 마치 그물[網羅] 같았다고 한다. 물론 후세에 이를 발전시켜 베틀과 북을 만들어 좌우로 왕복하며 베를 짜도록 편리를 도모했으며, 그 덕택에 인민들이 몸을 가리고 추위를 막게 되었다.34)
호화사치 상징으로 등장하는 그물도 있다! 呂氏春秋에는, 齊桓公이 즉위해 3년간 세 말만 하여 천하가 어질다고 칭송하고 군신이 모두 기뻐했는데, 고기 먹는 짐승을 제거하고, 쌀 먹는 새를 제거하며, 비단으로 짠 그물을 제거했다고 전한다.35) 이러한 그물은 후대 생산력 향상과 교역 증진으로 눈부신 경제발전과 함께 각종 호화사치가 극성을 부리면서, 唐宋 이후에서 正史에도 ‘硃絲絡網’ 같은 용어가 아주 빈번히 등장한다. 일찍이 楚辭[九歌 湘夫人]에는 벽려(薜荔: Ficus pumila)를 엮어 휘장을 만든다는 시구가 나오는데, 抱朴子外篇에는 붉게 물들인 網紗 휘장이 나온다.36) 당송 이후 호화사치 망사의 출현은 더욱 보편적이었다.
조금 독특한 그물망 용례로, 환관 蔡倫이 필기도구를 혁신해 종이를 발명한 사례다. 고래로 쓰이던 竹簡은 무겁고 번거로우며 비단은 가벼운 紙로 너무 비싸서 인민한테 불편했는데, 채륜이 창의력을 발휘해 나무껍질、삼껍질、헌 베、魚網 등을 혼합해 새로운 紙를 만들어 元興元年[105] 헌상하니 황제가 훌륭하다고 재능을 칭찬했고, 이후로 천하가 모두 애용하며 ‘蔡侯紙’로 불렀다.37) 거미줄 모습에서 그물이 발명되고, 그물을 촘촘히 짜서 베가 되어 옷감으로 의복 혁명을 일으켰으며, 다시 다양한 재료를 분쇄 혼합해 더욱 촘촘한 조밀도로 압축해 종이가 탄생한 셈이다. 여기에 헌 그물도 재료로 혼입되었지만, 기교방식과 원리상으로도 거미줄→그물→베[옷감, 의복]→종이로 더욱 정교하고 조밀하게 압축 발전된 과정을 상상할 수 있다.
Ⅳ. 牧民과 養生에서 그물의 비유
물고기와 짐승을 잡아먹는 사냥도구 그물은 사람 입장에선 아주 지혜롭고 교묘한 문명의 이기지만, 거꾸로 물고기나 짐승 입장에서는 자기들 눈을 속여 생명을 위협하는 함정으로서 최고 최대로 적대시할 것이 분명하다. 이런 역지사지 관점은 영리한 인류가 三代 때부터 통찰하여, 周의 속담에도 ‘짐승은 그물을 싫어하고, 인민은 군주를 싫어한다.’는 명언이 널리 퍼졌다.38) 물론 이 대비적 비유는 인민을 괴롭히고 가혹하게 착취·수탈하는 군주를 비방하기 위해 짐승 심리를 감정이입 화법으로 의인화해 풍자함에 초점이 있다.
또 관중이 천하민심을 얻기 위한 先德後刑의 방도로서 문무겸비를 논하면서, 달리는 짐승을 포획하기 위한 그물망 매복 방법의 양면성을 예시한 비유가 눈에 띈다.39) 특히 국가정치에 근본으로 天時와 人心을 얻는 일이 핵심이고, 그 바탕 위에서 구체적 통치방도로서 ‘法令을 기강으로 삼고 官吏를 그물로 삼으며, 什伍를 行列로 삼고 상벌을 文武로 삼는다.’는 비유가 주목할 만하다.40) 법가의 선구자답게 법치관료를 통치의 그물과 벼리로 비유한 것이다. ‘법망’이 상당히 구체화한 느낌이다.
목민행정의 상징으로서 ‘그물질’에 관한 전설적 비유명언은 ‘湯의 고사’가 압권이다. 바로 殷 시조 湯이 사냥꾼의 수렵그물 3면을 제거한 일화다. 탕 임금이 들에 나갔다가 한 사냥꾼이 그물을 사면으로 빙 둘러치고 축원하는 말을 들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자나, 땅에서 솟아오르는 자나, 사방에서 몰려드는 자나 할 것 없이, 모두 내 그물에 걸리게 하소서!” 이 말을 들은 탕 임금은, “어허! 모든 짐승을 다 잡을 셈이군! 桀이 아니면 누가 이런 짓을 한담?!”이라 탄식하고, 손수 三面 그물을 거두고 한쪽 그물만 남겨 놓은 뒤, 축원을 바꾸어 가르쳐주었다.
“예로부터 거미가 그물(거미줄) 만드는 걸 보고, 사람이 그걸 배워 그물을 엮어 쓰나니, 왼쪽으로 피해갈 자는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피해갈 자는 오른쪽으로 가며, 아래로 빠져나갈 자는 아래로 가소서. 이 명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그물에 걸려든 자만 나는 포획하리라.”
어느 제후가 이 말을 듣고, “탕 임금 덕이 짐승까지 미치는구나!”라고 감탄하자, 금세 소문이 퍼져 천하 40여 제후가 귀순했다. 사냥꾼은 사방으로 그물을 둘러쳐도 반드시 새(짐승)를 잡는 것은 아닐 텐데, 탕 임금은 세 그물을 거두고 한 쪽만 남겨두어, 40여 제후국을 그물질(網羅, 포섭)했으니, 어찌 단지 새(짐승)만 그물질(사냥)한 것에 비하리요?41)
呂氏春秋 저자는, 같은 그물인데도 桀紂가 사용하면 자신과 국가를 모두 패망시키는데, 湯이나 武王은 이를 사용해 천하민심을 얻어 군왕이 된 역사적 사실을 들며, 사용법(마음씀)에 따라 결과가 완전히 상반됨을 지적한다. 탕이 그물을 풀어준 고사에서 ‘解網’이라는 용어가 생겼는데, ‘約法’과 함께 군주의 도덕교화와 王道仁政을 칭송하는 대명사로 후대 널리 쓰이게 되었다. 說苑에는 탕의 고사를 인용해 현인존경을 이렇게 강조한다.
“나라는 크기보다는 民心 얻음에 힘쓰고, 보좌진은 많기보다는 현명한 준재 얻기에 힘써야 한다. 民心을 얻으면 인민이 따르고, 현명한 보좌가 있으면 선비들이 모여든다. 文王은 [紂한테] 炮烙刑 제거를 요청해 殷 인민이 그를 따랐고, 湯은 사냥꾼 그물의 三面을 제거해 夏 인민이 따랐고, 越王은 옛 무덤을 훼손하지 않아 吳 인민이 복종했다. 그들 행위가 民心에 순응했기 때문이다. 소리[진동 주파수]가 같으면 떨어져있어도 서로 공명해 감응하고, 德이 부합하면 만나지 않아도 서로 친근해지며, 현인이 조정에 있으면 천하호걸이 서로 다투어 나아간다.”42)
說苑에는 시냇물이 졸졸 흘러 강하를 이루고, 실[줄]이 끊임없이 이어지면 그물과 비단을 이룬다는 격언과 함께, 공자가 그물로 새를 잡는 걸 보고 제자들을 일깨운 대목이 나온다. 왜 새끼만 다 잡고 어미는 못 잡았냐는 물음에, 사냥꾼이 어미로 새끼는 잡을 수 없지만, 어미는 새끼로 잡을 수 있다고 답하자, 공자는 제자들을 훈계했다. “군자는 누굴 따를지 신중해야 하니, 사람을 잘못 만나면 그물에 걸릴 우환이 있다.”43) 여기서 그물은 크게는 병난부터 작게는 국법형벌까지 자기 생명과 집안을 망치는 환난이니, ‘法=網’ 관계를 함축 암시하는 비유다.
한편, 군주가 사냥에 미쳐 목민행정을 돌보지 않은 안일해태를 꼬집는 그물 비유도 있다.
晉 文公이 사냥 나가 짐승을 쫓다가 큰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자, 옆에 어부를 보고 자기가 군주인데 빠져나갈 길을 안내해주면 厚賜하겠다고 말했다. 어부가 도리어 바칠 게 있다고 답하자, 문공은 늪을 빠져나와 감사하며 가르침을 받겠다고 자청했다. 이에 어부가 말했다.
“큰 고니가 河海 가운데 노닒이 싫증나 조그만 연못으로 이사하면 반드시 주살 맞을 우려가 커지고, 자라거북이 深淵에 잠김이 싫증나 얕은 물가로 나가면 반드시 그물질이나 작살 맞을 우려가 커집니다. 지금 군주께서 짐승을 쫓다가 이 늪까지 빠져들었으니, 어찌 이리 멀리도 행차하셨소?”
文公이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시종한테 어부 이름을 기록해두라고 명하자, 어부는 군주의 대의명분이 天地를 높이 받들고 社稷을 공경하며 제후국을 위무하고 만민을 사랑해 어진 민생정치를 베풂에 있음을 상기시키고, 후사는 사양한 채 군주한테 얼른 귀국하라고 권하며 자신도 일터로 돌아갔다.44)
齊景公이 사냥 나가 17일이나 돌아오지 않자, 晏子가 찾아가 “물고기는 심연이 싫증나 얕은 물에 나와 낚시나 그물에 잡히고, 금수는 심산에서 나와 사냥 당한다.”는 말로 간언한 내용도 아주 유명하다.45) 齊 靖郭君이 인민을 동원해 薛에 성곽을 쌓으려 하면서 빈객들 간언을 엄금한 고사도 널리 전한다. 한 齊人이 딱 한 마디만 하겠다며 어기면 삶아죽이라고 장담한 뒤, “바다 큰 물고기[海大魚]”라고 말하고 물러나왔다. 靖郭君이 무슨 말인지 궁금해 더 말해보라고 종용하자, 죽음 갖고 농담할 수 없다고 사양하던 객이 마지못해 말했다.
“군주께서는 유독 바다 큰 물고기만 듣지 못하셨나요? 그물로도 포획할 수 없고 작살로도 끌어낼 수 없지만, 한번 물을 잃고 뭍에 올라오면 개미들이 득의양양 하는 이치를! 齊는 군주에 물입니다. 군주께서 이미 齊를 갖고 계신데, 어찌 薛을 욕심내십니까? 齊가 없으면 薛 성곽도 무익합니다.”
이에 靖郭君이 크게 기뻐하고 인민을 동원하려는 축성 공사를 그만두었다.46)
장자에는 사납고 약삭빠른 여우나 들고양이가 대들보를 날렵하게 건너뛰며 낮게 매복해 쥐나 가축을 노리지만, 결국 덫과 올무에 걸리거나 그물에 얽혀 죽는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너무 커서 無用한 걸 진짜 크게 쓰라는 ‘無用之用’의 역설을 비유하면서!47)
무위자연과 虛靜을 귀히 숭상하는 老子 도덕경에서 비롯한 병법의 용병술 원리에도 그물이 비유로 등장한다. 淮南子에 虛로 實에 대응하는 병법전략 원리가 나온다. 호랑이표범이 움직이지 않으면 함정에 빠지지 않고, 사슴이나 새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물에 걸리지 않으며, 물고기가 움직이지 않으면 낚시나 미끼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만물은 움직여 제압을 당하니, 성인이 虛靜을 귀히 여긴다. 병법은 道理로 승리를 제압하는 것이지, 사람의 현명한 재주로 이기는 게 아니다. 그래서 사슴이나 물고기를 잡으려면 그물을 치고, 기러기를 잡으려면 주살을 쏜다.48) 黃石公三略 같은 병법에도 네 그물로 網羅한다는 전술이 나온다.49)
한편, 법가의 집대성자 한비자는 老子의 양생법을 풀이하면서, 천도 자연법을 상징하는 그물 비유를 들어 눈길을 끈다. 사람이 태어나 움직이면 모두 死地로 가므로, 聖人은 精神을 아끼고 고요히 머묾을 귀히 여긴다. 움직임이 무소·호랑이 같은 맹수보다 더 해롭기 때문이다. 맹수는 활동구역과 출몰시간이 있어서, 그 구역과 시간을 피하면 피해를 면할 수 있다. 헌데 인민은 맹수한테 발톱과 뿔이 있는 줄만 알지, 모든 만물에 죄다 나름 발톱과 뿔이 있는 줄은 몰라서 만물의 해악을 모면하지 못한다. 예컨대, 세찬 비가 쏟아지는 한적한 광야에 어두운 저녁·새벽에 쏘다니면 비바람·이슬의 발톱과 뿔[風露之爪角]이 해치고, 군주에 불충하고 禁令을 가벼이 범하면 刑法의 발톱과 뿔이 해치며, 향리에서 처신이 무절제하고 애증이 정도에 지나치면 시비투쟁의 발톱과 뿔이 해치고, 무한한 기호욕망으로 動靜이 무절제하면 등창이나 종기 같은 질병의 발톱과 뿔이 해치며, 사사로이 잔꾀 쓰기를 좋아해 道理를 저버리면 그물이나 올무의 발톱과 뿔[網羅之爪角]이 해친다. 맹수에 출몰 구역이 있듯이, 만물의 해악도 각기 근원이 있으니, 구역을 피하고 근원을 막으면 모든 피해를 모면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성인이 만물 해악을 피하는 양생비법이다. 그래서 老子가 ‘외뿔소가 뿔을 들이받을 곳이 없고, 호랑이가 발톱을 할퀼 곳이 없으며, 장병이 칼날 겨눌 곳이 없다.’고 말한다. 특별히 방비하지 않아도 결코 해가 없으니, 천지 道理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天地의 道를 체득해, 움직임에 死地가 없으므로, ‘섭생[양생]을 잘한다[善攝生]’고 말한다.50) 여기서 ‘刑法의 발톱과 뿔’에 상응하는 ‘그물이나 올무의 발톱과 뿔[網羅之爪角]’은 老子의 ‘天網’에 해당하는 천도의 자연법망임이 분명하고, 나아가 그 자연법을 실정화한 국법의 그물일 수도 있겠다.
