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법

안중근 의사의 저격 행위에 대한 학제적 평가*:

김용훈 **
Yong-Hoon Kim **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상명대학교 행정학부 부교수, 법학박사
**Associate Professor, Sangmyung University, Department of Public Administration & Law

© Copyright 2021, The Law Research Institute,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Jul 10, 2021; Revised: Jul 26, 2021; Accepted: Jul 27, 2021

Published Online: Jul 31, 2021

국문초록

테러행위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직접적인 폭력행위가 이루어지고 수많은 인명피 해의 결과를 야기한다는 점에서 그 정당성을 인정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확정적이고 객관적으로 특정 테러행위, 특히 그 정당성에 대하여 위법하다는 평가를 도모하는 것이 힘든 것이 사실이다. 테러에 대한 평가를 테러를 행하는 자들도 수행한다면 수단의 불법성을 그들도 인정할 것이지만 그 테러행위의 정당성, 즉 명분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테러행위의 불법적인 수단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테러행위의 목적 그리고 그 행위의 이유에 대한 객관적인 부정적 평가를 하는 것은 어렵다고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고려한다면 테러와 관련된 문제를 풀기란 쉽지가 않다. 우리 역시 이와 관련하여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이 문제되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저격에 대하여 테러로 규정한 후 결국 그를 사형에 처한 일제와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저격행위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는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 양 쪽의 정당성을 모두 부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의 저격행위는 일반적인 수준에서의 테러행위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그 당시 조선이 국권을 박탈당하였던 상황과 보다 거시적인 수준에서의 국제법적 논의를 고려하면 안중근 의사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중근의 저격행위는 전쟁행위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나아가 조선의 주권을 병탄하였던 대부분의 조약이 위협과 겁박, 즉 무력행사에 의하여 체결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Abstract

It is true that terrorism cannot be justified in that various acts of violence are committed against innocent civilians and result in a good deal of casualties. However, it is reasonable to say that it is difficult to make a definitive and objective assessment of certain acts of terrorism, especially their legitimacy of purpose of the acts. Those who conduct the assessment of terrorism cannot but recognize the illegality of means of terrorism concerning the suffering of innocent civilians, but those who terrorize tend to argue that they are obliged to terrorize for the sake their political purpose (The purpose seems justified from their point of view). Therefore, apart from criticism of the illegal and fatal means of acts of terrorism, it seems difficult to make objective assessments of the purpose of acts of terrorism and the reasons for the terrorism (The purpose never seems illegitimate to victim of terroris or others, while the purpose definitely seems legitimate to terrorists).

Given this situation, it is not easy to solve terrorism-related problems. We also have a similar problem concerning with Ahn Jung-geun's shooting at Ito Hirobumi. Provided that Ahn's shooting is regarded as a terrorist attack, the Japanese government and our government can not reach an agreement in assessing Ahn's shooting case due to the fact that it is difficult to reach an agreement whether Ahn’s act is terrorism or not. However, Ahn's shooting cannot be regarded as a terrorist act at a general level. Considering the fact that Joseon Dynasty was deprived of national sovereignty by the coercion of Japan at that time and the international law issue and discussions at a more macro level with regard to the provision of Vienna Convention on the Law of Treaties and the legal theory, the evaluation of Ahn Jung-geun is to be made objectively. In the end, it is natural to postulate that Ahn Jung-geun's act of shooting at Ito Hirobumi is not terrorism in that Ahn’s act was the act of war considering Ahn’s status (Lieutenant General) of n army for national independence. Furthermore, considering that most of the treaties that were took an advantage of for the sake of the deprivation of Joseon's sovereignty by Japan were signed by threats, intimidation, or armed actions, it is reasonable to conclude that Ahn Jung-geun resisted progressively against illegal invasion of Japan.

Keywords: 안중근; 테러리즘; 정당성; 을사늑약; 이토 히로부미
Keywords: Ahn Jung-geun; Terrorism; Legitimacy; the Protectorate Treaty between Korea and Japan concluded in 1905; Itou Hirobumi

Ⅰ. 들어가는 말

테러행위를 지지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테러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몫을 테러를 행하는 자들에게도 나누어 준다면 그 “정오(正誤)” 여부에 대한 평가, 즉 옳고 그름에 대한 평가를 객관적으로 아주 정확히 도모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수많은 인명피해를 야기하는 테러행위를 행하는 자들도 그들만의 목적을 가지고 그 같은 행위를 한다는 점에서 테러행위의 수단에 대한 비판은 차치한다면 테러행위의 목적 그리고 이유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하는 것은 어렵다고 볼 여지가 상당히 있기 때문이다. 물론 테러행위라는 수단이 그 목적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특정 테러행위의 목적 혹은 이유 자체가 틀렸다는 결론을 섣불리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역시 이와 관련한 담론을 가지고 있는데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이 그것이다. 일본은 안중근 의사의 저격을 테러로 규정하여 안중근 의사에 대한 사형 선고 후 이를 집행하였는데,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 안중근 의사의 저격은 일본의 주요 인사 중 하나였던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범죄행위로 상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의 저격 동기 혹은 이유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만을 확정적으로 내릴 수는 없다. 안중근 의사의 저격 동기는 한국의 침략에 앞장섰던 이토를 처단하는 것이었고1) 우리의 입장에서 이는 정당한 행위로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논리 구성은 안중근 의사의 저격행위가 테러행위라는 일본의 주장을 수긍한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보다 면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 즉, 당시 상황에 대한 실제적인 고찰과 거시적인 수준에서의 국제법적 논의 등 안중근 의사의 저격행위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위한 연구방향이 요구되는 것이다. 통상적인 테러 상황은 테러행위를 감행하는 자들과 테러의 대상이 되는 실체 모두 각각 자신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고 양자 중 무엇이 옳은 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의 저격행위가 과연 이러한 통상적인 테러행위의 범주에 들어가는 지 보다 면밀한 고민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이고 이에 대한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논의를 도모한다면 일본에 대하여 안중근 의사의 저격행위에 대한 보다 명확한 역사적 평가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후 본 논문에서는 테러리즘에 있어서의 정당성의 문제를 논의한 후 당해 논의를 기반으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행위를 역사적으로 평가하되 국제법적 논의를 추가하여 당해 행위에 대한 평가를 보다 객관적이고 실제적으로 시도하도록 할 것이다. 다만, 본 논문에서는 테러와 관련된 실무적인 논의를 도모하지는 않을 것이고 안중근 의사의 저격을 소재로 테러리즘과 관련된 정당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구체화하여 당해 사실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도모할 예정이다. 사실 당해 안중근 의사의 의거 및 그에 대한 재판에 대한 쟁점은 이미 역사학 내 선행연구에서 상당 정도 다룬바 있다. 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기존 역사학 내 연구를 기반으로 하되2) 시대적 맥락에 매몰되지 않고 테러리즘이라는 틀과 법학적 관점을 채용하여 관련 쟁점을 보다 다각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이를 통하여 안중근 의사의 저격행위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고 추후 이에 대한 주요한 논의의 소재거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Ⅱ. 테러리즘의 규범적 이해 및 접근 방향

1. 전 세계적 갈등 양상의 변화

과거 전 세계적인 갈등의 양상은 냉전으로 대표되는 이념 논쟁이었다. 하지만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주장했듯이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와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승리로 인하여 이념 간 갈등은 종식을 고하게 되었다.3) 이에 따라 전 세계적인 갈등의 양상은 그 면모를 달리하게 되는 데, 이의 대표적인 면모가 문명 간 갈등이다. 특히 사무엘 헌팅턴은 전 세계의 문명을 중국을 핵심국으로 하는 유교문명, 미국을 핵심국으로 하는 서방문명, 인도를 핵심국으로 하는 힌두문명 그리고 이슬람문명 등으로 구분한 후 이들 문명 간의 충돌을 예견한 바 있다.4) 특히 그는 인간이 특정한 상황마다 타인과 자신을 구별함으로써 스스로를 정의한다는 변별이론(distinctiveness theory)을 제시하여 사람들의 총체적 생활방식인 문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5) 최근 문명간 권력이동으로 말미암아 서구 문명의 상대적 약화 및 비서구문명(중화와 이슬람 문명권)의 상대적 부상이라는 사실을 토대로 헌팅턴은 비서구 문명이 본격적으로 서구 문명에 도전하고 있는 상황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결국 사무엘 헌팅턴은 문명의 정체성과 배제의 정체성으로 말미암아 문명 간 충돌 현상이 본격화될 것이고 종국에는 중화 문명 및 이슬람문명과 서구문명 간 본격적인 대립이 도래할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와 같은 문명의 충돌의 원인을 보편주의에서 유래하는 서구의 오만함과 종교를 기반으로 하여 등장하는 이슬람의 편협함 그리고 경제력을 이유로 하는 중국의 자존심 등으로 상정하는 등 최근 벌어지고 있는 갈등의 원인을 상당히 다각적인 수준에서 파악하고 있다. 실제로 문명의 충돌 양상은 전 세계적인 갈등의 면모 역시 상당히 다양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핵무기의 등장으로 인한 공멸의 가능성과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은 전쟁, 특히 전면전의 발발을 억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문명의 충돌 양상은 테러라는 전혀 새로운 국제적 갈등의 양상을 초래하고 있다. 특히 비국가 행위자(non-state actors)의 등장은 이와 같은 상황을 더욱 강화하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전 세계는 테러 대응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2. 테러리즘의 정의 및 요인