Ⅴ. 법 그물 비유의 출현과 법망의 특성
주역의 離괘가 실제로 그물을 본떠 만들어져 활용되었다 할지라도, 계사전은 공자가 썼다는 게 最古 견해이므로, 이는 춘추 말엽 이후 사상을 반영하는 셈이다. 그런데 늦어도 周 초기에 기록된 尙書(書經)에는, 商 반경이 殷으로 천도하며 반발하는 민심을 설득하고 한마음으로 천도해 새로운 중흥을 이루자고 역설하면서, “그물[網]에 벼리[綱]가 있으면 그물눈이 조리 있게 펼쳐져 뒤엉키지 않고, 농부가[농사에] 논밭을 잘 다스리고 힘써 경작하면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얻는다.”는 비유로 훈계한 장면이 나온다.51) 여기에 ‘법’은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그물 바깥 둘레에 그물을 정착시킨 굵은 밧줄[벼리, 紀綱]과 조리정연의 개념이 나오고, 전후 문맥상 통치명령의 내용 의미를 통해 그물로써 법령을 직접 비유한 것이 분명히 나타난다.
墨子에 이르면, 법과 그물의 비유적 연결이 더욱 직접 구체화한다. “옛날에 성왕이 다섯 형벌을 만들어 백성을 다스렸는데, 비유하자면 마치 실오라기에 끝매듭이 있고 그물에 벼리가 있는 것과 같아서, 군주에 동조하지 않는 천하 백성들을 모조리 거두어들이는 방편이었다.”52) 여기서는 형(법)이 그물과 함께 실타래(옷감)에 비유되면서, 그 핵심은 여전히 벼리(紀綱)에 주어짐이 확인된다. 특히 법을 준수하지 않고 명령에 불복하는 자들을 그물질하는 형(법)의 목적기능이 직접 구체화한 게 눈에 띈다.
조금 후대에 法家 철학사상을 집대성해 秦의 천하통일에 이념기초를 제공한 한비자도, 형법과 그물을 개념적 비유로 연결시키는데, 오히려 간접 은유의 방법을 택하고 있다. 전술한 것처럼, 한비자는 “일반 백성들이 외뿔소·호랑이에게만 날카로운 뿔이나 발톱이 있는 줄로 알고, 천하 만물에 모두 나름대로 예리한 뿔과 발톱이 있는 줄은 모른다.”고 탄식하며, 구체 실례를 여러 가지 열거한다. 그중에 “임금을 섬김이 충성스럽지 못하고 금지된 명령을 가벼이 범하면, 형법의 발톱과 뿔로 해치고; 자신의 사사로운 잔꾀 쓰기를 좋아하고 공적인 도리를 저버리면, 그물의 발톱과 뿔로 해친다.”는 두 구절의 병렬이 주목된다.53) 준수할 명령과 도리, 응분의 형법과 그물이 각기 동등한 위상에서 대비됨을 알 수 있다.
또 한비자는 ‘참새 한 마리가 천하 명사수 羿 앞을 지날 때마다, 예가 반드시 활을 쏘아 잡는다고 말하면 거짓말이지만, 천하 자체로 그물을 삼으면 그 그물을 벗어날 참새가 한 마리도 없다.’는 宋나라 속담을 인용한다.54) 그러면서 간사함을 알아차려 처벌함에도 거대한 그물(大羅)이 있으니, 道로부터 비롯한 일관된 法術이라고 주장한다. 공정한 이치를 정비하지 않고 군주나 大臣의 개인적 억측의 활과 화살로써 잡으려고 한다면 거짓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비자는 성현에 의지한 주관적 人治를 반대하고, 어리석은 폭군도 잘 통치할 수 있는 객관 法治를 강조하였다. 그가 죄악을 다스리는 法術의 도리를 구체적 그물로 비유하면서, 그 실질 의미에서는 천하라는 그물을 통해 궁극에는 추상적 근원적 자연의 도에 복귀한 것이다.
그물의 바깥에 둘러친 굵은 밧줄이 벼리[綱]인데, 굵은 벼리를 잡아 그물눈[網]을 조리정연하게 펼치고 거두는 데서, 법을 비롯한 사회규범의 핵심근간[중추]을 ‘紀綱’이라 부르고, 五倫三綱도 모든 윤리도덕에 핵심근간이라는 뜻을 취한 비유적 표현이다. 과연 법가의 집대성자 한비자도 국법질서의 근본기강을 그물의 벼리에 빗댄 명쾌한 설명을 펼쳤고, 기실 ‘三綱’도 법치사상의 영향을 받아 漢代 등장한 개념이었다.55)
韓非子는 현명한 군주가 인민을 직접 다스리지 않고 官吏만 잘 다스리면 되는 이유로, 나무에 뿌리를 흔들고 그물에 벼리를 잡아당기는[引網之綱] 비유를 거론한다. 나뭇잎을 낱낱이 흔들려면 얼마나 수고롭고 힘들겠는가? 그 밑둥을 붙잡아 통째로 흔들면 모든 잎이 흔들리고, 깃든 새도 놀라 날아가고 주변 연못에 물고기도 두려워 깊이 숨는다. 마찬가지로 그물을 잘 펴는 자도 그 벼리를 잡아당길 뿐, 모든 그물눈을 낱낱이 추슬러 펼 필요가 없다. 벼리를 잡아당길 적에 물고기는 이미 그물 안에 갇혀 있다. 고로 관리는 인민에 뿌리이자 벼리인 셈이고, 성인은 관리만 다스리지 인민을 직접 다스리진 않는다.56) 법가의 관리 중심 법치주의 원리를 간명히 보여주는 비유로, 근대 관료주의 행정원리에 전혀 손색없는 전통 牧民행정에 근간이다.
한편, 법치와 인치의 대비 관계에서, 법의 객관적 공평무사를 강조해 인정사정없는 몰인정을 찬탄하는 비유에도 그물이 등장하여, ‘법-망’ 대비개념을 상징한다.
사람 감정이란 是非의 주체요 利害의 근본인데, 是非와 利害는 상대적 개념이라 극명히 갈리기 때문에 원망·불평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인정[감정]이 있는 곳에 물의와 의심이 뒤따른다. 예컨대, 물고기가 그물은 두려워하지 않으나 사다[물총]새를 두려워하고, 복수를 노리는 자는 鏌鎁검을 원망하지 않고 자기를 해친 사람을 원망한다. 그물은 무심하나 새는 감정이 있고, 칼은 무정하나 사람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을 만한 사람이 재산을 분배해주는 것보다 추첨하는 게 훨씬 낫다. 有心한 공평이 無心한 不平만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호추를 평하면 반드시 혐오·원망이 뒤따르지만, 스스로 밝은 거울에 비춰보면 속으로 부끄러워할 뿐 원망할 수 없다. 두 사람이 다투면 제3자한테 판단을 구하는 이치도 같다. 제3자가 반드시 공평한 것도 아니고, 분쟁 당사자가 반드시 편협할 리도 없건만, 다투는 마음엔 이기려는 감정이 끼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인은 지혜를 버리고 자신을 온전히 지키며, 인정을 내려놓고 허심탄회하게 만물을 접한다.57) ‘물고기가 그물은 두려워하지 않으나 사다[물총]새를 두려워한다.’는 말은 장자에 나오는데,58) 老莊의 도가 철학을 바탕으로 법가 법치사상이 연역된 한 단면을 명확히 보여주는 비유다. 私情을 완전히 배제하는 도의 완전무결성이 법의 철저한 독립성과 자율성으로 펼쳐지는 도-법 철학사상의 源流이다. 天道[天理]와 人情의 균형조화를 지향하는 유가의 현세적 실용적 인본주의와 달리, 극단적 無情함과 지나친 각박함으로 법가에 치명적 흠결 약점이 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도-법의 객관적 자율성과 독립성을 바탕으로 법치사상의 확립에 획기적 공헌을 한, 그래서 법가에 매우 중요한 지표임이 분명하다.
흥미로운 내용은, 무제 때 대유학자 동중서가 변법경장을 건의하면서 인용한 古人의 격언으로, ‘연못에 가서 물고기를 선망하느니 귀가해 그물 엮음만 못하다.’는 비유다. 이 격언은 양웅이 문장을 지을 적에도 인용된다.59) 抱朴子內篇에는 불로장생 신선술이 없다고 부정하는 속인들의 어리석은 비방 심리를 날카롭게 꼬집는 대목이 나온다. 즉, 그들도 정작 신선이 되길 원하지만, 마치 연못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싶으면서도 그물이 없어 잡을 수 없는 자들이 물속에 물고기가 없다가 비난하는 것과 같은 책임전가라고 힐난한다.60) 또 배움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배우지 않고 알려고 하는 것은, 물고기를 원하면서도 그물이 없는 것처럼, 마음으로 아무리 애써도 수확이 없다고 비유한다.61) ‘緣木求魚’와 같은 뜻으로 ‘願魚無網’ 성어가 탄생한 것이다. 抱朴子外篇에는 형법 적용의 중요성을 칼날에 빗대면서, 또한 그물 벼리에 비유해 천리[자연법]와 연결한다.
“刑은 칼날과 같아서 정교한 사람이 쓰면 저절로 성공하지만, 졸렬한 자는 스스로 다친다. 나라를 다스림에 도덕을 갖추고 刑(법, 벌)을 보조수단으로 선용하면, 간특한 허위가 일어나지 않고 흉악한 무리가 마음을 고쳐먹지만, 만약 그 기강이 끊어지고 그물망이 헝클어져 뒤엉킨다면, 하늘에 罪를 얻고 형벌 적용이 천리에 어긋나 틀림없이 위태로움을 신속히 자초한다. 형과 법은 또한 물불과 같아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으니, 잘 활용하는지 못하는지에 달렸다.”62)
불교에서 같은 물도 소가 마시면 우유를 짜지만, 뱀이 먹으면 독을 뿜는다는 비유와 같은 맥락이다. 칼날 비유는 요즘 의사가 잡으면 사람을 살리고 도둑이 잡으면 사람을 해친다는 표현으로 고칠 수 있다.