테러를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테러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공포정치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합의가 존재하지만6) 당해 테러에 대하여 국제(법)적으로 합의된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7) 다만 통상적으로 테러를 “공포를 유발하고 현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비정부 단체에 의해 행해지는, 핍박에 대한 관심 유발과 국가의 과도한 대응 유발 및 상대방의 대응 의지 약화를 목표로 민간인과 상징적 목표물을 공격하거나 폭력을 사용하는 것 등”8)이라고 정의할 수는 있다. 더욱이 미국은 다음과 같은 테러의 공식적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테러행위는 (A) 폭력적 행위 또는 인간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행위로서 미국이나 다른 국가의 형법에 위반되며, 또는 미국이나 다른 국가의 관할권내에서 범하여졌다면 형법적 위반이 되는 행위이며; 그리고 (B) (i) 민간인 주민을 위협하거나 강제하는 것; (ii) 위협이나 강제에 의해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주는 것; 또는 (iii) 암살이나 납치를 통해 정부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을 의도한 것으로 보이는 행위와 관련된 행위이다.9)

이와 같이 민간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히는 테러 그 자체를 목적으로 테러행위를 하는 경우는 상정하기 힘들다. 잔혹한 결과를 초래하는 테러행위의 요인은 다양하게 존재하기 때문인데 특히 테러행위의 요인으로는 다음이 제시되고 있다.10)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테러행위를 행한다는 문화적 요인이다. 즉 문명 간 충돌이 불가피해진 현 상황에서 문화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처해진 문화에 소속된 자들은 우월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 서구문명의 영향으로부터 자신들의 문화가 위협받거나 정체되는 것에 대한 저항으로 테러를 행한다는 것이다.11) 특히 당해 요인을 주장한 헌팅턴은 이에 따른 주요한 충돌선(fault-line)이 서방문명과 이슬람문명 간에 놓여있다고 보았지만12) “일본, 중국, 인도, 이슬람, 아프리카 문명은 종교, 사회구조, 제도, 지배적 가치관에서 거의 공통점이 없다”고 보아13) 모든 문명 간 충돌의 가능성을 부인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테러의 다른 요인으로 경제적 요인을 들 수 있다. 즉 현재 지구화의 현상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경제적 제국주의가 초래되고 있으며 특히 이는 미국 및 국제경제제도가 형성하고 있는 중심부와 저발전국을 중심으로 하는 주변부가 형성됨으로 드러나는 요인이다.14) 특히 막스주의에 기반하여 세계의 경제질서를 분석한 웰러스타인(I. Wallerstein)의 세계체제론에 의하면 “세계경제는 크게 자본축적의 수혜자인 중심부 지역과 잉여를 착취당하는 주변부로 나누어지며 이와 같은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불평등한 교환은 역사적으로 결정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지속적인 특징이”다.15) 이와 같은 현상으로 인하여 세계경제의 불평등 현상이 초래되고 있는데, 당해 요인에 의한 테러행위의 대표적인 예로 탈레반에 의한 미국 WTC 공격을 들 수 있다. 즉 당해 요인에 기반한다면 당해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공격을 미국에 대한 공격이라기보다는 세계자본주의의 상징에 대한 공격으로 상정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당해 요인에 따라 미국 등 서구 국가들이 형성한 세계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을 실행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테러행위가 행해질 수 있다.

나아가 요사이 테러행위의 주요한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종교적 요인이다. 당해 요인은 자신들의 영적 순수함을 유지하고 서방세계를 중심으로 하여 가하여지는 세속적 압박에 저항하기 위하여 테러행위가 행해진다고 보고 있다. 당해 요인에 기반한 테러행위의 심각성은 테러행위자가 사후 세계에서의 보상을 바라고 테러를 감행한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대응이 매우 어렵다는 데에 있다. 기존의 세속적 테러리스트는 기존 사회의 기본 골격이 유지되는 것을 수용하지만 종교적 이유로 테러행위를 감행하는 자들은 기존 사회의 규범구조의 변경까지 시도한다는 점에서 그 테러행위의 심각 정도와 결과의 잔혹성은 더욱 심하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테러행위라는 불법적이고 비도덕적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오히려 당해 행위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종교라는 점에서16) 종교적 요인에 의한 테러행위는 그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최근 테러리즘의 양상은 정치적 동기를 넘어 종교적 동기로까지 발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정 테러행위의 요인을 위에서 제시한 어느 하나의 요인에 국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테러에 대한 규제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17)

3. 테러의 원인 분석 및 해결 가능성

이와 같이 테러의 원인은 다양하며 특히 하나의 테러행위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특정 테러의 원인을 확정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물론 특정 테러 행위에 대한 주요한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특정 테러사건의 경우, 테러행위를 범한 자들은 자신의 테러행위의 이유를 밝히는 경우가 드물지 않으며 나아가 그 문제된 테러의 배경을 통하여 특정 테러행위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테러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당해 테러의 원인에 대한 분석을 기반으로 테러와 관련된 문제의 해결을 도모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테러와 관련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고 보인다. 테러에 있어서는 테러의 정당성 문제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무고한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모든 테러행위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는 없다. 다만, 테러행위를 범하는 자들은 저마다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테러와 관련된 쟁점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이의 근간에 있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의 어려움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테러를 예방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제재를 가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테러를 자행하는 자들의 테러의 정당성 자체를 객관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쉽지는 않아 테러의 이유가 된 근본적인 문제, 갈등상황을 해결하는 데에는 상당한 난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하는 것이다.

4. 테러에 있어서 정당성의 문제 – 몇 가지 사례를 참고하여

테러 행위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테러를 자행하는 자들은 자신들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통상적인 경우이다. 자신들에 대한 정치적 혹은 종교적 탄압에 저항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공적인 행위를 도모하지만, 대내외적 사정으로 이것이 여의치 않을 때, 자신들의 목적을 위하여 선택하는 수단이 바로 당해 테러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근래 북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을 위한 여러 노력을 경주한 바 있지만 압도적인 영국의 국력에 의하여 그 노력은 계속 좌절되었다.18) 이에 북아일랜드 일부 세력은 아일랜드 공화국군(Irish Republican Army: IRA)을 결성하여 조직적인 테러 활동을 감행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민족은 자신들의 거주지를 열강들의 결정으로 이스라엘에게 내어 줌에 따라 자신들의 힘을 기반으로 하는 공적인 활동으로는 당해 거주지를 반환받을 수 없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이들 역시 이스라엘에 대하여 테러행위를 통하여 국제사회에 자신들의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19) 당해 사례를 보면 테러를 행한 자들의 동기가 무조건 악하고, 옳지 못하다는 것을 전제로 테러에 대한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도모하는 것에는 적지 않은 한계가 있다. 테러 행위자들 역시 자신들만의 정당성과 이유를 근거로 테러행위를 자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논리적, 역사적으로 부인하는 것에는 상당 정도의 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20) 물론 “해당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나라 또는 언론(기자) 및 학자 등 공정한 입장의 제3자들에게 이를 구분할 국제적인 기준”의 필요성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은 아니며,21) 이에 기반하여 “어떤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 것까지가 국제사회의 제3자들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는지를 구분하는 학문적인 기준을 설정하는 것”의22) 중요성을 부인할 수 없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테러행위를 평가하는 객관적 기준의 설정 시도가 가능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의 객관적 기준 여부를 판단해 줄 수 있는 제3자적 지위를 가지는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와 같은 시도의 성공 가능성을 담보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다음의 논변 역시 당해 사항을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테러행위 규제가 어려운 가장 큰 이유로는 현재까지 국제사회가 테러행위의 정의에 대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은 민족 자결권 행사를 위한 무력사용 행위는 테러행위로 인정되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서구 국가는 이에 반대하면서 민족자결권 행사를 위한 무력사용을 합법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한 당사자에게는 테러범죄자이지만 다른 당사자에게는 민족해방 투사이다”라는 표현은 이러한 상황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23)

결국 테러와 관련된 문제를 정당성의 문제로 접근하여 해결을 시도하는 것에는 상당한 부담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보인다.