한편, 抱朴子는 세밀한 법망과 준엄한 형벌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며, 작은 범죄라도 사면 없이 刑戮에 처하고, 대악은 아홉 번 정벌해서 응징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흉인이 득지하면 군자가 실망하므로, 법망이 너무 성글어도 빠져나가는 자가 많은데, 하물며 법망이 아예 없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거미는 그물을 쳐서 살고 이와 벼룩도 굶주리지 않거늘, 만물을 부리고 이용할 교묘한 지혜를 타고난 인류가 입에 풀칠하고 몸에 옷을 걸치기 위해 그토록 극렬한 죄악을 저지를 수 있느냐고 힐난한다. 그래서 聖人은 흉악한 자들이 있을 수밖에 없고 우매한 대중은 교화하기 어려운 현실을 인정하고, 야한 치장이 음란을 꾀고 태만한 갈무리가 도둑을 부르는 환경적 요인을 감안하여, 주역의 坎괘를 본받아 죄악이 싹트기 전에 예방하는 대비책으로 법과 형벌을 제정했다. 외뿔소의 뿔과 봉황의 발톱은 하늘[자연]이 진실로 부여한 생존무기지만 반드시 매일 쓸 필요는 없듯이, 벌과 전갈은 毒을 지녀 자신을 호위하고 지혜로운 새는 갈대를 부리에 물어 거미줄을 피할 줄 알 듯, 인류 공동체도 생존과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타고난 지혜로 법망과 형벌 제도를 고안해 시행한다는 비유적 해설이 자못 흥미롭다.63)
Ⅵ. 법 그물 비유의 역사적 전개
史記에는 법을 ‘그물’로 비유한 표현이 여럿 등장하나, 아직 ‘法網’이나 ‘禁網’ 같은 합성어는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사마천은 당시 [국법] 그물이 성글고 인민이 부유하다든지,64) 酷吏列傳 평론에서 옛날 秦 때 천하 그물이 빽빽했지만 간사허위가 싹터 극도에 달하자 위아래 모두 달아나 숨었는바, 漢이 발흥해 질박을 되찾아, 배를 삼킬 큰 물고기도 빠뜨릴 만큼 그물이 성글었으나, 張湯이 죽은 뒤에 그물이 세밀해지고 삼엄해졌다고 회고한다. ‘法令이란 통치에 도구수단일 뿐, 통치의 청탁을 좌우하는 근원은 아니다.’는 근본 인식이 깔려 있다.65)
후한 班固가 편찬한 漢書에는 [국법] 그물의 疏密에 관한 史記 내용을 이어받아 전하면서, 한 단계 발전한 기록이 나타난다. 食貨志[平準書]와 酷吏傳의 내용은 거의 그대로 답습했는데,66) 周秦의 폐해는 [법]罔이 조밀하고 조문이 준엄하며 형벌이 가혹했으나, 漢이 번잡한 걸 모두 소제해 인민을 휴식케 했다고 전한다.67) 특기할 점은, 漢書에는 그물망을 ‘罔’자로 표기하는데, ‘법망’이나 ‘형망’은 아직 나타나지 않지만, ‘禁罔’이 처음 등장해 ‘罔’과 함께 쓰이는 것이다. 예컨대, 游侠傳과 循吏傳에는 漢初에 秦의 폐해를 고쳐 만사에 간편함을 꾀해 禁罔이 疏闊했다고 전한다.68) 또 史記에 없던 刑法志에는 漢고조의 약법삼장을 ‘배를 삼킬 물고기가 빠져나갈 엉성한 그물[网漏吞舟之魚]’로 비유하면서, 서한 형법 변화를 대강 이렇게 기술한다. 효문제 때 禁罔이 疏闊하고 張釋之를 廷尉에 임명해 죄가 의심스런 경우 민의에 맡겨 형벌이 크게 줄고 형벌이 거의 사라진 기풍이 되었다. 효무제가 즉위해 사방으로 원정을 강행하면서 백성이 빈궁해져 범법이 잦고, 張湯과 趙禹 같은 혹리를 임명해 禁罔이 점차 엄밀해졌다. 그 결과 文帝가 본디 인민을 살리고자 肉刑을 제거한 것이 가혹한 매질로 죽게 되니, 도리어 死형으로 인민을 그물질한 셈이 되었다. 그물은 촘촘해지나 간사함을 막을 수 없고, 형벌은 번잡해지나 인민은 더욱 태만해졌다.69) 이러한 현상은 무제 때 강직한 신하 汲黯이 지적했듯이, “칼과 붓을 쥔 옥리가 오로지 법조문을 깊이 천착해 교묘한 농단으로 인민을 그물[罔]에 빠뜨려 자기 공적으로 자랑한” 때문이었다.70)
漢書 원문에 ‘法罔’이 딱 1번 나오는데, ‘太常失法罔上, 祠不如令’으로, ‘太常이 法을 어겨 주상을 기罔하고 제祠를 令대로 지내지 않았다.’는 뜻이니, ‘法罔’이란 단어로 쓰인 게 아니다.71) 그리고 한서 注에 ‘法罔’이 딱 1번 나오는데, 후한 때 인물 服虔의 글을 인용해, 서한 때 용어는 아닌 게 분명하다.72)
後漢書에는 한서에 등장한 ‘禁罔’이 ‘禁網’으로 나타나면서, ‘法網’이 2회나 처음 등장하는 게 특기할 만한 변화다. 왕망이 찬탈한 전한 황실을 광무제가 되찾아 중흥을 도모하는 후한 초기에는 ‘禁網’이 제법 疏闊했다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73) 나중에 북방 匈奴와 鮮卑가 강성해지고 변방수비가 느슨해지면서 ‘禁網’에 구멍이 많이 뚫려 金과 鐵이 대부분 도적소유가 되었다고 한다.74) 안제 元初2年[115] 龐參이 羌에 패하여 질병을 이유로 귀환해 하옥되자, 校書郎中 馬融[79-166]이 글을 올려 예전 사례를 들며 패전 장수로 ‘法網’에 빠져 감옥에 갇힌 龐參과 梁慬을 寬宥하도록 주청해 사면되었다.75) 또 후한 말 桓帝 유모이자 中官貴人의 外親인 張子禁이 권귀세도를 믿고 ‘法網’을 무시하자, 功曹 岑晊이 그녀를 체포 투옥해 곤장을 쳐서 죽이도록 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76) 허나 이 ‘法網’은 후한 때 기록을 직접 인용한 것인지, 아니면 후한서를 편찬한 南朝 宋에 范曄이 당시 언어로 기술한 건지는 불분명하다. 후한서에는 老子의 ‘天網’에 관한 기록도 6회 가량 나온다.
그밖에 실질상 법망을 가리키는 독특한 ‘[羅]網’ 용례도 보인다. 和熹鄧皇后는 太后가 되어 和帝 아우와 河間王의 자녀 5세이상 40여인과 鄧氏 근친 자손 30여인을 불러 모아 경서를 가르치고 친히 文德으로 監試하여, 스스로 절제하여 [법]망에 저촉되지 않게 훈도했다고 한다.77) 환제 때 시중을 지내고 총애를 받다가 음해를 당해 망명 다니던 寇榮이 올린 상소문에 보면, “자사 張敬은 아첨하고 기발한 법망[機網]을 설치하기 좋아하며 황제의 벽력 진노를 곧잘 유발”하여, 직접 출두해 진정하고자 해도 “구중궁궐에 걸음마다 함정이 설치되어 발을 들 적마다 그물[罘罝]에 저촉되고 움직일 적마다 그물[羅網]에 걸릴 지경이라 영원히 알현할 인연이 없을 지경이다.”고 호소한다.78)
三國志에는 ‘형망’과 ‘천망’이 각 2회씩 나오는데, ‘罪網’과 ‘國網’이 나와 눈길을 끈다. 특히 ‘天網’은 비운의 대문호 陳思王 曺植이 즐겨 애용했다. 그는 문제4년[223] 雍丘王으로 쫓겨난 뒤 올린 상소문에서 “진실로 天罔에 거듭 걸릴 수 없고, 聖恩은 다시 기대하기 어렵다.”고 전전긍긍 송구한 마음을 표현했고, 말미에 붙인 獻詩에서 황제 당부로 ‘그대 내 어린애여, 은총을 믿고 교만에 넘쳐, 손발 들면 時網에 걸리고 움직이면 國經을 어지럽히는구나!’라고 자책하기도 했다. 文帝를 애도하는 誄문에서는, “높이 날아 아득히 쉬고 싶으나, 天網이 멀리까지 감싸니 두렵고, 멀찌감치 산자락에 뼈를 던지고 싶어도, 조정에서 양육해준 은혜 갚아야 하네.”라며, 윤리도덕과 법망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자신의 부자유를 은근히 탄식하였다.79) 또 그 전에 楊震의 현손 楊脩의 호감을 사기 위해 보낸 서한에서는, 建安 당시 대문호들을 찬상하면서, 이들이 모두 魏에 있음을 자랑하여 “우리 王이 天網을 펼쳐 이들을 망라하고 八紘을 떨쳐 이들을 껴안았다.”고 적었다.80)
조조 4촌 아우 曹洪은 부유했으나 인색했다. 文帝는 젊어서 비단 1백필을 빌리자고 요청해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었다. 나중에 그가 犯法해 사형에 걸리자 어느 측근도 구할 수 없었다. 卞太后가 郭后한테 “가령 曹洪이 오늘 죽는다면, 내 明日 황제한테 너를 廢后하도록 명하겠다.”고 말하자, 곽후는 문제한테 울며불며 졸랐고, 조홍은 가까스로 죽음만 모면하고 官爵을 잃었다. 재산까지 몰수했으나, 태후 명으로 돌려주었다고 한다. 죽을 줄 안 조홍은 기사회생해 문제한테 사죄 서신을 올려, “혼미한 늙은이가 탐욕에 눈이 어두워, 國網을 저촉해 三千에 가까운 죄악은 도저히 사면될 수 없어 저자에 끌려가 주륙을 당해 마땅하나, 다행히 天恩을 입어 骨肉이 更生하게 되었습니다.”고 감지덕지했다.81)
한편, 吳에서는 武昌 左部督 薛瑩이 억울하게 하옥되자, 승상 陸遜 아들이자 孫策 外孫인 抗이 國家에 선량한 보배이자 社稷에 귀중한 자산인 준재를 아끼고 보호해야 한다며, 周禮와 春秋에 善賢 사면정신과 서경에 ‘무고한 사람 죽이느니 차라니 무도한 놓치는 편이 낫다’는 법언까지 원용하여, 설형 죄를 사면하고 형옥을 애긍히 여겨 刑網을 청정히 시행하면 천하가 몹시 다행이겠다!”고 상소했다.82) 유사가 사안을 자세히 살피지 않아 갇혔는데, 만약 誅戮한다면 인민들이 더욱 실망할 거라며, 공평하고 정의로운 형법그물로 깨끗이 정화하라는 취지다.
또 승상 陸遜 族子인 陸凱는 孫皓의 무도함을 간언한 뒤 上疏한 글에서, ‘인민은 국가에 근본이라, 그 음식을 중히 여기고 그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잦은 출병으로 인민고통이 극에 달했으니 애긍히 여겨 백성들 마음을 진정시키라고 주청하며, 그러면 마치 물고기와 자라가 독살 위험이 가득한 연못에서 벗어나고, 새와 짐승이 그물망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으니, 사방 인민이 포대기를 업고 모여들 것이라고 비유했다.83) 한편, 孫策이 남방에 세력을 확장하며 회계태수 王朗을 성토하자, 왕랑은 포로를 자칭하며 “보잘것없는 재주로 사사로이 조정에 잘못 불려, 관작을 받고 사양하지 않아 罪網을 범했다.”고 사죄했다.84)
晉書에도 여러 용례가 골고루 출현한다. 刑法지에는 전대에 ‘科網이 본디 조밀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咸熙2년[265] 5월에는 여러 번잡한 ‘禁網’과 불편한 法式을 제거했다.85) ‘刑網峻急’86) ‘漏網吞舟’ ‘網密’ ‘峻法’ ‘寬網’ 등도 자주 나오고,87) ‘威網’이나 ‘秦網’이나 ‘塵網’ 등의 용례도 눈에 띈다.88) 이밖에 명인 문장에 ‘天網’이 즐겨 애용된다.89)
그 뒤로 南朝 宋書에도 ‘천망’이 2회, ‘형망’이 1회 나온다. 何慧文이 역모에 가담했다가 특별 사면을 받았는데, “손수 忠義를 해친 역모에 빠졌으니, 비록 天網이 더없이 텅텅 비어 빠져[사면] 나간다 할지라도, 무슨 면목으로 천하 선비를 대한단 말인가?”라고 참괴하며 음독하려 했으나, 문하생이 사발을 엎자 단식으로 죽었다.90) 張暢이 사촌아우 永한테 보낸 위안 서한에서, “근자에 모두 네가 刑網에 원인을 믿고 이해하니, 비록 감옥에 갇혀있을지라도 腹心에 전혀 부끄러움 없다 할 것이다.”고 말했다.91) 특기할 점은, ‘法網’이 4회나 나오고 ‘國網’이 3회, 그리고 ‘憲網’도 1회나 출현한 사실이다.
宋 明帝가 泰始3년[467] 춘정월에 내린 조서에, “法網의 적용은 세상을 봐서 시행하고, 관대한 은혜의 도리도 시기에 따라 베푼다.”고 밝혔다.92) 桓玄이 晉 조정을 보필하며 肉刑 부활을 의론할 적에, 蔡廓은 반대의론을 개진하면서, “말세에 인심이 각박하고 허위가 판을 쳐서, 法網이 더욱 조밀해져도, 교활한 모리배가 날로 득세하고, 수치심이나 경외감이 갈수록 희박해져, 종신 극렬한 노역을 부과해도 간사함을 그치게 할 수 없거늘, 하물며 얼굴에 먹물을 새기거나 코 좀 벤다고 쉽사리 개과천선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처참하고 고통스런 비명소리만 드높일 뿐, 다스림과 교화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라고 개진했다.93) 文帝의 열둘째 아들 始安王 休仁이 역모죄로 사약을 받고 죽은 사건에 대해서, 무제는 “조정이나 시장에서 공개처형으로 國刑을 엄명히 신칙해야 하나, 法網을 加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배려했다.”고 자위하는 조서를 내렸다. 한편으로는 민심이 동요할까 염려해, 休仁이 죽은 사안의 시말을 경들이 잘 모르니 지금 상세히 공시한다고 전제한 뒤, 文帝의 열셋째 아들 晉平剌王 “休祐도 탐욕과 방자로 정치를 비방하여 法網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조서를 내린 뒤 곧 죽였다.94) 골육상잔의 권력투쟁에서 승자가 패자를 반역죄로 처단하면서 ‘법망’이란 용어를 자주 들먹인 걸 보면, ‘법망’의 고금 보편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桓玄이 肉刑부활을 의론할 적에, 孔琳之는 “서경에 ‘刑罰은 가벼운 세상도 있고 무거운 세상도 있다.’는 말이 시대에 따른 변화를 뜻한다고 풀이하며, 三代에는 풍속이 순후하고 사건이 간단해 ‘刑辟’을 밟는 일이 드물었지만, 말세에는 습속이 교활하고 번잡함에 힘써 걸핏하면 ‘憲網’에 빠진다.”고 대조해 평했다.95) 그는 근래 형벌의 가중 경향을 지적하며, 당시 棄市형을 본래대로 오른쪽 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로 대체해 목숨을 살려주는 어진 공덕도 작지는 않다는 의견을 냈다.