5. 안중근 의사 저격행위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의의

우리 역시 이와 관련한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그것이다. 일본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테러로 상정하고 있다. 사실 일본의 입장에서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테러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우리가 안중근 의사의 저격행위는 테러가 아니라는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한다고 하여도 일본이 이를 수용한다는 보장은 없다. 여전히 테러라는 행위의 정의가 국제적으로 합의된 바가 없을 뿐만 아니라24) 테러의 정당성에 대한 합의, 다시 말해 테러행위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의견일치를 이루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테러라고 보여지는 행위가 과연 테러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을 하는 데에 있어서 테러라는 행위를 중심으로 하는 기준, 즉 테러의 정의를 중심으로 테러행위 자체의 정당성 여부에 대한 논의를 도모하는 것은 문제의 실마리를 푸는 데에 역부족이라고 보인다. 그렇다면 테러라는 행위에 대한 판단을 도모하는 데에 있어 그 테러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에만 천착할 것은 아니고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일반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이론에 기반한 판단 논거 혹은 근거를 제시하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특정 테러행위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즉 그 테러행위의 정당성을 따지는 것을 통하여 직면한 관련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접근방식을 다소 달리 할 필요성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Ⅲ.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의 법적 평가

1. 안중근 의사 저격행위의 역사적 배경 및 평가

이토 히로부미(이등 박문)는 일본에서는 일본의 근대화와 발전에 일익을 담당한 위인으로 평가를 받는 자이다. 하지만 그는 당시 조선인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과 비극을 안긴 장본인임에는 틀림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는 고종을 겁박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이 외교권을 찬탈하였음에도 조선의 동의를 얻었다는 주장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 무력으로 7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군사권까지 찬탈하는 만행을 저지른 자이다.25) 동학당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부친과 함께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경험을 한 안중근은26) 일본의 조선 침략에 본격적으로 저항하기 위하여 급기야 당시 일본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이등박문을 격살하기에 이른다. 안중근 의사 자신도 이토 히로부미 처형에 대하여 그가 “침략의 원흉”, “내정간섭의 주범”, “한국의 수탈자” 그리고 “국제적인 사기꾼”이었다는 이유를 직접 제시하였다.27) 안중근 의사는 이등 박문이 을미 7조약을 체결하고 고종황제를 폐하는 것을 보고 북간도로 건너 가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고28) 참모중장의 지위에서 그를 저격하였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이등 박문의 얼굴을 모르는 상태로 러시아의 하얼빈 역으로 가게 되었지만 이등 박문의 옷차림과 주위의 상황을 감안하여 그를 구분하였고 결국 정확하게 명중시켜 사살하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일본 동양평화론의 허구성과 한국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게 된 역사적 쾌거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29) 일본은 안중근 의사를 줄기차게 테러리스트라고 보고 있다. 다음의 논변은 이를 직접적으로 현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 일본에서는 이토의 죽음을 ‘明治維新 이래 첫 불상사’로 규정하고,30) ‘明治中興 第一의 功臣’이 萬里異鄕에서 ‘兇手’에 돌아갔으며, “미워해야 할 자는 冥한 한인들이며, 결코 容赦해서는 안 된다”는 논조가 지배이었다.31) 심지어 안중근에 대해 “아아! 兇漢 그자는 어떤 사람인가. 미치광이인가 천치인 가. 감히 人道의 죄를 범했을 뿐 아니라 公의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고 마침내 공의 목적을 유린해버렸으니 역시 얼마나 한스러운 일인가”라는 비난도 있었다.32)

일본은 안중근의 저격행위가 테러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계속 언급한 바와 같이 형식적으로 본다면 그와 같이 볼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지는 않다. 앞서 본 테러 개념의 정의를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당해 안중근의 저격행위 역시 정당성의 측면에서 조망한다면 사건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내리는 것이 상당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당시 제국주의에 따른 서구 열방의 팽창정책을 일본 역시 채택하였고 조선에까지 자신의 야욕을 펼친 일본의 입장과 이에 저항하는 조선의 입장 중 어느 것이 정당하다고 혹은 옳다고 판단하는 것이 일견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중근의 저격행위를 테러에 대한 일반적 수준의 논의만 도모하면서 다루는 것은 적절하다고 볼 수는 없다. 안중근 의사의 저격행위에 대한 보다 거시적인 수준에서의 역사적 평가가 필요한 이유도 당해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이에 대한 논의는 다음의 사항을 중심으로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2. 안중근 의사의 지위(status)를 고려한 평가
1) 지위의 의의와 행위 평가의 관계

통상적으로 지위란 “사회적 집단에서 연령·성·직업·소득 등에 따라 결정되는 개인의 위치”를 의미하는데33) 당해 지위에 따라 특정 행위의 법적 평가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물론 행위는 원칙적으로 무미건조하게 판단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형법 영역에서는 모든 범죄행위에 대한 일정한 제재를 예정하고 있다. 형법은 모든 일탈행위에 대한 다양한 사회적 통제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34) 하지만 형법 역시 특정한 지위를 향유하는 자들의 행위에 대하여 특별한 취급을 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누구나 정범이 될 수 있는 일반범과는 달리 신분범은 행위자에게 일정한 신분이 인정되는 경우에만 범할 수 있는 범죄라는 점에서35) 일정한 신분 혹은 지위를 향유한 자만이 당해 신분범을 범할 수 있는 것이다. 신분범을 범할 수 있는 자로는 위증죄에 있어서의 “법률에 의하여 선서한 증인,” 직무유기죄에서의 “공무원” 그리고 수뢰죄에서의 “공무원 또는 중재인” 등을 제시할 수 있다. 따라서 행위의 법적 평가를 도모하는 데에 있어서는 당해 행위를 수행하는 자의 지위 혹은 신분을 중요하게 고려하여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2) 국제법상 행위 평가의 의의

국제법상 통상적으로 행위의 주체는 국가이다. 따라서 국제법상 행위는 주로 국가의 행위를 중심으로 논의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국가는 자신이 직접 어떠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36) 자신의 구성원인 개인을 통하여 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특정한 개인의 행위를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있느냐가 국가의 행위를 평가하는 데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쟁점으로 등장하게 된다. 일례로 국가책임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모든 구성원의 행위일 필요는 없으며 국가 자신에게로 귀속될 수 있는 공무원 혹은 특정 기관의 행위에 대해서만 국가는 책임을 지게 된다.37) 즉 국제법상 국가는 자신의 정부기관 혹은 그 대리인들과만 동일시될 뿐 국민 개개인 혹은 국민 전체와 동일시된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고38) 국가기관의 행위를 중심으로 국가의 행위에 대한 논의는 보다 구체적으로 도모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국제법상 행위에 대한 법적 평가를 도모함에 있어서는 당해 행위를 수행한 자의 지위 혹은 신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관련 행위자의 지위와 신분에 대한 분석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테러행위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테러리즘이라는 것은 일반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을 의미한다는 점에서39) 국가의 기관이라고 볼 수 있는 자가 특정의 목적을 가지고 특정의 지위를 향유하는 상대방에게 하는 공격행위를 무심히 테러행위라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물론 국가의 기관이라고 볼 수 있는 특정의 지위를 향유하는 자들 역시 테러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판단을 위해서는 테러리즘의 속성에 당해 행위가 부합하는 지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분석이 요구되는 것이고 이를 위하여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행위자의 위상 혹은 지위를 고려할 필요성이 상당한 것이다.

3) 안중근 의사의 지위와 이토 히로부미 저격행위 평가
(1) 당시 저격행위에 대한 안중근 의사의 인식과 개괄적 조망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행위가 테러인지에 대한 분석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당해 저격행위의 배경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가 전제되어야 한다. 당시 우리나라는 주권을 여전히 보유한 국가로서 일본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40) 당시 안중근은 독립군 참모중장으로서,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추밀원 의장으로서 모두 국가기관으로서의 지위를 향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당시 우리나라는 언급한 바와 같이 주권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과 전쟁 중이라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상당하다. 그런데 당시 우리에게는 정규군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행위와 관련해서는 의병 전쟁이 주요한 쟁점이 된다.41) 안중근 역시 旅順口 地方裁判所에서의 재판 당시 자신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개인적인 행위가 아닌 의병전쟁의 일환으로 수행되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 바 있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 남을 죽인 범죄인이 아니다. 나는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의무로 소임을 띠고 하얼빈에 이르러 전쟁을 일으켜 습격한 뒤에 포로가 되어 이 곳에 온 것이다. 旅順口 地方裁判所와 전연 관계가 없는 일인 즉, 만국공법과 국제공법으로써 판결하는 것이 옳다.42)

문제는 당시 상황을 객관적인 전쟁 상황으로 볼 수 있느냐의 여부이다. 물론 국제법상 전쟁에 대한 정의가 일반적으로 합의된 바는 없다. 다만, 일반적으로 무력충돌 상황을 전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무력투쟁의 존재’라는 실질적 요소, ‘전쟁의사’라는 의사적 요소 그리고 ‘국제법 주체간의 무력투쟁’이라는 주체적 요소 등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43) 당시 의병의 활동을 무력투쟁으로 보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다고 생각한다. 당시 독립운동의 큰 방향 중 하나는 장기적으로 우리 민족의 역량을 제고하자는 애국계몽운동과 또 다른 하나는 무력을 통한 항일독립운동이었는데 당시 의병은 이중 후자의 길을 따랐던 것으로 결국 의병운동은 무력을 통한 투쟁이라는 것이 일반적 평가이기 때문이다.44) 나아가 당시 의병전쟁에 전쟁의사가 있었는지가 문제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역시 인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위의 안중근 의사의 증언과 선언에서와 같이 의병들은 전적으로 일본에 저항한다는 의사를 가지고 전쟁의 일환으로 당해 의병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인식을 명확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이 과연 전쟁의사를 가지고 있었느냐가 문제될 것인데 국제법상으로 민족자결운동의 경우 무력충돌 당사자들에게도 교전자 자격이 주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해 의병전쟁 역시 국제법 상 전쟁으로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를 국가의 정규군 간의 전쟁이라고 보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일본은 1907년 정미 7조약을 통하여 우리의 군대를 해산시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 의병활동을 실제적인 전쟁의 일환으로 전개된 활동으로 볼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보다 심도 있는 고민이 필요하다.

(2) 선전포고의 함의 및 의병전쟁

전쟁의 성립 여부와 관련하여 흔하게 논의되는 것은 선전포고의 존재여부이다. 하지만 다음의 논변과 같이 국제법상으로 공식적 선전포고가필수적으로 요구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조건부 최후통첩은 상대방에게 그 목적에 충분하다고 판단되는 기간 내에 특정 상태를 가져오거나 제거할 것을 요구하고, 또한 요구 사항이 충족되지 않은 경우 그 기간이 만료되는 시점에 그 사이 전쟁 상태가 발생할 것임을 상대방에게 알려준다. ···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적대감의 실제적인 개시에 대한 당사자의 의도가 명백히 표현된다면 종국적으로 이와 같은 적대감의 실제적인 개시가 전쟁상태를 초래할 수 있다.45)

더욱이 당해 전쟁의 개시는 라디오 방송, 기자회견과 같은 내부적인 차원에서의 선언에서 발견할 수 있고, 개전의 의도는 적의 전 영토가 공격을 받는 적대관계와 같은 상황에서도 암시될 수도 있다.46) 결국 의도에 대한 표현의 형식이 무엇이든지 간에, 당사자(parties) 중 하나가 전쟁상태(a state of war)를 야기하고자 하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전쟁이라는 상황을 인정하는 것에 별 무리는 없다는 평가가 가능하다.47) 실제로 다른 당사자가 전쟁 상태의 존재를 부인하는 경우에도 공격자에 의한 개전 의도의 적절한 선언이 전쟁상태를 야기한다고 보려는 노력이 존재하는데, 실제적인 무력충돌이 없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반란단체의 점령과 같은 상황에 대한 대응의 필요성에 따라 전쟁법의 확대 적용을 도모할 필요성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48) 앞서 언급한 바도 있지만 전투행위를 하는 와중에 우리는 일본에 대한 여러 방식으로의 전쟁 개시 선언을 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공식적인 선전포고가 없었다는 사실이 의병활동이 전투행위라는 점을 부인하는 유력한 논거가 된다고 보는 데에 상당한 부담이 있다고 보인다.

3) 의병의 전쟁 수행 능력과 전투원으로서의 지위

의병의 활동을 전쟁으로 상정하기 위해서는 의병의 지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의병이 실제적으로 일본군과 전투행위를 벌였고 실질적인 피해를 준 사실을 가지고49) 의병전쟁의 실효성을 제시할 수 있다. 이는 상대적이고 결과론적인 접근이기는 하지만 의병전쟁을 인정할 수 있는 주요한 논거로 인정하는 데에 별 무리는 없다. 특히 을미사변 이후에는 유성에서 문석봉이 기병하였고 단발령이 발표된 후 의병은 전국 각지로 확대되었다.50) 급기야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국권상실의 상황에서 무장항쟁이 더욱 격화되었는데,51) 의병활동의 전개와 관련하여 주목하여야 하는 지점은 일본에 의하여 군대가 해산되는 1907년이다. 당시 해산된 군인들은 근대식 무기를 가지고 의병에 가담함으로써52) 당시 의병 부대는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게 되었고 무장과 조직 역시 강화하여53) 전력이 크게 향상되었다.54) 특히 당해 시점에서 의병의 공격 대상이 친일인사 혹은 친위대를 넘어 직접 일본군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일본군과의 직접적인 전쟁 수행을 도모하였다는 평가가 가능하게 된다.55) 특히 당시 의병은 의병활동을 하면서 서울의 각국 영사관에 통문을 보내 자신들이 순수애국단체로서 국제사회는 의병을 국제공법 상의 전쟁단체로 인정하여 줄 것을 지속적으로 주장하였으며,56) 의병부대 사이의 연합전선을 통하여 서울진공작전을 꾸준히 시도한 바도 있다.57) 특히 당해 사항과 관련하여 주목하여야 하는 점은 국내에서 무장투쟁하였던 의병부대들이 만주·간도·연해주 등지로 이동하여 독립군에 합류함으로58) 무력항쟁의 연속성이 단절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급기야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일전쟁 발발이라는 상황에서 중국정부와 협력하여 대일전쟁 참가를 결정하였는데59) 각지의 무장독립군을 모아 지청천을 총사령 그리고 이범석을 참모장으로 하는 광복군을 창설하기에 이른다.60) 이와 같이 우리 독립군의 활동은 의병활동과 지속적으로 연계되었던 것이 사실이며 이를 통하여 종국적으로 의병전쟁은 우리 독립군의 활동과 지속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는 평가 역시 가능하다. 명시적 전쟁선언 행위가 없더라도 대규모의 전면적 적대행위는 전쟁으로 상정하는 것이 가능한데 당해 의병의 적대행위는 독립군으로 계승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국가만이 법적 의미에서의 전쟁을 개시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민족해방운동과 같은 비국가행위자들 역시 국가들에 의한 승인(recognition)을 통하여 전쟁을 개시할 수 있다는 평가를61) 고려하고 실제적으로 1977년 제네바 협약 제1추가의정서에서도 식민지 지배 하의 독립을 의도하는 민족해방전쟁을 국제적 무력분쟁으로 분류하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의 의병 전쟁 역시 국제적인 수준의 전쟁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앞서 분석한 바를 기반으로 의병전쟁의 전개 양상을 고려한다면 당해 의병전쟁은 의병의 교전자격을 전제로 하여 벌어진 전쟁으로 상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인다. 더욱이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추밀원 의장이었다는 점에서62) 교전국의 주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렇다면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행위는 정당한 전쟁 수행행위의 일환으로 도모된 행위라고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일본이 이와 같은 당시 상황을 기반으로 하는 주장을 부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당해 지점에서 안중근 의사의 저격행위 자체에 대한 평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도모할 필요성을 인정할 수 있다.

4) 안중근 의사 저격행위에 대한 다각적인 평가 필요성

당시 조선의 의병전쟁을 국제법상의 전쟁으로 상정할 수 있다고 본다면 우리는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행위를 정당하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일본은 당해 행위의 정당성을 여전히 부인할 수 있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의 불법성이 인정되지 않는 한에 있어 안중근 의사의 의거의 정당성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언제든지 부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중근 의사에 의한 의거에 대한 보다 거시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평가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고 이는 일본의 조선 병탄이 과연 국제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지의 논의로 이어지게 된다. 더욱이 당해 논의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대한 근본적인 판단 자료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필요하다. 결국 일본의 조선 병탄이 과연 국제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지의 문제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판단 근거와 논거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에 대한 고찰의 필요성을 인정할 수 있다.