‘國網’은 장군 劉勔이 晉平剌王 休祐의 반역에 가담한 殷琰한테 투항을 은근히 설득하는 서한에 2번이나 연거푸 나온다. “현명한 당신 형님은 長史로서 청백리 반열에 오르고, 현명한 당신 아들도 參軍으로 또한 國網을 보임하고 있소!” “바야흐로 지금 國網은 疏略[관대]하여 단지 큰 기강만 들어 보일 뿐이니, 근래 서로 말을 주고받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오. 足下의 腹心과 손발톱 부하들도 모두 손을 맞잡고 무기를 버리는 까닭은, [족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가 아니라, 일이 성공할 수 없어서 재앙과 해악이 이미 닥친 줄 알기 때문이오.”96)
그밖에 주요 그물망으로는, “網은 성글어서 행해지고, 法은 은혜 때문에 휴식한다.”97)는 ‘망-법’의 대비나, “지금 머슴이 많은 자는 王憲에 오만하고, 노복이 없는 자는 時網에 두려워한다.98)”는 ‘헌-망’의 대조, 廬山에 깊이 은거 수행하는 翟法賜를 “王憲으로 핍박하고 嚴科로 구속하려” 사냥하듯 뒤진다면, 뜻밖에 투신을 초래해 교화를 손상할 수 있다는 ‘헌-과’ 대비,99) 폐해를 제거해 인민을 구하려면, 반드시 간명한 용서로 ‘그물망을 놓고 벼리를 수선해야’ 번잡해도 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網-綱’의 대조100) 등이 눈에 띈다. 특히 樂志에 종묘 송덕가에는 복희황제 초 천지개벽 직후 “그물을 엮어 금수를 잡아 군중민생이 안정”된 그물 유래와, 천지에 순응하고 陰陽이 조화 이루는 가운데 “帝網을 펼치고 皇綱을 바로잡아, 어진 풍속을 퍼뜨리고 은혜로운 평강을 이룬다.”는 대조, “그물을 끊어 기린을 풀어주고, 올무를 늦춰 봉황을 놓아준다.”는 어짊, “夏 桀이 무도해 조밀한 그물을 산하에 펼치고 혹독한 축원으로 섬세한 그물을 떨칠 적에 참새는 과연 어떠했을까? 殷 湯이 天德을 숭상해 그물 삼면을 제거하니 뭇 새들이 소요하며 날아와 화창하게 지저귀었네.”라는 표현까지 다채롭게 등장한다.101)
그 이후 史書에도 다소간 출입이 있지만 대체로 비슷한 용례가 출현한다. 이하 특히 주목할 몇 표현과 발전양상만 간략히 소개한다.
明史에는 사방팔방도 모자라 “시방을 모두 그물 쳐서[十面張網]” 물샐 뜸 없이 모조리 망라 포획하는 대책이 여러 차례 나온다. 이와 함께 요즘 우리가 흔히 쓰는 ‘一網打盡’ 용례가 역사상 처음 출현한 점이 특별히 눈에 띈다. 줄여서 ‘一網’이라 쓰기도 하는데, 무려 6회나 나온다. ‘十面’과 ‘一網’은 언뜻 보면 판이하게 달리 느껴지지만, 실질 내용과 의도는 완전히 일치한다. 양 극단이 상통하는 이치랄까, ‘하나가 일체고 일체가 하나’라는 화엄경 도리와도 같은 원리다. 한번 그물을 던져 모조리 잡아들이려면, 새어나갈 틈이 없이 모든 면을 완벽히 망라해야 한다는 취지다. 물론 어감에서 느끼듯이, 매우 삼엄하고 가혹한 분위기가 지배한다.
명말에 左良玉[1599-1645]이 慈烺太子를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간신 馬士英의 온갖 살륙 죄악을 성토하는 상소문에서, “더욱이 심지어는 세 사안을 빌미로 평생 자기 뜻에 불쾌한 사람은 一網打盡해, 천하 士民이 몹시 두려워 떨며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고 적었다.102) 余珊은 嘉靖4년[1525] 조서에 부응한 十漸 대책 중 아홉 번째로, “正德 때 大禮의론이 인 뒤 황제 뜻에 거슬리는 자는 유배하거나 채찍으로 쳐서 내쫓아 반드시 一網으로 다한 뒤에 그쳤다.”고 지적한다.103) 또 魏忠賢의 비위에 거슬리는 자들은 “魏忠賢의 독한 화염을 빌려 一網에 모조리 제거하고 살륙하거나 금고에 처해 선량한 부류는 하나도 없게 되었다.”는 만력 말기 붕당 폐해도 나온다.104) 이에 周宗建도 魏忠賢이 廷臣 수십인 성명을 1책[살생부, 블랙리스트]으로 작성해 一網에 적중하고, 익명투서로 50여명도 엮어 들였다고 直攻했고,105) 满朝薦과 毛羽健 등도 ‘一網’ 타진을 강력히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106)
明史에 단 한번 나오는 ‘一網打盡’은 명실록을 검색하니 목종4년[1570] 10월25일 기사에 실린 掌都察院事 大學士 趙貞吉 상소에 처음 나온다. 명사 기록보다 무려 6-7십년 앞선 용례고, 명실록 전체로는 11건이며 청실록에는 1번 나온다. 오히려 조선왕조실록에는 성종9년[1478] ‘一網盡打’가 처음 나오고, ‘一網打盡’은 성종24년[1493년 명 弘治 6년] 8월 10일 임신에 처음 등장해 실록 전체에 무려 136회나 나온다. ‘一網’은 명실록에는 헌종 성화22년[1486] 처음 등장한 이래 모두 39회[청실록은 5회] 검색되는데,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196번 나온다.[~打去, ~盡去, ~盡之, ~殆盡, 打盡~ 등 비슷한 용례가 다수 등장.]107) 따라서 기록상으로는 조선에서 명보다 시기로도 훨씬 일찍부터 빈도수도 훨씬 많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특이한 용어로, 郭登이 창의로 개발한 무기로, ‘땅을 휘젓는 용[攪地龍]’과 ‘하늘을 나는 그물[飛天網]’이란 명칭이 눈에 띈다. 깊은 참호를 파서 토목으로 위를 덮어 평지처럼 위장해 적진에 들어가 기계를 발사해 적군이 서로 충격해 경각에 함락하게 되었다.108) 일종의 땅굴과 쇠뇌 발사를 가리키는 듯하다. 비슷하게 劉定之가 紫荆、居庸 두 關塞에 고안한 전술무기로, 뭍에 종횡으로 판 참호 ‘地網’과 물에 깊이 판 도랑 ‘水柜’도 눈에 띈다.109) 여기서 ‘地網’은 남송 명장 吳璘[1102-1167]이 항금투쟁 시 天水를 지키면서 적군 기마병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유효적절하게 활용한 전술에서 이미 명명한 걸로 확인된다.110) 그밖에 명사에는 선비들 머리에 쓰는 간편한 갓인 網巾이 9회나 나오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2년부터 총 54회 나온다. 명실록에 태조때부터 총 3회 나오는 걸로 보아, ‘망건’이 명대 이전에 이미 창안된 듯하다. 참고로 조선시대 선비들도 널리 애용한 ‘망건’이 청사고에는 전혀 안 보이고, 청실록에 2회 나온다.
이상에서, 법과 그물의 비유는 처음에는 상징적 의미를 통해 간접으로 연결될 뿐, 결합된 단어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으며, 단어도 인간 법망보다는 자연법칙 그물인 ‘천망’이 일찍 문자 기록으로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漢 이후 正史 기록에 법과 그물이 결합한 비유적 용어가 점차 등장하는데, 法網보다는 禁網이나 刑網이 먼저 출현했다. 전통법의 중요한 본질속성이 금지명령과 형벌제재로 특징 지워지는 점을 감안하면 자연스러운 역사 추이로 여겨진다. 또, 사마천의 史記(游俠列傳)에서는 法網을 포함하는 ‘文罔’(文網, 문자그물) 표현도 등장하여, 성문법 체계의 정립을 암시한다.111)[실제로 현재 중국에선 ‘文罔’이 ‘법망’ 별칭으로 쓰인다.]
Ⅶ. 우리나라 역사기록에 법 그물 비유
우리나라 역사에서 그물망에 관한 기록을 대강 살펴보자. 먼저 ‘新羅’ 명칭이 “新은 德業이 날로 새로워지고, 羅는 비단 본의보다는 사방을 網羅한다는 뜻을 취한 國號”라고 한다.112) 본디 그 뜻을 취한 건지, 나중에 삼국 반쪽 통일을 염두에 두고 김부식이 그렇게 갖다 붙인 해석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물로 에워쌈’이란 뜻이다.
眞平王 51년[建福46년, 己丑] 秋8月에 신라가 高句麗 娘臂城을 침공할 적에 軍勢가 불리해 군사들이 싸울 마음이 없자, 副將軍 김유신이 “옷깃을 떨치면 갖옷이 바르게 되고 벼리를 치켜들면 그물눈이 쫙 펴진다.”는 속담을 인용하며 자신이 벼리와 옷깃이 되겠다고 자청해 적진을 세 번이나 곧장 돌격해 승세를 잡았다고 전한다.113) 高句麗 嬰陽王(一云平陽) 23년 춘정월, 황제가 보낸 조서에 高句麗를 꾸짖으며, “天道는 음란함에 화를 내려 亡兆가 이미 드러나고, 예전 정벌에서 이미 天網을 새어나갔다”고 열거한 말이 나온다.114)
한편, 羅唐 연합군이 百濟를 침공해 다급해지자, 義慈王은 당시 죄를 얻어 古馬彊知縣에 귀양가 있던 佐平 興首한테 사람을 보내 어찌하면 좋을지 물었다. 興首는 “唐 병력이 많고 군률이 엄명하며 신라군사까지 합쳐서, 平原廣野에서 대치하면 승패가 불확실하니, 1當萬이 가능한 백마강과 炭峴 두 要路에 勇士를 뽑아 보내, 唐兵이 백마강에 진입하지 못하고 신라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지키면서, 성문을 굳게 닫고 사수하다가 적군 식량이 바닥나고 사졸이 피곤하길 기다려 분격하면 반드시 격파할 것이다.”고 답변했다. 허나 조정 대신들은 시기심이 아직도 강렬했던지, “興首는 오래 감옥에 갇혀 군주를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테니, 그 말을 믿을 수 없다. 唐兵이 白江에 진입하면 배가 나란히 올 수 없고, 신라군이 炭峴에 올라서면 말이 나란히 오기 어려우니, 그때 병력으로 공격함만 못하다. 그러면 적군은 마치 우리에 갇힌 닭과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죽이듯 쉽게 처치할 수 있다.”고 그럴듯한 비유로 王을 현혹했다. 그 결과 의자왕은 생포되어 당으로 끌려가고 백제는 멸망에 이르렀다.115)
高麗史에는 仁宗·神宗 때 각각 金에 사절을 보내 올린 表문에, “황제 폐하의 깊은 인자함으로 [天]網을 풀어 감싸준다.”는 어조의 문구가 실려 있다.116) 약소국으로서 사대외교 예의상 쓰인 관용구지만, 그리 썩 유쾌하진 못하다. 그런가 하면, 忠烈王 때는 원 대신 忽刺歹 등이 침탈 점령한 논밭과 인민을 모두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조치해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청한 表문에서, “폐하가 빠뜨림 없는 그물을 펼치고 공평무사한 문을 열어 公道에 의해 분명히 추궁해 달라.”고 적었다.117)
高麗말 恭讓王 때 金伯興이 옥사하자, 王은 옥관이 엄형으로 치사한 줄 의심했다. 이에 知經筵事 鄭夢周가 아뢰었다. “죄수 국문은 마땅히 정황을 서서히 관찰해야 합니다. 지금 순라군이 법률에 의하지 않고 慘毒한 고문으로 무고하게 죽어도 몹시 가련하거늘, 하물며 재상이 설령 중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賜死하면 그만이지, 한번 罪網에 걸렸다고 함부로 고문을 가해 더러 옥사하거나 더러 시장에서 처참한다면 이 얼마나 몹시 나쁜 일입니까? 오늘 또 그러시렵니까?” 이에 元庠이 풀려났다.118)
恭讓王 때 리성계가 질병을 핑계로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후한 光武帝가 중흥 군주로서 호걸을 網羅해 漢室을 바로잡고 功臣들을 잘 대우해 끝까지 잘 보전해 후세인들이 모두 그 공덕을 찬미한다.”고 말했다.119)
高麗史 刑法지는 이렇게 전한다.