3. 일본의 조선 병탄의 국제법적 평가와 안중근 의사의 저격행위
1) 국제법상 조약의 의의와 성립 요건

국제법상 권리·의무의 주체는 당연히 국가이다. 특히 국가는 자신의 국제적인 법률관계와 관련한 일정한 법률효과를 발생시키고 여러 국제관계를 규율하기 위하여 특히 조약을 선호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국제사회에 여러 유형의 합의가 존재하지만 조약은 그 이행여부와 관련하여 가장 높은 기대와 신뢰를 보장해주기 때문이다.63) 특히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 제2조 제1항에서는 조약을 “단일의 문서 또는 2 또는 그 이상의 관련문서에 구현되고 있는가에 관계없이 또한 그 특정의 명칭에 관계없이, 서면형식으로 국가간에 체결되며 또한 국제법에 의해 규율되는 국제적 합의”라고 정의하고 있다.64)

그런데 당해 조약이 유효하게 성립하기 위해서는 체결당상자의 조약체결능력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조약은 통상적으로 조약체결에 관한 합법적인 권한을 보유한 조약체결권자, 즉 국가원수에 의한 명시적인 합의에 의하여 체결되어야 한다.65) 즉, 조약의 성립을 위해서는 조약체결당사자들의 명시적인 합의(express consent)가 존재하여야 하는 것이다.66) 나아가 조약체결에 대한 대표자의 의사는 하자가 없어야 하기 때문에 대표자가 착오·사기에 기하여 한 조약 체결 혹은 대표자 자신의 부패에 의한 조약 나아가 국가 자체에 대하여 강박 혹은 무력을 통하여 체결된 조약은 당연 무효라고 보아야 한다.67)

2) 을사늑약을 위시한 대한제국과 일제 간 조약 체결 상황

조약은 언급한 바와 같이 국가 간 합의에 의한 문서를 말한다. 하지만 일제가 우리나라의 주권을 찬탈하였던 당시 조선과 일제의 유효한 합의에 의하여 복수의 조약이 체결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고 보인다. 을사늑약의 불법성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문헌을 통하여 밝혀진바 있지만,68) 실제로 그와 같은 조약체결의 불법성으로 말미암아 조약에 대한 법적 평가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에, 보다 면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일제의 조선 침략 과정은 무력으로 일관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1900년대에 들어서자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전쟁 위험이 높아지는 가운데, 일본군은 서울로 침입하여 군사적 위협을 가한 바 있으며 황실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한일의정서를 성립시켰다.69) 이후 러일 전쟁이 일본의 연승으로 종전하게 되자 일본은 조선침략을 본격화하게 되는데, 당시 조선의 외교권 박탈이 대표적이다. 특히 당해 외교권을 박탈하였던 을사늑약의 체결 과정은 언급한 바와 같이 일제의 무력에 의한 것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음의 논변은 당시의 상황을 개괄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있다고 보인다.

이토는 駐韓日本公使 하야시와 함께 일본군대를 거느리고 궁궐에 들어가서 皇帝와 大臣들을 위협하여 일본측의 보호조약안을 승인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듣지 아니하자, 가장 반대가 심하던 參政(首相) 韓圭卨을 일본 헌병이 회의실에서 끌어내고 말았다. 그 뒤에 일본 군인이 外部로 가서 外部大臣印을 가져다가 조약에 날인하여 버렸다. 말하자면 불법적인 절차를 밟아 조약을 성립시킨 것이었다.70)

즉 을사조약의 체결은 고종의 의사에 기반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을사조약이 고종의 승인한 바가 아니기 때문에 열국의 공동보호가 필요하다는 신서를 발표를 한 바도 있다.71) 급기야 광무 11년(1907년)에 고종은 이상설·이준·이위종 등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특사를, 헤이그에서 열렸던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여 자신의 조인이 없는 조약이 무효라는 주장을 하고자 하였다.72) 특히 일제의 강압적인 조약 체결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당시 조약 체결 상황에서 문제되었던 외부대신 직인의 강탈 문제이다. 이와 관련 을사조약체결 후 1905년 11월 23일 상해에서 발행되었던 「차이나 카세트」라는 영문지는 다음과 같은 보도를 한 바 있다.

이달 17일 일본 공사 등은 보호조약을 조인시키기 위하여 궁중에 문안하였지만 황제를 비롯하여 내각원들은 극력 이에 반항하면서 조인을 거부하였음. 오후 8시 伊藤후작은 林공사의 요청에 따라 長谷川대장과 함께 일본병과 순사를 합한 一隊를 인솔하고 궁중에 들어갔으나 오히려 성사될 전망이 없게 되자 마침내 헌병대를 외무대신 관저에 파견하여 다음 18일 오전 1시 외교관보 沼野는 그 관인을 빼앗아 궁중으로 들어갔으나 소요로 인하여 그날 1시 반 日本全權등은 제멋대로 이것을 조약서에 날인하고는 그것으로 조인을 완료하였다는 것을 내각원에게 선언하였다. 그래서 황제는 계속 국새의 날인을 거부했지만 일본의 강압에 결국 조인하기에 이르게 된 것으로서 교묘하게 이 조인이 끝났다는 것은 사기술에 의하여 성립된 것임.73)

즉 「차이나 카세트」라는 영문지는 을사조약의 조인이 황제와 내각에 대한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조인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74) 뿐만 아니라 당시 독일에서 발행되었던 「로칼 안쫠겔」역시 조약 체결에 반대하던 대신들을 일본병들이 강제로 조약에 날인하였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3) 을사조약의 법적 효력에 대한 논의

사실 한국 측에서는 을사조약의 원천적인 무효를 주장하고 있지만 일본 측은 현재는 무효이지만,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던 당시에는 제국주의 정책이 허용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유효였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75) 일본은 을사조약이 정당한 조약이었다는 입장 혹은 역사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부당했을지는 몰라도76) 원칙적으로 체결 당시에는 유효였다는 입장을 줄기차게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이 우리 조선국에 대하여 무력을 행사함으로 당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은 확정할 수 있다. 사실 당시 일본의 무력행사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국제법상으로 현재 모든 유형의 무력행사가 금지되고 있지만77) 국책수단으로서의 무력이 금지된 것은 1927년 부전조약으로 불리는 부전 조약(일명 파리조약 또는 켈로그-브리앙 조약)에서였기 때문이다.78) 사실 부전 조약 이전의 개별 국가의 국가이익을 위한 무력행사를 국제사회가 용인하였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79) 그렇기는 하지만 당해 무력행사를 통한 조약의 체결은 조약법 협약 상의 무효 사유에 해당한다는 점을80) 주목하여야 한다. 이에 기반한다면 당해 을사늑약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주권을 찬탈해가는 조약의 효력은 일응 무효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문제는 당해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협약은 1969년에 체결되어 그 이후 여러 국가들의 비준을 통하여 발효를 하였다는 점이다.81) 즉, 을사조약은 조약법협약이 발효하기 전 일제의 무력행사에 의하여 체결된 것이라는 점에서 당해 조약의 유효성을 주장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지는 않다.

하지만 법리적으로 무효는 취소할 수 있는 행위와는 달리 누구의 주장을 기다리지 않고서 처음부터 효력이 없으며, 시간이 경과하여도 효력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82) 국제법상으로도 이에 대한 논의는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약법 협약은 국가가 아닌 국가 원수에 대한 개인적인 수준의(personally) 무력행사 혹은 협박을 조약의 무효사유로 제시하고 있는데,83) 조약법 협약 체결 이전의 무력행사에 의하여 체결된 조약의 무효를 주장할 수 있는 여지 역시 상당하다. 특히 Valerie Epps 교수는 조약법 협약상의 무효 사유를 설명하기 위한 실제적인 예로 1937년에 독일의 체코에 대한 무력행사에 의한 조약체결사례를 들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극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독일 대표자〔Goering과 Ribbentrop〕는 무자비하였다. ··· 그들은 말 그대로 조약 문건이 놓여져 있었던 탁자 주위에 자리 잡았던 Hácha 박사〔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와 M. Chavlkovsky〔외무장관〕를 매섭게 다그쳤고 지속적으로 그들을 겁박하였으며 급기야 그들에게 펜을 손에 쥐도록 하였다.84)

당해 상황은 우리 조선국에게 일제가 가한 무력행사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85) 그렇다면 우리 역시 을사늑약 등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체결된 조약의 무효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이며, 이를 기반으로 한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한 역사적 평가 역시 가능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안중근 의사 저격행위의 역사적 평가 방향

그렇다면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통상적인 테러리즘과 관련한 평가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는 없다. 즉 위에서 논의한 테러리즘에 대한 평가, 특히 실제적인 테러행위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도모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테러를 행하는 자의 명분을 옳지 않다고 확정적으로 단정지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즉, 통상적인 테러행위의 상황은 그 테러행위를 행하는 자의 행위 근거, 즉 명분만을 고려한다면 「正 v. 正」의 관계가 성립한다고 볼 수 있고, 이로 말미암아 테러행위 자체의 불법성과는 무방하게 그 행위의 이유 혹은 명분의 불법성을 문제 삼는 것은 쉽지가 않다는 것은 계속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그 논의의 장(場) 자체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무력행사에 의한 조약체결은 무효라고 볼 수 있고, 이에 기반한 일본의 조선 점령과 지배는 국제법적으로 위법한 지배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불법적인 지배를 하였던 일본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고 이러한 점에서 일상적인 테러행위에 대한 평가 잣대를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적용할 수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요컨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의 배경은 「正 v. 不正」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상정할 수 있는 것이고86) 이는 결국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볼 수 없는 주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테러리즘의 틀에 따라 테러행위자는 자신의 행위가 테러를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테러행위는 했지만 그 행위는 정당성이 있으므로 속성상 테러일 수 없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의 저격 행위는 위의 고찰에 기반한다면 행위로나 속성 면에서 테러로 평가할 수는 없다.

Ⅳ. 나가는 말

지금까지 테러리즘의 원인 혹은 정당성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의 어려움을 전제로 우리 안중근 의사 저격행위의 역사적 평가를 도모하였다. 테러리즘의 사전적인 정의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테러리즘의 요인 혹은 정당성을 전제로 한다면 일본이 안중근 의사의 저격행위를 테러로 상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앞서 본 바와 같이 당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의 일제의 무력행사 그리고 국제법적인 논의를 보다 거시적으로 고려한다면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테러로 치부할 수 없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즉 안중근 의사의 법적 지위를 고려하고 당시 일본 제국의 우리 조선에 대한 침탈의 근거가 된 여러 조약의 불법성과 부당성을 고려한다면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테러로 볼 수는 없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 당시 우리는 의병전쟁이라는 상황 하에서 일본과 교전상태에 있었던 것이고 의병조직의 참모중장이라는 지위를 향유하는 안중근 의사의 저격행위는 정당한 행위로 평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행위를 테러로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체결된 을사늑약을 위시한 일제 식민통치의 근간을 이루었던 복수의 조약의 효력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안중근 의사의 저격행위 상황은 「正 對 正」이라는 이념 혹은 가치 간 상충 상황이 문제되는, 즉 각 당사자들이 자신들 행위의 정당성을 각각 주장하는 일반적 수준의 테러 상황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즉 안중근 의사는 명백히 부정한 가치 및 이념을 추구한 일제에 저항하여 적극적인 항전 의사를 실행하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상정할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평가를 도모하는 데에 있어서는 관련 당사국 간 합의를 도출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관련 사실에 대한 평가 및 견해가 다르고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관련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의 저격행위에 대한 역사적 평가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고 보인다. 안중근의 저격행위와 관련 한국과 일본 간에는 여전히 입장정리가 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서로 감정싸움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대립하고 있다.87) 하지만 특정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는 보다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논거에 기반하여 도모되어야 하고 이를 통하여 보다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쳐야 한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한 역사적 평가 역시 보다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는 논거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를 위하여 국제법을 비롯한 법적 관점과 테러리즘이라는 분석틀을 활용하였지만 향후에도 일본 사료와 일본 학자들의 견해 등 일본을 설득할 수 있는 보다 다각적인 접근이88)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한일 관계의 설정에 미래지향적인 관점이 필요하지만 일본과의 보다 발전적인 관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한일 관계와 관련한 다양한 연구를 통하여 과거에 대한 보다 냉정한 평가와 객관적 시각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각주(Footnotes)

* 본 연구는 2021학년도 상명대학교 교내연구비를 지원받아 수행하였음.

1) 이기백, 「한국사신론」, 일조각, 2005, 332쪽.

2) 비교적 오래된 문헌 역시 본 논문은 소중히 참고하였다. 권위 있는 문헌을 참고한다는 이유였지만 선행연구를 살펴본다는 이유도 있다.

3) 프랜시스 후쿠야마(이상훈 옮김), 「역사의 종말 –역사의 종점에 선 최후의 인간-」, 한마음사, 1992, 85쪽.

4) Samuel P. Huntington,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 A Touchstone Book, 1996, pp. 19~29.

5) Ibid., pp. 67~68.

6) 조홍용, “‘테러’와 ‘저항권’의 구분 기준에 관한 연구 :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중심으로,” 「한국군사학논총」 제71집 제2호, 2015.6, 6면.

7) 국제사회는 이에 대한 합의를 시도한 바 있으나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Paul Medhust, Global Terrorism, UN Peace Operations Training Institute, 2008, pp. 85-92. 조홍용, 위의 논문, 6면에서 재인용.

8) 존 베일리스 외(하영선 외 옮김), 「세계정치론」, 을유문화사, 2010, 436면.

9) United States Code Congressional and Administrative News, 98th Congress, Second Session, 1984, October 19, Volume 2; par. 3077, 98 STAT. 2707 cited in Noam Chomsky, Pirates and Emperors, Old and New, 120 (South End Press, 2002). 김영석, “국제법상 테러행위의 규제방안에 관한 고찰,” 국제테러와 한국의 대응(2004년도 대터러 학술 세미나 자료집), 2004, 49면에서 재인용. 본문의 개념 정의는 당해 문헌에서 직접 옮긴 것임을 밝혀둔다. 당해 논문에서는 테러의 정의가 주요한 쟁점은 아니므로 테러의 개념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는 큰 의미가 없다.

10) 다음에 다룰 세 가지 요인은 존 베일리스 외(하영선 외 옮김), 앞의 책에서 제시된 요인이다.

11) 존 베일리스 외(하영선 외 옮김), 앞의 책, 439면

12) 존 베일리스 외(하영선 외 옮김), 위의 책, 439면.

13) 새뮤얼 헌팅턴(이희재 옮김), 「문명의 충돌」, 김영사, 1999, 35면.

14) 존 베일리스 외(하영선 외 옮김), 앞의 책, 440면.

15) 박재영, 「국제정치 패러다임」, 법문사, 2000, 521면.

16) 존 베일리스 외(하영선 외 옮김), 앞의 책, 441면.

17) 신창훈, “해상 테러리즘(maritime terrorism)의 규제와 방지에 관한 국제법 동향과 우리나라의 대응방향,” 국제테러와 한국의 대응(2004년도 대터러 학술 세미나 자료집), 2004, 4면. Joseph Grinstein, “Jihad and the Constitution: The First Amendment Implications of Combating Religiously Motivated Terrorism”, 105 The Yale Law Journal 1347, 1996 역시 종교적 동기에 의한 테러리즘에 대한 분석을 이슬람 근본주의자인 Rhaman에 대한 재판과정을 통하여 수행하고 있다. 신창훈, 위의 논문, 4면에서 재인용.

18) 11세기 무렵 독자적인 영역을 형성하고 있었던 웨일즈와 스코틀랜드에 대하여 잉글랜드 왕실은 각각 16세기 중엽과 18세기 초기에 통합선언을 하였고 이후 당해 지역에 대한 식민정책을 본격화하게 된다. 초기에는 종교 갈등이 주요하였지만 점차적으로 경제·정치적 갈등으로 옮겨감에 따라 북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은 본격화되게 되었다. 신혜수, “아일랜드, 길고도 멀었던 대립과 갈등,” 「역사비평」 제43집, 1998, 371〜374면.

19) 발포어 선언을 통하여 정체성을 인정받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1964년 팔레스타인 아랍계 난민들은 민족해방과 반시오니즘 민족운동을 구체화하기 위한 해방 기구를 창설하였지만 이스라엘과의 4차례의 중동전쟁에서 패배하자 자신들의 생존권 보장을 위하여 테러행위를 자행하였던 것이다. 1968년 조지 하바시가 주도하는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 소속 테러분자들이 이스라엘 항공기를 공중납치한 이래 테러는 상당 기간 계속되었다(조영갑, 「테러와 전쟁」, 북코리아, 2004, 20면). 최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신자들의 성지라고 여겨지고 있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선언하여 아랍계 국가들과의 갈등을 빚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해 지역은 여전히 국제적인 분쟁지역으로 남아 있다(https://www.bbc.com/korean/news-42261926 2021년 7월 9일 방문).