“刑으로 사후에 징벌하고 法으로 미연에 방지하니, 사후 징벌로 사람들을 두렵게 하느니, 미연에 방지해 미리 피할 줄 알게 함이 훨씬 낫다. 그러나 형벌이 아니면 법이 시행되지 못하니, 선왕이 어느 하나를 폐지하지 못하고 함께 병용한 까닭이다. 高麗 제도와 형법은 대개 당을 본받아 唐律을 채용해 고려 사정을 참작해 시의 적절히 적용했다. …허나 그 폐해는 禁網이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여 형벌을 완화하고 사면을 자주 내려, 姦兇한 무리들이 [금망을] 빠져나가 방자히 굴어도 금지 제어하지 못한 점이다. 말기에는 폐해가 극도에 달해 元 議刑易覽이나 大明律을 함께 시행하고 至正條格도 채용하자는 건의로 편집본이 바쳐졌다. 비록 당시 폐해를 구제하려는 마음이 간절했으나, 그 大綱이 이미 타락하고 國勢가 이미 기울었는데 어찌하랴?”120)
顯宗 원년 契丹이 康兆 토벌을 명분으로 침공해와 화살로 서한을 쏘아 보내오자, 副使 將作注簿 李守和 등이 “民情을 굽어 살피고 예지를 발휘하소서! 天網을 크게 열어젖혀, 어찌 참새 따위가 먼저 투항하길 바라나이까?”라고 약간 빈정대는 어조로 답변한 表문을 보냈다. 이에 契丹이 비단옷과 銀 기물을 보내 다시 회유하자, 守和는 다시 表문을 회신했다. “신들은 어제 조서를 받들고 철석같은 마음을 아뢰나니, 죄를 울부짖는 은혜를 하사하고 그물을 푸는 어짊을 베풀길 간절히 기원하나이다. 설상가상일지라도 百姓 마음을 평안히 하고, 분골쇄신해도 천년의 성군을 영원히 받들리라!” 이에 契丹은 항복하지 않을 줄 알고 포위를 풀었다. 나중에 대판 싸워 상당한 전사자가 났지만 대승으로 물리쳤다.121)
閔漬가 忠肅왕 10年에 元에 가서 忠宣왕 귀환을 요청하는 表문에서, “소국은 上國에 의지하는데, 태조황제가 발흥할 적에 契丹이 天網을 빠져나와 우리 강토에 침입했는데, 조정에서 두 元帥를 보내 토벌했다.”고 적었다.122)
高麗 鄭世雲은 11년 경성을 포위해 도적을 평정한 뒤 왕한테 부장들을 보내 보고하면서, “천하에 제압할 수 없는 적을 제압하고, 세상에 주륙할 수 없는 자를 주륙했으니, 물고기가 솥 안에서 쉴 수는 있으나, 토끼가 그물을 벗어나기는 어렵다.”고 자화자찬했다.123)
高麗말 충신 李穡은 恭愍왕 원년 상소문에서 중국 고전 명언을 인용해 변법개혁을 건의했다. “물고기를 선망함은 그물을 엮음만 못하나니, 기러기발을 아교로 붙이고서 어떻게 거문고를 조율할 수 있겠습니까? 법을 바꾸지 않으면 적폐를 제거하기 어렵습니다.”124)
恭讓왕 때 무고한 彝初 옥안이 일어 憲司가 大逆으로 탄핵하자, 左常侍 金震陽이 右常侍 李擴、右司議 李來、左獻納 李敢、右獻納 權弘、左正言 柳沂 등과 함께, 趙浚·鄭道傳 일당의 전횡을 규탄하는 상소문에서, “南誾·南在 등이 혼란을 선동하는 날개가 되고 尹紹宗·趙璞 등이 말을 꾸며대는 喉舌로 수창 화답하며, 罪網을 널리 확장해 처형해서는 안 될 사람을 처형하고, 본디 죄가 없는 곳에서 죄를 찾아내, 대중인심이 몹시 위태롭게 두려워하며 모두 원망과 탄식을 자아내, 한편으론 천지만물에 화기를 해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하의 好生之德을 손상합니다.”고 아뢰었다.125)
忠肅왕이 元에 체류할 적에 瀋王暠가 王位를 빼앗으려 모의하고 간신과 결탁하자, 왕이 朴仁平을 재상한테 보내 말했다. “옛날 小廣大가 大廣大를 따라 물을 건너는데 배가 없자 大廣大에게 말했다. ‘나는 작아서 깊이를 알기 어렵고, 그대들은 키가 크니 먼저 건너면서 깊이 좀 헤아려보소.’ 모두 그렇게 여겨 물속에 들어가 전부 익사하고, 오직 小廣大만 죽음을 면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두 小廣大가 있으니 全英甫와 朴虛中이다. 나를 재앙그물[禍網]에 넣어두고 평안히 좌시하고 있으니, 어찌 이와 다르랴?”126)
이밖에도 간신과 반역자가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간 걸 ‘漏網’으로 탄식하는 기사가 두 번 나온다.127)
조선왕조실록에는 ‘法網’ 관련 용례가 아래 도표처럼 다수 등장한다. ‘법망’은 번역문엔 태조1년부터 등장하고, 원문엔 태종9년 처음 등장해 각 왕대에 골고루 나타난다. 전술했듯이, ‘一網打盡’은 성종24년[1493년 명 弘治 6년] 8월 10일 임신에 처음 등장해 실록 전체에 무려 136회나 나오는데, 성종9년[1478] ‘一網盡打’가 처음 나오는 등, ‘一網’이 모두 196번 나온다.[~打去, ~盡去, ~盡之, ~殆盡, 打盡~ 등 비슷한 용례가 다수 등장.]128) 따라서 ‘一網打盡’은 기록상 조선에서 명보다 시기로도 훨씬 일찍부터 빈도수도 훨씬 많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및 명청 실록에 각종 그물망의 용례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網 | 禁網 | 法網 | 刑網 | 天網 | 罪網 | 憲網 | 漏網 | 一網 | 一網打盡 | |
---|---|---|---|---|---|---|---|---|---|---|
조선왕 조실록 | 583/ 1,719 |
30/ 56 |
50/ 155 |
1/ 2 |
49/ 90 |
51/ 66 |
0/ 1 |
4/ 242 |
196/ 88 |
136/[원문] 87[국역] |
명실록 | 581 | 4 | 41 | 4 | 12 | 0 | 4 | 151 | 39 | 12 |
청실록 | 2,791 | 6 | 287 | 7 | 22 | 3 | 6 | 2,219 | 5 | 1 |
Ⅷ. 老子의 天網 비유와 다양한 역사적 함의129)
‘사람은 땅을 법삼고, 땅은 하늘을 법삼으며, 하늘은 도를 법삼고, 도는 자연을 법삼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는 유명한 명제는, 인간의 실정법이 천지의 無爲自然法에 근거해야 함을 강조한 老子의 대표 사상이다. 그런 老子가 자연법칙을 ‘하늘그물’로 비유한 명언을 남겼다. “하늘[자연]의 道는 다투지 않으면서 잘 승리하고, 말없이 잘 호응하며,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오고, 묵묵히 잘 도모한다. 하늘의 그물(눈)은 텅텅 빈 듯 몹시 성글어도 빠져나가는 게 없다.”130) 인간의 법망은 교묘하게 빠져나갈지라도, 자연법칙은 요행히 모면할 수 없다는 철저하고 삼엄한 인과율을 기막힌 역설적 비유로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하늘그물’이란, 말할 것도 없이 천체운행과 자연의 因果법칙을 총칭한다. 이 명제의 이면을 음미하고 뒤집어 해석하면, ‘그런데 인간의 그물은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데도, 온갖 모순과 결함투성이구나’는 탄식조소가 감지된다. ‘법령이 불어나고 드날릴수록, 도적도 더욱 많아진다,(法令滋彰, 盜賊多有.)’는 명제가 반증하며 ‘天網’과 표리관계를 이룬다.
‘天網’ 비유는 형식상 지금까지 언급한 어떠한 법그물 비유보다도, 고도로 추상적 함축적 은유와 풍자가 넘치는 문학적 표현이다. 그러나 실질 비유 내용에서 철학사상적 의미는 더더욱 심오하고 중대하다. 인간의 의지적 행함이 없이 다스리는 ‘無爲而治’와, 인위적 행함이 없으면서도 행하지 않음이 없는 ‘無爲而無不爲’ 법사상이다. 법의 존재형태와 관련해 인위적 성문법전 중심의 실정법 만능주의(법실증주의)의 한계와 허점을 간파하고, 무위적 자연법주의를 궁극 이상으로 지향한다. 한낱 공허한 환상과 관념적 복고주의일까? 자연의 존재법칙 세계를 정확히 인식하는 통찰력과, 天衣無縫적 완전무결성에 합치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일 것이다.
老子가 규범 생성 연원 및 단계를 통찰한 ‘道-德-仁-義-禮’의 규범원류관에 따르면, 도와 덕은 순수한 무위자연적 비실정 규범으로서 天網에 해당한다. 이는 存在(Sein)적 자연법칙으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예외 없는 인과법칙도 포함한다. 유가적 仁義에 내려오면, 비록 성문의 실정규범은 아닐지라도, 자연법의 영역으로부터 이미 상당히 벗어난다. 仁은 그나마 비교적 도와 덕에 가까운 人道로서 존재법칙성이 강한 것으로 인정받지만, 義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道義나 義理 같은 윤리적 의무 관념이 강하기 때문에, 當爲(Sollen)규범으로 변한다. 다시 禮로 내려오면, 당위성이 더욱 부각되고 상당 부분 文物典章으로 실정화하여, 부분적으로 국가의 형벌 강제가 직접 수반된다.
老子의 규범 생성 단계는 바로 이러한 예에 이르러 그치고 있다. [역사상 老子 생존 무렵인 춘추 말 전국 초에 이르러 周禮가 각 제후국에서 ‘형’과 ‘법’으로 대체되는 대규모 변법개혁 운동이 전개되었다. 또 제자백가 철학사상에서는 荀子의 禮論이 그 제자 李斯와 한비자 등에 의해 法治이론으로 계승 발전되어, 진시황의 천하통일에 사상적 원동력을 제공했다.] ‘천망’ 명제와 연관시켜 음미하면, 인간의 법은 천지자연의 도를 본받아 도로부터 직접 연원하여야 하며, 열악한 ‘禮’의 꼬리로부터 다시 파생되는 비극이 없어야 한다는, 철학적 이상과 당위성을 함축하지 않을까? 완전을 추구해 복잡 精緻한 이론체계를 갖추어 갈수록, 불완전한 흠결과 모순투성이인 인위적 실정법망의 현실이, 존재하지도 않는 듯 엉성하기만 하면서도 빈틈은커녕 매듭조차 찾아볼 수 없는, 천의무봉 무위자연의 존재법칙에 대한 이상적 동경을 불러일으킨 것이리라. 天網 비유는 이러한 법철학적 이상에 대한 상징성을 은밀히 함축하고 있다.
도교 수행 경전인 抱朴子內篇에는, 장생지도에 시급한 禁忌는 자신의 정신과 남의 생명을 손상하지 않는 계율인데, 만물에 가장 큰 天地에도 도리상 精神이 있고, 그 정신이 賞善罰惡을 시행하기 때문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다만 인간의 선악에 대한 상벌은 그[하늘법, 자연법] 본체가 워낙 크고 그물눈이 몹시 성글어, 그 인과응보가 반드시 기계작동처럼 즉시 발동해 메아리치듯 호응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131) 이는 老子의 天網 비유를 그대로 계승해 부연 설명 해석한 것으로, 도교의 인과응보 원리를 간명히 보여준다. 또 세간에 온갖 교활한 악인들의 죄업을 탄식하면서, 천하를 기만하여 권세와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은 더디고 빠름은 다르겠지만 조만간 모두 천벌재앙을 받을 거라며, 天網이 비록 성글지만 끝내 빠져나갈 수 없다고 단언한다.132) 抱朴子外篇에도 天網을 그대로 계승한다. “하늘은 높은 데서 낮게 비춰보므로, 그 그물은 비록 성글지만 빠뜨리지 않는다. 神은 총명하고 정직하여, 그 道는 진실을 상주고 허위를 벌한다.”133) 또 세상 군주가 현인군자를 초빙하지 않아 은둔하게 버려둔 결과, 옛 성왕의 교화와 영명한 통치가 흥성하지 않고, 현명함과 선량함을 칭송하는 노래가 불리지 않으며, 천하를 망라하는 天網이 제대로 펼쳐지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인군자들이 鸞새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고 기린처럼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환난을 피해 숨어버리기 때문이다.134)
雲笈七籤에서도 仙真經과 비결을 인용해 자연의 인과법칙을 거듭 천망으로 표현한다. “사람들은 죽음에 닥쳐서 비로소 자신을 애석히 아끼고, 죄가 결정된 후에 善해지길 사념하며, 질병이 도진 다음에 의약을 간절히 바란다. 허나 천망에 이미 걸렸으니 어찌 달아날 수 있으랴?”135) 후회막급이니, 평소 착하게 자율 자강하라는 권선이다. 도교 讚頌歌에는 ‘天羅’[‘天網’의 압운상 표현]와 함께 ‘地網’과 ‘世網’까지 나란히 등장해 눈길을 끈다.136) 여기서 ‘世網’은 불경에 자주 나오는데, 인간세상 홍진 번뇌의 얽매임[속박]을 가리킨다.137)
역사기록에서도 앞서 소개한 실례 외에 자주 원용된다. 後漢 대유학자 馬融과 대문호 蔡邕이 각각 ‘天網’을 ‘八紘’이나 ‘人紘’과 나란히 병칭해 눈길을 끈다.138) ‘八紘’은 하늘[우주]의 8維이고, ‘人紘’은 사람의 갓끈이다. 후한 순제 때 郎顗는 천재지변에 대한 방책을 아뢴 상소문에서, “큰 그물은 성글고 작은 그물은 촘촘하다.”는 속담과 老子의 “하늘 그물은 텅텅 빈 듯 성글지만 빠뜨림이 없다.”는 명언을 인용한다.139) 朱暉 손자 朱穆은 5세부터 지극한 효성으로 칭송이 자자했는데, 환제 永興元年[153] 황하 범람으로 수십만호가 피해로 유랑하고 도적이 횡행하던 때 冀州刺史로 발탁되어 부임했다. 얼마나 엄명했던지, 당시 중상시로 있던 기주 출신 환관 3인이 격문을 보내 주목 알현을 요청했으나 사절했고, 부임소식이 전해지자 40여인이 관직을 스스로 사퇴하고 자살자도 있었다. 물론 도적은 말끔히 평정했다. 환관 趙忠이 부친상으로 귀향 장례를 치름에 참람하게 온갖 사치품을 附葬한 소식을 듣고 수사를 지시했는데, 관리는 그 엄명함을 경외해 매장한 분묘를 파고 棺을 열어 시신을 점검해 사실을 확인하고 가족들을 체포했다. 황제가 듣고 대노해 주목을 廷尉에 회부해 輸作左校 형벌에 처하자, 太學書生 劉陶 등 수천인이 대궐에 나가 주목을 변호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엎드려 아뢰건대, 수형자 朱穆은 공직에서 우국충정이 남달라, 부임하는 날 간악 숙청에 뜻이 굳었습니다. 중상시 권귀총애를 믿고 부형자제들이 州郡에 포진해 다투어 호랑이처럼 서민소인들을 뜯어먹었는데, 주목이 天網을 활짝 펼쳐 헤진 그물눈을 기워 엮어 잔인한 화근괴수를 망라해 天意에 부응했습니다. 이에 내시들이 모두 분노해 그를 질시해 비방과 아첨으로 선동하고 극형으로 輸作左校에 처했습니다. 천하에 식자라면 누구나 주목이 禹、稷처럼 부지런히 공을 세우고 共、鯀처럼 재앙을 당한 줄 압니다. 만약 죽은 자가 지각이 있다면, 唐堯가 崇山에서 진노하고, 重華[舜]가 蒼墓에서 분격할 것입니다. 현금에 中官들이 총애를 믿고 國柄을 훔쳐 王爵을 장악하고 입으로 天憲을 머금어, 상주고 싶으면 굶주린 노예도 季孫보다 부유하게 만들고, 심술을 부리면 이윤이나 안회도 桀이나 도척으로 둔갑시킵니다. 오직 穆만이 우뚝 서서 신명을 돌보지 않고 대항했습니다. 영예를 싫어하고 모욕을 좋아하며 살기를 싫어하고 죽기를 좋아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단지 왕[법]의 기강[王綱]이 바로 서지 못함을 개탄하고, 天網이 오래토록 상실됨을 두려워해, 우환의식에서 마음을 다해 주상을 위해 심원한 계책을 도모한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신하들이 얼굴에 먹물을 새기고 발에 차꼬를 차며 朱穆 대신 校作 형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황제가 주청한 글을 열람하고 이내 그를 사면했다.140) 여기서 자연법에 부합하는 정의로운 법을 ‘천망’으로 비유한 여러 가지 기막힌 표현들이,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정신 기개와 어우러져 진한 감동과 전율을 선사한다.
袁绍는 公孫瓚한테 보낸 회유 서한에서, “足下는 초연히 안일하고 거짓 위세를 자랑하면서, 天罔을 삼킬 수 있고 호걸영웅을 멸망시킬 수 있다고 장담하는가?”라고 반문하고, 지금 옛 수도를 수복하고 天罔을 다시 기워, 죄인은 죽고 충신들이 날개를 떨치는 시운에 적극 호응하라고 설득한다.141) 靈帝 中平元年[184], 차기장군 皇甫嵩이 황건적을 격파해 위세가 천하를 진동하자, 閻忠이 절호의 時機를 놓치지 말라고 유세하면서, “天網을 높이 치켜들어 京都를 모두 에워싸, 환관의 죄를 주륙하고 군중의 원한과 쌓인 분노를 제거하며, 오래 위태롭게 거꾸로 매달린 생명을 풀어주라.”고 간언했다. 嵩이 말을 듣지 않자, 염충은 이내 도망갔다.142)
천문 점성학 관점에서 좀 독특한 천망도 등장한다. 달[月]이 畢성에 들어가는 경우 비가 엄청 쏟아진다는데,143) 畢성은 天網에 해당해 無道한 군주를 網羅함을 상징하는지라, 武王이 紂를 정벌할 적에 하늘 畢성에 제사를 지내 천우신조를 기원했다고 전한다.144) 또 漢書에는 老子의 ‘天罔’과 함께 ‘聖人之罔’을 언급해 눈길을 끈다.145)
Ⅸ. 법망 비유의 철학적 함의와 정신지혜146)
법을 그물에 비유한 ‘法網’에는 과연 어떤 철학적 의미와 정신지혜가 담겨 있을까? 머리글에서 밝혔듯이, 추상적 법망 비유는 구체적 그물이 물고기나 짐승을 포획하는 속성기능을 취한 것이다. 이 구체적 그물도 본래 자연물은 아니고, 인류가 지혜로 고안해낸 인공 발명품으로서 원시 과학기술문명의 소산이다. 이 그물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성인이 천지자연에서 만물형상을 본떠 팔괘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각종 문명의 이기를 고안했다는 주역 설명은, 인간이 천지자연의 도를 법 삼는다는 老子 명제처럼, 지극히 평범하고 너무 疏略한 일반론이다. 새끼줄을 엮어 그물을 만들고, 수렵·어로 활동을 했다는 내용도, 누구나 육안으로 확인하는 재료와 방법·용도를 단순히 사실대로 기록한 초보 역사에 불과하다. 그것을 離괘로부터 취했다는 해석은, 고도로 추상적 義理를 함축하는 철학사상으로, 다분히 주관적 관념적 성향이 짙다.
좀 더 사실적 합리적 그물 창안 원리는 없을까? 누구나 수긍할 만큼 설득력 있는, 구체적 원리적 그물 원형이 자연물에 있다! 關尹子에 나오듯, 중생은 현인을, 현인은 성인을, 성인은 만물을 각각 스승 삼는데, 성인이 만물과 하나 되어 무아지경에 이르러 거미를 스승 삼아 거미줄을 모방해 그물을 고안한 것이다. 거미줄에 곤충이 걸려 거미 먹이가 됨을 관찰한 지혜로운 인간이, 그 원리와 방법을 궁구해 어로수렵용 그물을 만들어 쓰고, 나중에 국가 법제가 등장하면서 그 속성기능의 유사성을 발견한 文人이 법을 그물에 비유했을 것이다.
한 구심점을 중심으로 방사형의 몇 가닥 씨줄(經線)을 걸치고, 안에서부터 바깥을 향하여 일정한 간격의 날줄(緯線)을 원형으로 펼쳐 나와, 규칙적 기하학적 무늬를 이루는 정교하고 섬세한 거미줄! 그물은 인간 편리에 맞춰 가로세로 고른 간격을 지닌 사각형으로 짜임이 거미줄과 좀 다를 뿐이다.[물론 둥근 돗자리나 바구니 같은 기물은 거미줄과 흡사한 형식구조를 지닌다.] 거미줄과 그물에 공통 기본원리는, 유형의 물질적 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되어, 무형의 공허한 눈(目: 공간)을 이루고, 이 눈(공간)의 크기를 조절함으로써 포획대상(곤충·짐승·어류)의 대소 기준이 결정되는 점이다. 유형의 실이 있기에 먹이가 직접 부딪쳐 걸리게 되지만, 만약 무형의 눈(공간)이 없다면 거미줄이나 그물은 소기의 기능과 목적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바람(공기)과 물이 거의 아무런 저항이나 마찰을 받지 않고 통과해야, 사냥 목표물인 동물만 크기 제한에 걸려 자연스레 포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허한 눈(공간)이 없거나 지나치게 작으면, 바람과 물이 통과하지 못하고 저항을 일으켜, 그 흐름 속에 물고기나 곤충이 감지하고 얼른 흐름 밖으로 빠져나갈 것이다. 파리채에 구멍 뚫린 그물 형상을 생각하면 그 원리가 쉽게 분명해진다. 빈 눈 없이 밀폐된 판자라면, 파리를 향해 휘두르는 동안 공기압력이 높아지고 그 저항으로 바람이 일어 파리채보다 앞서 파리에게 접촉되므로, 파리가 도망간다.
老子가 말한 대로, “유형의 물질구조(hardware)가 이롭고, 무형의 텅 빈 공간(software)이 쓸모가 있다.” 유명한 명제다. 방이나 그릇·수레 등 모든 기물이 물질적 외형 뼈대가 있어 문명의 ‘利’器가 되지만, 정작 인간이 유익하게 使‘用’하는 것은 유형 뼈대로 형성되는 무형 공간이다.147) 老子는 일반인이 눈에 보이는 것에 정신 팔려 자칫 소홀하기 쉬운 평범한 진리를 예리한 慧眼으로 통찰해, 사람들 心眼을 일깨워 준 것이다. 거미줄과 그물의 구조기능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거미는 생존을 위해 선천으로 ‘有無’의 조화로운 배합 원리를 ‘利用’할 본능지혜를 타고났다. 인간은 거미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다른 동물이나 사물의 합리적 본능적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그 원리를 궁구해 자신의 육체적 부족을 보충할 이성지혜를 부여받았다.
이러한 원리를 터득하여, 인간은 빈틈 있는 그물로써 수렵·어로 활동을 하면서, 나아가 그 빈틈 크기를 조절함으로써 자원고갈로 인한 식생활 궁핍도 예방할 줄 알게 되었다. 너무 촘촘한 그물눈을 사용하면, 새끼고기(稚魚)까지 모조리 긁어 씨를 말리게 되고, 그 파급효과는 곧바로 인간 자신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전술했듯이, 고대부터 남획 방지는 민생과 직결된 중요정책 사항이었다. 촘촘한 그물[數罟]을 연못에 던지지 않아 물고기와 자라 씨를 보존하도록 훌륭한 그물(良罟) 규제법을 잘 시행한 것이다.
그러면 거미줄과 그물의 원리가 추상적 법망에는 어떻게 발현될까? 예로부터 동아시아 전통법에서는 情·理·法 삼위일체 이상을 곧잘 거론한다. 가장 흔한 용어법은 天理·人情·國法의 균형조화로 나타난다. 천리란 무위자연의 도에서 비롯한 객관적 공평한 이치를 뜻하고, 인정이란 인간의 본능적 감정욕망에서 비롯하는 주관적 개별 사정을 가리킨다. 천리는 일반 대원칙이고 인정은 특수 예외를 의미하는데, 국법이란 이 양자의 긴장대립과 모순갈등을 균형 있게 조화시켜 실정화한 중용 제도이어야 한다. 이것이 전통법의 이상이다.148)
법의 그물이란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국법은 천리라는 理法(法理)의 실(絲)로 인정이라는 빈틈의 눈(目)을 듬성듬성 가지도록 정교한 체계로 짠 무형(추상)의 그물이다. 천리라는 합리적 공평한 실로 짜이기에, 그를 위반해 걸린 죄인도 불평이나 원망 없이 승복할 수 있는 정당성이 확보된다.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본능 감정욕망으로서 人之常情을 텅 빈 그물눈 틈으로 통과시켜 주어야, 백성의 불만·원성·저항을 야기하지 않으면서, 법 그물로서 원만한 기능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여기서 천리는 合理性을, 인정은 合情性을 각기 대표한다.
전통법은 천리와 인정의 배합비율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왔다. 이는 법 자체의 도덕적 정당성뿐만 아니라 현실적 실효성에도 직접 관련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수효도 적고 심성도 순박했던 고대사회에는, 법이라는 유형 그물이 가시적으로 짜이지(實定化) 않고도, 무형 천리인 도덕 자체로 충분히 규율했을 것이다. 老子가 말한 ‘天網’도 그러한 이상을 동경하는 개념이리라. 그러나 국가가 형성되고 권력에 의한 지배복종 관계가 나타나고, 특히 사유재산제가 출현해 서로 財富를 다투게 되면서, 인간 심성은 탐욕과 분노에 물들어 죄악이 싹트기 시작하고, 마침내 천리라는 실올이 한두 가닥씩 허공에 쳐져, 원시적 법 그물이 짜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살인·상해·절도의 기본 죄악을 규정하는 約法三章이 등장했으리라. 세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삼각형이 최초 기본 평면을 형성하듯, 거미줄도 세 가닥의 외곽선부터 시작하고, 법의 그물도 생명·신체·재산을 보호하는 세 조목 천리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그러다가 사회가 복잡해지고, 인간 심성이 다양하게 간사해지면서, 古朝鮮 八條法禁이나 唐 高祖의 약법12조가 등장하고, 거기서 파생하는 법조문 수량이나 법망의 촘촘함은 가히 기하급수로 늘어났다. 이렇듯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만 한 법이, 인류가 자랑하는 문명발달의 역사인 셈이다.
箕子朝鮮 말엽에 60여조로 불어난 것이나, 高麗 초기에 唐律 중 핵심내용 71조를 간추려 적용한 것은, 그래도 約法 수준이었는지 모른다. 통치 권력의 절대성을 지향하는 전제군주에 의해서나, 논리 체계의 완전무결을 추구하는 법치만능의 지식계층에 의해서, 또는 인심의 간사와 도덕타락에 따른 죄악 급증 등 사회적 요청에 의해서, 가지치기를 재촉하는 법망의 현실은 그물의 원리와 꼭 마찬가지다. 즉, 법이 지나치게 촘촘해지면, 본래 제 목적을 달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작용과 역기능만 발휘하여, 되레 그 해악을 자신이 입기 마련이었다. 老子가 예리하게 꼬집은바, ‘법령이 불어날수록 도적이 많아지는’ 역설이다. 殷에 紂를 비롯하여, 역대 말세 군주의 잔인무도하고 가혹한 법과 형벌의 史例가 비일비재하다.