20) 실제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아일랜드 공화국 정부와 같이 현재 기득권적 지위를 향유하는 국가에 대하여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적지 않은 정치적 동기를 지닌 실체들은 테러리즘이란 폭력적 행위를 직접적인 자신들의 전략으로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신창훈, 앞의 논문, 4면.

21) 조홍용, 앞의 논문, 11면.

22) 조홍용, 위의 논문, 11-12면.

23) 김영석, 앞의 논문, 49-50면

24) 김영석, 앞의 논문, 94면 역시 “테러행위의 정의가 현행 국제법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25) 구완서, “도마 안중근 의병참모중장의 생애와 사상”, 「대학과 복음」 제14호, 2009.12, 38-40면. 당해 사항은 안중근 의사가 자신의 최후 진술에서 밝힌 바이기도 하다.

26) 구완서, 위의 논문, 14면.

27) 구완서, 위의 논문, 47면. 특히 안중근의 저격행위는 그가 줄기차게 주장하였던 동양평화론과도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동양평화론에서 동북아 수준의 평화를 위하여 지역통합체 또는 상호 평등한 지위를 향유하는 민족국가들로 구성된 초국가주의 지역공동체의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는데(노명환, “유럽통합 사상과 역사에 비추어 본 안중근 동양평화론의 세계사적 의의-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초국가주의 지역공동체 창설 제안?-”, 「국제지역연구」 제13권 제4호, 2010.1, 186면), 일본의 한국 침략은 그의 이상에 배치되는 야만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28) 오수열,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하얼빈 의거,” 「서석사회과학논총」 제2집 제1호, 2009, 4면

29) 한철호, “일본학계의 안중근 연구 쟁점과 과제,” 「한국근현대사연구」 제61호, 2012.6, 151면.

30) 「朝鮮倂合史」, 朝鮮及滿洲社, 1926, 479면. 한철호, 위의 논문, 153면에서 직접 인용.

31) ≪大阪朝日新聞≫ 1909년 10월 27일자, 「伊藤公を追む」. 한철호, 위의 논문, 153면에서 인용한 것을 직접 인용.

32) 佐藤綠葉, 「嗚呼伊藤博文公」, 至誠館, 1909, 1면. 한철호, 위의 논문, 153~154면에서 인용한 것을 직접 인용. 이상 한철호, 위의 논문, 153~154면. 본문에서 인용한 문장 중 각주 번호 역시 그대로 옮김에 따라 원본문의 각주 번호가 변경되었다.

33) 강기홍, “교장의 법적 지위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교육법을 중심으로-,” 「교육법학연구」 제23권 제1호, 2011.6, 2~3면.

34) 이상돈, 「형법강론」, 박영사, 2017, 63면.

35) 이상돈, 위의 책, 62면.

36) 이와 관련 김대순, 「국제법론」, 삼영사, 2009, 584면에서는 “국가의 행위는 인간이나 인간의 집단에 의한 어떤 작위 또는 부작위와 관련을 맺어야 한다. 국가는 오로지 그 대리인들과 대표자에 의해서만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37) 김대순, 위의 책, 584쪽.

38) Rebecca Wallace, International Law, Sweet & Maxwell, 1986, p. 157; Malcolm N. Shaw, International Law,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pp. 488~489. 김대순, 위의 책, 584쪽에서 재인용.

39) 김대순, 위의 책, 1428쪽.

40) 당시 우리나라는 을사늑약을 통하여 외교권과 한일신협약을 통하여 군대가 해산되기는 하였지만(이기백, 앞의 책, 331〜334면), 우리나라의 국권은 1910년 경술국치를 통하여 찬탈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 역사」, 경세원, 2000, 487면).

41) 명순구,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접점에 대한 법적 평가 – 日本人이 安重根을 兇漢으로 부르기 어려운 법리적 이유,” 「인권과 정의」 제333호, 2004, 227면.

42) 安重根 著, 安重根義士紀念館 釋, “안중근(安重根)義士自敍傳”, 安重根義士紀念館, 1993, 111-112쪽. 명순구, 위의 논문, 228면에서 재인용. 이와 같은 안중근 의사의 주장은 재판 과정 내내 유지가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죄목으로 기소한 검사에 대하여 안중근은 다음과 같이 반박을 하였기 때문이다(이기웅 옯겨 엮음, 「안중근 전쟁 끝나지 않았다」, 열화당, 2019, 354면).

42)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게 되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나의 목적을 달성할 기회를 얻기 위해 한 것이다.

42) 사실 안중근은 10.16의거 이후 의병참모중장이라는 공식 직함으로 선임되었고 실제로 그 역시 “··· 나는 의병참모중장에 피선되었다.”라고 자신의 지위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안중근, 「안응칠 역사」, 68면. 김삼웅, 「안중근평전」, 시대의 창, 2014, 170〜171면에서 재인용),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법적 지위가 군인이고, 이에 따라 자신의 행위 역시 교전 중에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박정원, “안중근 재판의 문제점과 부당성에 대한 법적 고찰,” 「법학논총」 제25권 제1호, 2012, 124면. 서정훈,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에 대한 국제법 및 교회법적 접근,” 「교회사학」 제12호, 2015.12, 270면에서 재인용).

43) 유병화·박노형·박기갑, 「국제법 Ⅱ」, 법문사, 2000, 658~660면. 명순구, 앞의 논문, 228면에서 재인용.

44) 명순구, 위의 논문, 228면에서는 일본 측 자료를 인용하여 1906년부터 1911년까지의 일본군 사상자는 403명 그리고 우리 의병의 사상자 수는 21,485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토대로, 의병전쟁은 결국 무력투쟁을 수반한 것이라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45) Rudolf L. Bindschedker et al.(Advisory Board), Encyclopedia of Public International Law, Elsevier, 2000, p. 1339.

46) Ibid.

47) Ibid.

48) Ibid.

49) 명순구, 앞의 논문, 228면.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유격전술은 당시 왜군의 군사 활동에 막대한 차질을 끼치도록 하였고 이순신의 남해 수군이 연전연승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는 평가(변태섭, 「한국사통론」, 삼영사, 1997, 314면)를 고려한다면 우리의 의병은 실제적인 전쟁을 수행하였다는 분석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50) 변태섭, 위의 책, 404면.

51) 변태섭, 위의 책, 417면.

52) 당시 지방의 진위대 역시 의병에 합류하여 무력항쟁을 이어가게 된다. 이기백, 앞의 책, 400면.

53) 변태섭, 앞의 책, 417면.

54) 박성수, “1907~10년간의 의병전쟁에 대하여,” 「한국사연구」 제1호, 1968, 1면; 박성수, “1907년의 의병전쟁,” 「군사」 2, 전사편찬위원회, 1981; 김의환, “정미년(1907) 조선군대해산과 반일의병전쟁,” 「향토서울」 26,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66; 한국근대사연구논집, 1972; 강병식, “한말 군대해산 이후의 의병활동에 대한 일연구,” 「한성사학」 2, 한성대, 1964. 변태섭, 위의 책, 418면에서 재인용.

55) 변태섭, 위의 책, 418면. 즉, 의병은 일견 국제법상 군민병이라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 한일 간은 교전상태에 있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이장희, “안중근 재판에 대한 국제법적 평가,” 「외법논집」 제33권 제2호, 2009.5, 313면.

56) 변태섭, 위의 책, 418면.

57) 윤병석, “십삼도창의군의 결성,” 「사학연구」 제36권, 1983; 신용하, “전국 십삼도창의대진소의 연합의병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 독립기념관, 1987. 변태섭, 위의 책, 418면에서 재인용.

58) 특히 3·1운동 전후에 활약을 한 독립군 부대로 “국민회군, 대한독립군, 북로군정서, 서로군정서, 대한의용군, 광복군총영”등이 있었으며(변태섭, 위의 책, 465면) 이후에도 경신참변과 같은 일본군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참의부, 정의부 그리고 신민부가 조직되어 각 조직된 지역에서 민정과 더불어 군정을 실시하였고 이후에도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 등 우리의 독립 전쟁은 그 명맥을 꾸준히 유지한 바 있다. 변태섭, 위의 책, 466면.