특히 법가의 절대군주제로 천하통일을 이룬 秦이 소털(牛毛)처럼 촘촘하고 엉긴 기름(凝脂)처럼 빈틈없는 법망으로 불과 2代 30년만에 멸망을 자초하고, 약법삼장 기치를 내건 漢高祖한테 대권을 고스란히 물려준 사실은, 참으로 역사적 역설(아이러니)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두고 역사가는, ‘법이 가을 피풀 이삭보다 번잡하고, 그물이 엉긴 기름보다 빽빽하다.’고 혹평하는가 하면,149) 시인은 ‘진나라 때 상앙에 맡겼더니 법령이 소 터럭과 같았다.’고 힐난했다.150) 그 결과, 간사한 죄악이 앞 다투어 치성하고, 囚衣가 길거리를 메우며, 감옥마다 초만원으로 시장을 이루어, 마침내 천하민심이 십중팔구 원망으로 離叛하였다. 문자 그대로 ‘전 인민의 죄수화’와 ‘전 국토의 감옥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법망이 그물처럼 사람 잡아들이는 유용한 위력적 도구인 줄만 알았지, 그 법망의 실(天理)이 튼튼하지(正當·合理) 못하고 그 눈(人情)의 크기가 지나치게 촘촘하면 과연 어떻게 되는지, 그 본질원리와 활용방법(정신)까지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법 그물 비유에서 법망이 거미줄이나 그물과는 본질상 판이한 독특성이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거미줄과 그물은 포획 대상에게 보이거나 감지되지 않는 은밀한 방법으로 펼쳐지지만, 법망은 그 적용 대상인 인간에게 객관으로 명확히 공포되어 누구나 그 존재와 내용을 주지해야 한다. 거미줄과 그물은 텅 빈 듯 속임수로 함정 같은 기능도 발휘한다. 그물 ‘網’은 本字는 그물 형상을 본뜬 ‘网’인데, 여기에 ‘亡’자가 더해져 ‘罔’이 되고, 나중에 복잡한 파생을 거치면서 실로 짠다는 재료를 더해 ‘網’이 되었다. 罔에서 ‘亡’은 음도 표시하지만, ‘없다’는 의미까지 동시에 함축한다. 즉, 그물은 텅 비어서, 없는 듯이 포획 목표물을 속이는 함정과 같은 존재라는 개념이다. 그래서 속임수를 欺罔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매하고 포악한 통치자들이 법 그물 ‘비유’를 법과 그물의 완전일치 ‘규정’으로 오해하거나 악용하여, 법을 국민에게 공포해 사전에 충분히 주지시키지 않은 채, 朝令暮改식으로 백성을 그물질하는 권력남용이 많았다. 周禮에도 매년 춘정월에 성문 밖에 법령을 공포하는 절차가 엄격히 규정 시행되었다. 이는 법망의 사전 일반예방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한 법망 특유의 성격을 반영한다. 그래서 공자는 가르치지 않은 백성으로 전쟁하면 백성을 내버리는 것이고, 백성에게 가르쳐주지 않고 살륙(처형)하는 것은 포학이라고 단언했다.151) 또 맹자는 가르치지 않은 백성을 부림은 백성을 재앙에 빠뜨리는 것이라고 말하였고,152) 전술했듯이 백성이 일정한 직업 없이 恒心을 지니지 못해 방탕하고 간사해져 죄악에 빠진 다음 처형하는 것은 ‘백성을 그물질하는 것’이라고 거듭 역설했다. 공자나 맹자는 仁義와 德禮에 의한 교화를 강조한 것이다. 도덕교화란 법령시행에 사전 定地 작업이고, 또 도덕적 정언명제가 법률조문에 대전제로 잠복한 점을 감안한다면, ‘가르침(敎化)’에 법망의 존재와 형식·내용 등의 사전 주지 과정이 포함될 것은 지극히 당연하리라.
지금까지, 법과 그물 사이에 간접적 상징비유를 ‘法網’ 단어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런데 사실, 법망이라는 말보다 더 始原적 직접 비유가 법과 관련된 文字속에 고유하게 내재한다. 바로 ‘罪’ 와 ‘罰’이다. 罪와 罰에 공통 部首가 바로 그물 ‘망(网)’자의 변형인 ‘罒’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법과 그물 사이에 상징적 긴밀성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漢대 辭典인 說文解字에 의하면, ‘罪’는 본디 물고기를 잡는 통발이고, 지금 죄악을 의미하는 ‘죄’자는 ‘辜’였는데, 천하 통일한 秦始皇이 ‘辜’자가 ‘皇’자와 비슷해 오인될 수 있다(현재 字體로도 비슷하지만, 당시 통용된 篆書 형체는 더욱 유사하다)는 이유로, 발음이 같고 의미상 상호 연관성이 높은 ‘罪’자로 대체했다고 한다. 그 결과 ‘辜’자는 사용이 폐지되었다. (죄악에 관한 글자로는 ‘辛’ 부수에 죄 ‘고(辜)’자와 법(죄) ‘벽(辟)’자가 있어, 죄와 벌의 맵고 고통스러운 속성을 반영한다.) ‘죄’가 본래부터 그물과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秦漢 이후로 ‘罪’자가 통용되면서, 잘못(非理)을 범하는 자에 대해 그물로 체포·처벌한다는 상징 의미가 부여된 사실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罰’은 본래 글자인데, 단지 칼(刀)을 들고 위협하거나 폭언·욕설(詈)하는 비교적 작은 죄로서, 그에 대한 응분의 처벌까지 함축한다. ‘리詈’는 ‘매罵’와 마찬가지로, 본디 ‘网’ 부수에 속하는 글자로서, 똑같이 폭언·욕설의 언어 관련 범죄를 뜻한다.(전자는 정면으로 대해 지칭하고, 후자는 측면으로부터 언급한다고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网’자가 ‘言’에만 관련하든 ‘刀’까지 상관하든 간에, 죄악이 될 만한 폭행을 규제한다는 상징 의미는 변함없다.
한편 현대에는 그물이 도로망·통신망·정보망·신경(세포)망 등 체계적 조직에 대한 비유개념으로 널리 사용되는데, 전통 법망 비유에도 그물의 체계적 조직성은 기본으로 내재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元 이후 明·淸 시대에는 보통법인 律의 하위 법형식으로 ‘條例’가 널리 시행된 사실이다. 條例는 현대 법체계에서 지방자치단체가 제정하는 자치입법인 조례와는 판이한 역사적 개념으로, 구체 사안에 대한 황제의 최종 판결 중에서 비교적 의미심장하고 비중이 높아 일반 법규범으로 적용할 가치가 있는 것을 精選하여 律 체계에 맞춰 편제한 법형식이다. 일목요연하고 條理井然한 判例 또는 先例라는 의미에서 ‘條例’라고 명명했다. 여기서 그물 개념은 직접 나오지 않지만, 조직적 법체계라는 의미에서 법망 비유와 밀접히 관련해 사유할 만하다.
한편, 전통 역사 기록법 중에 ‘綱目體’가 있는데, 그물의 큰 벼리와 작은 눈을 구분하여 조리 정연한 체계로 기술하는 상징적 비유 개념이다.
Ⅹ. 약법삼장과 기강문란: 解網과 漏網
이제 법망 비유 역사기록 가운데 자주 등장하는 특별한 평론 몇 가지를 살펴보자.
우선 天網 비유와 관련해 약법삼장 같은 엉성한 법망 체계를 이상으로 제시하는 평론이다. 漢初 가혹한 진률을 대신해 약법삼장과 구장률 제정한 걸 ‘성근 그물’로 표현한 것이 대표다.153) 世說新語에는 현명한 재상이 임금을 보필함에는 차라리 엉성한 법망으로 배를 집어삼킬 큰 물고기도 빠뜨릴망정, 風聞을 듣고 察察한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도량을 평한다.154) 抱朴子는 厚葬과 번잡한 예의를 힐난한 墨子를 긍정 평론하면서도, 다만 너무 준엄한 ‘刑網’을 펼쳐 살벌하고 각박한 길을 열어 유가처럼 人事에 흡족한 王道를 펼치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비판한다.155)
흥미로운 사실은, 나중에 혹리로 악명을 떨친 張敞이 功曹 시절에, 王暢이 南陽太守로 권귀토호들 죄악을 아주 엄명히 다스려 토호들이 전전긍긍 벌벌 떨자, 역사상 수많은 성왕현군의 사례를 실례로 인용하면서, “仁賢의 정치는 후세까지 전해지고, 명철한 군주는 [법]망이 배를 삼킬 물고기도 빠뜨려도, 하늘에서 일월성신이 밝게 빛나고 땅에서 사람과 사물이 기뻐한다.”고 곡진히 간언한 점이다. ‘인민교화는 德에 있지 형벌에 있지 않다.’는 그 말을 왕창이 깊이 받아들여 관대한 정치로 형벌을 신중히 절제해 교화가 크게 행해졌다고 전한다.156)
후한 말 혼란이 극심해진 상황에서, 가혹한 정치와 번쇄한 법령으로 ‘손만 들어도 법그물에 걸리고, 발만 움직여도 덫과 함정에 걸린다.’는 비유가 나오고, 조조가 권병을 잡아 농단하면서 漢道가 무너져 기강이 풀리고 그물이 끊어졌다는 표현도 눈에 띈다.157) 三國志에서 袁宏은 민심과 형벌 관계를 이렇게 평론한다. “진실로 민심을 교화하지 못하고 오로지 형벌에만 맡겨 인민이 정의로운 방도를 잃고 걸핏하면 刑網에 걸린다면, 세상에 아름다운 평화휴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158) 三國志 주에 孫盛의 평론에는, “군주는 멀리 선왕이 간사함을 막은 도덕을 살피고, 가까이 교활하고 방자히 사리를 꾀한 흉악한 심보를 귀감삼아, 그물을 풀어주는 仁으로 승리하고, 인명을 살리는 은혜로 불러들이는” 왕도를 실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159) ‘법망’이나 ‘禁網’과 같은 뜻으로, 중흥 이후에 ‘科網’이 조금 조밀해졌다는 표현이 나온다.160) 金科玉條처럼 법의 科條도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 전후에 법의 대명사로 쓰였다.161)
이와 상반되게, 기강문란은 혼란의 괴수라는 비판과 경종도 자주 나온다! 대학자 仲長統이 저술한 昌言 34편 십여만자 중 損益篇에는, 網禁이 지나치게 소활함을 지적하며 太平의 紀綱을 새로 펼치기 위해서 井田법 회복 실시를 주창한다.162) 蜀 後主는 제갈량 출정에 내린 조서에서, “天地의 道는 仁을 복주고 음란에 재앙 내리니, 선을 쌓으면 창성하고 악을 쌓으면 망하는 게 고금에 항상적 운수다.”고 말하면서, “漢말에 국운이 쇠미해져, [법] 그물이 흉악하고 간특한 죄인을 거르지 못하고 빠져나가게 놓쳤다”고 탄식했다.163)
抱朴子도 탄식한다. “후한 말 桓·靈 시대에 권병이 帝室을 떠나 간신 손아귀에 들어가, 법 그물이 줄줄 새고 제방이 무너져 풍속이 쇠퇴하고 교화가 무너졌다.”164) 특히 음란함이 극성해, 금지가 엉성하니 上宮에도 담장 뚫는 남자가 있고, 법망이 줄줄 새니 뽕밭에 바람난 부녀가 줄을 이어, 마치 맹렬한 불길이 구름까지 치솟고, 저수지 물이 만길 아래로 떨어지는 기세인지라, 어찌 빗자루로 끄고 막을 수 있겠는가?!165) 또 인간 사회규범인 道-禮를 물고기에 물과 같다고 비유한다. 물고기가 물을 잃으면 잠시 숨을 헐떡일 수는 있으나 머지않아 반드시 말라죽듯이, 사람이 禮를 저버리면 비록 뻔뻔한 낯으로 볼 수는 있으나 화근과 낭패에 계단이 된다. 근래 정치교화가 쇠퇴해 서민이 도덕기강 문란을 당함은, 마치 물고기가 안전한 물속 그물을 벗어나고, 맹수가 뭍에 그물을 뛰쳐나온 것과 같다고 위험성을 경고한다.166)
특히 정위로서 명망이 높았던 劉頌의 평론이 눈길을 끈다.
“善政이란 그물 벼리는 높이 쳐들되 그물망은 성근 법이다. 벼리를 높이 쳐들면 광범위하게 망라하고, 그물망이 성글면 작은 건 다 빠져나간다. 광범위하게 망라하면서 가혹하지 않음이 為政의 요령이다. …진실로 정치에 해가 되지 않는 건 모두 天網이 통과시켜주고, 범죄가 심히 중대해야 왕법으로 주륙한다면, 죄악의 경중을 대강 잘 분간하는 셈이다.”167)
‘漏網’은 ‘解網’과 달리, 그물 자체에 결함이나 구멍이 있어, 물고기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나중에는 너무 엉성하거나 흠결투성이 법망을 비유하는 개념으로 쓰이고, 특히 권세가나 간사한 무리들이 법망 구멍을 찾아 빠져나가는 요행을 비판할 적에 등장한다. 중국에서는 법(망) 흠결을 ‘漏洞(새는 구멍)’으로 표현한다.
한편, 법망에 걸리는 것도 우연한 불운이라는 냉소적 현실비판도 보인다. 莊子에는 사람들 세속생활이 활 잘 쏘는 명사수 羿의 과녁 한가운데 노니는 격인데, 적중되는 것도 운명이고 비켜나가는 것도 운명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注에 보면, 羿의 과녁은 刑網을 비유하여, 사람들 모두 刑網 속에 동거하는 격인데, 누가 자신은 전혀 잘못이 없다고 自信할 수 있을까? 刑罰에 걸리는 것도 운명의 우연한 장난이라는 해석이다.168)
論衡에는 孔子의 春秋 저술을 권선징악과 撥亂反正의 원대한 도모로 칭송하면서, 제방이 터졌는데 잘 보수하지 않으면 홍수범람 피해가 생기고, 그물이 풀렸는데 잘 때우지 않으면 짐승을 잃을 우려가 있다는 비유로 사전예방을 강조하기도 한다.169) 또 우연한 행운을 논하면서, 공자가 어진 수제자 顏回의 요절과 伯牛의 질병을 불행하다고 탄식한 내용을 실마리로 삼아, ‘聖賢의 道를 따라 仁義를 수행한 현인이 마땅히 하늘의 복과 보우를 받아야 할 텐데, 어찌 장수하지 못했는가?’라는 세간의 회의에 해답을 제시한다. 이른바 동서고금에 공통된 종교철학상의 난제다! 개미가 땅위를 기어 다니다가 사람들 발에 밟혀 죽는데 밟히지 않으면 살고, 거미가 친 줄[그물]에 날벌레들이 지나다가 더러 벗어나고 더러 걸리며, 사냥꾼이 친 그물에 짐승들이 쏘다니다 더러 잡히고 더러 빠져나가며, 어부가 친 그물에도 江湖에 물고기가 더러 걸리고 더러 안 걸리며, 더러 사형에 해당하는 살인강도가 들키지 않는가 하면, 조그만 죄를 짓고도 발각되어 처벌받기도 한다.170) 이 모두 우연한 행운일 뿐 필연의 인과는 아니라는 논조에서, 거미줄과 어로수렵용 그물이 국법형벌과 나란히 병렬관계로 등장해 ‘法=網’의 비유 관계를 상징하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국법형벌의 적용·집행상 불공평·불합리·不正義를 꼬집고 비판하는 다소간 自慰적·自嘲적 냉소비판인 셈이다.
관련해 흥미로운 일화 한 토막 소개한다. 慕容寶의 庶長子 慕容盛은 苻堅의 위협을 피해 慕容沖한테 의탁했는데, 沖이 무도해 죽임을 당하자 어린 나이에 叔父 慕容柔한테 말했다.
“지금 시퍼런 칼날과 의심의 눈초리 사이에 기구한 운명으로, 어리석자니 남들이 의구심을 품을 테고, 지혜롭자니 장막 위 새둥지보다 위태롭습니다. 마땅히 기러기 고니처럼 높이 올라 단번에 만리를 날아가야지, 이렇게 앉은 채로 그물을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동으로 慕容垂를 찾아가던 길에 도적을 만나자, 盛은 호언했다. “내 6척 몸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데 너희가 내 칼날을 감당할 텐가? 니 수중 화살을 백보 밖에 세워라. 내가 만약 맞히면 니 목숨을 신중히 보살필 것이며, 맞히지 못한다면 내 몸을 묶어 너희한테 바치겠다.” 도적이 화살을 세워 盛이 단발에 명중하자, 도적은 기세가 꺾여 “귀인 자제 같아 한번 시험해봤다.”며 사과했다.171)
Ⅺ. 종교적 법(진리·道)의 그물 비유172)
법망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항은, 세속법의 근원으로서 도덕-종교 윤리규범에 나타나는 그물 비유다. 聖俗 차이와 함께, 법과 윤리도덕이 똑같은 인간사회규범으로서 공유하는 동질성을 상호 대비함은, 법과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탐사함에 유익할 것이다. 종교와 세속, 도덕과 법률이 구분되지 않던 祭政一致 고대사회를 상정하면, 종교 계율(율법)과 사회 법(율령)이 본질상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죄악의 본질과 인과응보 형벌 개념, 법의 기능목적 등은, 현세 국가 제도를 통하느냐? 아니면 전생·내생까지 확장된 윤회관 아래 무형의 천지자연 법칙을 말미암느냐? 라는 방법과 절차상 차이를 제외하면, 종교와 법은 동질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종교상 罪業(原罪)과 地獄(煉獄)의 이론체계로부터, 인간사회의 죄와 벌의 법제가 유래했다고 보는 견해가 더 설득력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능지처사나 炮烙刑 등 각종 잔인하고 혹독한 형벌이, 佛經의 地獄觀으로부터 모방된 人間生地獄이라는 역사기록도 있다.173)
따라서 천지자연법칙을 위배하는 인간에게 天罰의 그물이 씌워질 것이라는 비유를 종교 경전에서 기대하는 것도 크게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地藏菩薩本願經에는, 아직 해탈을 얻지 못한 모든 중생이, 심성과 의식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선행과 죄악을 지어 업장과 과보를 맺고, 환경에 따라 六道를 윤회하면서, 무수한 세월이 지나도록 잠시도 휴식하지 못하는 모습을, 물고기가 물살에 따라 헤엄치다가 그물에 걸리는 상황으로 비유한다. 특히 생사윤회의 장구한 물살 속에서 잠시 해탈하는 듯싶다가도 다시 타락하는 중생의 죄악 습성을, 물고기가 한번 걸린 그물을 요행히 잘 빠져 나갔다가 곧 다시 그물에 걸려드는 악순환으로 표현하는 점이 참 인상적이다.174) 老子의 天網도 이러한 천지자연의 인과법칙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莊子는 쇠와 나무(金木) 형구로 시행하는 세속 형벌을 外刑·人刑이라고 부르고, 陰陽의 질병으로 나타나는 자연 징벌을 內刑·天刑이라고 명명하였다.175)
종교에서 그물의 비유는 세속 법망과 유사함보다는, 오히려 이질적 독특성이 부각된다. 신약성경에는 예수가 시몬과 안드레 형제 등 4인의 어부를 제자로 불러들이면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가르쳐 주겠다고 말한 유명한 구절이 거듭 나온다.176) 흥미롭게도 불교 華嚴經에도 흡사하면서 더욱 멋진 문학적 비유가 등장한다. 善財童子가 선지식을 찾아 천하를 편력하여 19번째로 방문한 不動 優婆夷는, 만 가지 三昧光明을 나타내 보이면서 보살과 선지식의 각종 지위와 기능을 비유로 설명해주는데, 그중 하나는 “마치 능숙한 어부가 정법(진리)의 그물을 가지고 생사고해에 들어가 애욕의 물속으로부터 중생을 건져 올리는 것과 같다.”는 표현이다.177) 얼마나 기막히게 감동적인 비유인가? 또 선재동자가 50번째로 德生童子와 有德童女를 만나, 그들의 설법을 들은 뒤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 선지식의 공덕을 여러 비유로 칭송하는 가운데, ‘중생이 바다에 침몰해 온갖 근심고통을 받을 때, 법의 배(法船)로 구출하여 잘 제도하는 자이고; 중생이 미혹의 바다에 빠져있을 때, 미묘한 菩提心을 발해 그 바다 가운데 들어가 건져 구해 주는 훌륭한 어부다.’고 묘사한 대목도 있다.178)
이러한 의미맥락에서라면, 金剛經 같은 불경에서 생사고해의 此岸에서 열반해탈의 彼岸으로 건네주는 善方便으로 자주 거론하는 뗏목(正法) 비유도 그물과 다를 바 없다. 전술했듯이, 어망은 재수 없는 물고기를 그 생존 터전으로부터 낚아 올리고, 세속 법망은 죄 지은 사람을 생활영역인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박탈기능을 각기 수행한다. 이와는 상반되게, 종교적 진리(正法)의 그물 비유는, 본래 선한 천성의 중생을 죄악의 수렁과 생사윤회의 고해로부터 건져내 안락한 해탈경지에 들게 한다는 賦與목적을 지향한다.
한편 관점을 다소 심화시켜, 세속법도 본래 종교 윤리도덕으로부터 파생했다는 역사성과, 법의 본래목적이 죄인을 처형하기보다는 죄악을 두절 방지함에 있다는 철학정신을 동시에 고려한다면, 법망의 비유도 반드시 세속적 견해처럼 사회로부터 범법자를 솎아내는 방향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으리라. 오히려 종교적 正法의 그물처럼, 인간을 죄악의 수렁으로부터 건져내어, 선량한 천성을 보호해 주는 예방·교정 의미를 상징하는, 더 심오한 비유로 이해함이 바람직스럽다. 법과 형벌은 본디 일반예방과 함께 특별예방의 기능목적도 지닌다. 비유에서 비유하는 사물(그물)과 비유되는 대상(법)의 모든 속성이 완전히 일치할 필요는 없으며, 일정한 개념적 징표만 공유하는 것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법망의 비유를 胚胎한 동아시아 역사문화 속에서 보더라도, 湯이나 武王이 포군을 정벌한 역성혁명도, 백성을 물과 불에서 건져내는 王道로 비유함이 맹자를 비롯한 유가 주류 정치사상이다. 그러니, 법에 의한 일반 통치도, 백성을 죄악에서 건져내는 民本적 仁政으로 이해함이 당연한 사리가 아닐까? 포악무도한 군주와 사리사욕의 통치계층에 의해, 법망의 비유가 아전인수로 왜곡·오해된 역사현실이 있었다고 하여, 그 본질의미와 이상이 퇴색하거나 변질된 것은 결코 아니다.
Ⅻ. 맺음말
지금까지 동방의 전통법문화에 나타난 法網의 비유를 두루 살펴보았다. 서방 법문화의 역사철학에서도 이와 유사한 비유 개념이 등장할까? 서방 법문화에 문외한이라 자신 있게 구체로 할 말이 없다. 다만 기본상식 관점에서 보자면, 로마법이 私法 위주로 발달한 이래, 근대 대륙법과 영미법도 자유·권리의 보장을 주목적으로 삼고, 구속적·규제적 성격에는 그리 친근하지 않기 때문인지, 서방 법문화에서는 우리만큼 법을 그물에 비유하는 개념이 널리 쓰이지는 않는 듯하다. 대개 미국에서 ‘dragnet’(曳引網)이라는 용어가 범인 체포, 특히 일제 소탕을 위한 수사망(법망)의 비유로 빈번히 쓰인다고 한다. 辭典 용어로는 ‘the meshes of law(법의 그물눈들)’가 법망에 걸려들거나(be caught in~) 법망을 회피한다(escape from~)는 숙어로 발견되며, 또 ‘net of justice(정의의 그물)’라는 독특한 표현도 눈에 띈다. 또 최근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우리 동방의 ‘法網’ 비유를 번역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the net of law’가 제법 등장한다.179) 하지만 고전문헌이나 실제 언어생활에서 어떠한 의미맥락으로 얼마나 비중 있게 쓰이는지는 알 수 없다. 앞으로 관심 있는 전공학자의 훌륭한 現身說法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우리 현실사회의 법망은 어떠한가? 벌써 근대 서방 법학을 시작한 지 백주년이 지났다고 하지만, 전반세기는 일제 식민지 법망에 갇혀 지냈고, 후반세기는 일제가 쓰다가 버리고 간 낡은 법망에 미군정과 독재군사정권의 교체 및 짜깁기 작업이 수시로 진행되어 온 느낌이다. 이제 법망의 분량과 밀도는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다. 과연 법만능주의 법실증주의로 대표되는 법치주의를 구가하는 지금, 현행 법령집은 아마도 달구지에 실으면 소가 진땀을 뻘뻘 흘리고, 서가에 진열하면 천장 대들보까지 차올라, ‘汗牛充棟’이라는 고사성어가 실감날 형편이다.
이러한 법망이 과연 그물로서 얼마나 조리 정연하고 견실한 사용가치가 있을까? 전근대적이라는 구실로, 수천 년간 친숙히 써 오던 전통법망 체계를 하루아침에 통째로 헌신짝처럼 내버린 지 어언 한 세기, 분단 반세기를 넘기고 민족의 재통일을 눈앞에 학수고대하는 21세기 새 시대에, 우리는 지금 쓰는 근대법망 체계를 天理와 人情의 조화라는 전통 법망의 목적이념에 비추어 성찰하고 東道西器 관점에서 새롭게 통합 정비하는 획기적 대전환을 이뤄야 하지 않을까? 대한민국 헌법 제9조에는,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단지 국가만이 아니라 국민도 함께 노력할 의무가 있다. 전통법문화에서 ‘法網’ 비유가 함축하는 정신지혜만큼 계승발전하고 창달할 문화유산도 드물 것이다. 아무쪼록 우리 법의 과거현재를 반성하고 미래를 준비함에, 법망 비유가 함축하는 상징의미와 정신지혜가 귀중한 각성과 大人虎變 君子豹變의 계기가 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