59) 변태섭, 위의 책, 467면

60) 변태섭, 위의 책, 467면.

61) Rudolf L. et al.(Advisory Board), supra note 45, p. 1340.

62) 김태빈·우주완, 「대한국인 안중근」, 레드우드, 2019, 83면.

63) 정인섭, 「조약법강의」, 박영사, 2016, 2면.

64) 정인섭, 위의 책, 2면.

65) 김정건, 「국제법」, 박영사, 2004, 430면.

66) Malcolm N. Shaw, International Law,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 94.

67) 김정건, 앞의 책, 430면.

68) 이태진 외, 「일본의 대한제국 강점」, 까치, 1995; 이태진 등 공편, 「한국병합과 현대: 역사적 국제법적 재검토」, 태학사, 2009; 이상찬, 「1900년대 초 한일간 조약들의 불성립개론」,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2005: 근·현대편 4; 2007 「「駐韓日本公使館記錄」과 「日本外交文書」의 을사조약 관련 기록의 재검토」, 奎章閣 30; 박배근, “국제법상 시제법의 이론과 실제,” 「국제법학회논총」 제53권 제1호, 2008; 운노 후쿠쥬 지음(정재정 옮김), 「한국병합사연구」, 2008. 이상 윤대원, “ 「純宗實紀」의 고종시대 인식과 을사늑약의 외부대신 직인 ‘강탈’ 문제,” 「규장각」 제43집, 2013,12, 293면에서 재인용.

69) 이기백, 앞의 책, 394면.

70) 이기백, 위의 책, 397면(밑줄 첨가).

71) 실제로 당시 고종 황제는 을사늑약에서 한국 측 대표로 기재되어 있었던 외무대신에게 전권위임장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해 외무대신은 조약 체결권을 보유하였다고 볼 수 없었다(도시환, “을사늑약의 국제법적 문제점에 대한 재조명,” 「국제법학회논총」 제60권 제4호, 2015.12, 132면). 특히 을사늑약의 효력은 일정한 절차를 거쳐 조약체결권자인 고종 황제가 조약비준서에 서명한 후 옥새를 날인·비준하여야 발생하는 것인데 당시 황제는 마지막까지 당해 조약에 서명뿐만 아니라 옥새 날인도 하지 않았다(戶塚悅朗, “동아시아에서의 역사청산,” 「한일강제병합 100년의 역사와 과제」, 동북아역사재단, 2013, 271~290면. 도시환, 위의 논문, 132면에서 재인용).

72) 이기백, 앞의 책, 399면.

73) 日本外務省, 1958 「伊藤特派大使復命書」, 「日本外交文書」 第38卷 第1冊, 日本國際連合協會, 506면. 윤대원, 앞의 논문, 295면에서 재인용 및 직접 인용.

74) 윤대원, 위의 논문, 295면.

75) 노영돈, “을사조약의 법적 효력에 관한 연구,”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28집 제1호, 2006, 8, 58면.

76) 이태진 외, 「한국병합, 성립하지 않았다 : 일본 최고 지성지 「세카이(世界)」, 3년간의 논쟁」, 태학사, 2001, 17~25면 참조.

77) 현재는 국제연합 헌장상으로 자위권 또는 국제연합에 의한 강제조치 이외 모든 유형의 무력행사는 일반적으로 금지되고 있다. 김대순·김민서·박지현, 「국제법강의- 판례와 자료-」, 삼영사, 2010, 526~527면.

78) 당해 부전조약을 통하여 정치적인 수단으로서의 전쟁을 포기하게 되었지만 국가의 정당방위의 권리는 유보되었고, 당해 조약을 위반하는 체약국들에 대한 제재의 의무가 없어 한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용구, 「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680면.

79) Valerie Epps, International Law, Carolina Academic Press, 2001, p. 88 역시 “역사적으로 국제법은 무력행사를 금지하지 않았다. 실제로 수세기 동안 무력은 승전국이 패전국에게 자신의 바램(wishes)을 관철시키는 국가 간 분쟁(interstate disputes)을 매듭 짖는 주요한 도구(principal method) 였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80) 정인섭, 「국제법강의」, 박영사, 2010, 265면.

81) 정인섭, 위의 책, 265면.

82) 송덕수, 「신민법강의」, 박영사, 2020, 186면.

83) Valerie Epps, supra note 79, p. 88.

84) Dispatch by the French Ambassador to Berlin, M. Coulondre, as quoted in William L. Shirer, The Rise and Fall of the Third Reich 446 (1960). Ibid.에서 재인용. 특히 조약의 체결과정에서 Hácha 대통령은 기절하였고 히틀러의 주치의였던 Morell 박사가 놓은 주사에 의하여 의식을 회복하였다고 한다. Ibid.

85) 사카모토 시게키를 위시한 일본 (학계)에서는 국가원수와 대신 등 국가기관에 대한 강제를 국가에 대한 강제와 동일하다고 상정한 후 국가에 대한 강제는 무효가 될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지만, 1945년 이전에도 동의의 자유 원칙을 전제로 국가 자체에 대한 강박 역시 조약의 무효원인이 된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William Edward Hall, A Treatise on International Law, Oxford, Edited by A. Pearce Higgins, 1917, pp. 336~337; Fariborz Nozari, Unequal Treaties in International Law, S-Byran Stundt & Co., 1971, pp. 64~65; Charley Cheney Hyde, 1922, International Law-Chiefly as Interpreted and Applied by the United States, Vol. 2, Little Brown, and Company, pp. 8~9; Weinschel, Zeitschruft fur Volkerrecht , Band XV, 1930, SS. 450~462; Alfred von Verdross, Volkerrecht , Verlag von Julius Springer, 1937, SS. 87~89 참조. 도시환 앞의 논문, 139면에서 재인용). 우리는 그간 을사늑약의 효력과 관련, 조약체결의 강압성 및 불법성을 역사학적 측면에서 다루다가 이후 조약 원본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통하여 국제법적인 수준에서의 조약 성립여부에 집중한 바 있다. 도면회, “을사조약은 어떻게 기억되어 왔는가?,” 「역사와 현실」 제66권, 2007.12, 31〜32면. 을사늑약 조약 절차상의 흠결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이상찬, “쟁점 을사조약과 병합조약은 성립하지 않았다,” 「역사비평」 제31호, 1995, 228〜238면 참고.

86) 따라서 조약의 불법성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을사조약, 정미7조약 그리고 병탄조약의 불법성 여부와 상관없이 의병은 일본의 침탈을 확인한 후 자신들의 교전 행위의 정당성을 줄기차게 인식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의병들의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다. 따라서 문제는 만일 위 조약들의 합법성이 확인되면 의병의 교전행위를 정당한 행위로 상정하는 것이 어려워진다는 데에 있다. 헌법상의 쟁점인 쿠데타와 혁명 그리고 국제법적 수준의 쟁점인 정부승인과 관련한 스팀슨 주의와 에스트라다 주의에 대한 논의를 면밀히 살펴보면 더욱 그러하다. 본 논문에서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체결된 을사조약을 비롯한 조약의 성격에 대한 평가, 즉 조약의 불법성 확인에 집중한 이유이다.

87) 서정훈, 앞의 논문, 286면.

88) 즉 안중근 의사의 저격행위와 같이 역사적 해석이 분분한 사건의 경우 지금까지는 역사학과 정치학 그리고 법학 등 각 학문별로 관련 쟁점에 대한 분석이 주를 이루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건에 대한 보다 설득력 있는 다각적 분석을 위해서는 학제적 연구의 의의를 어렵지 않게 인정할 수 있다. 일례로 초실정법적인 권리이지만 미국 수정헌법 제2조에 근거한 무기소지권에 바탕을 둔 저항권 논의 역시 우리의 독립운동사와 관련하여 전개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영국에 저항한 독립혁명 시기 민간인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결성된 민병대가 미국 내 총기문화의 정착에 일조를 하였다는 평가(손영호, “미국 연방헌법 수정 제2조-무기소지권의 역사적 기원과 의미를 중심으로-,” 「역사와 담론」 제59권, 2011.8, 234면)를 고려하면 미국은 무기소지권을 근거로 하여 저항권 논의가 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규모나 성공 여부에 대한 판단에 직접적 비교 대상으로 설정하는 것에는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으로서 미국의 독립전쟁과 우리나라의 일제지배에 대한 의병 및 독립군의 저항행위를 비교법적 차원에서, 즉 역사와 법학을 중심으로 도모하는 학제적 연구 역시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역사적 연구의 객관성을 담보받기 위한 꾸준한 학제적 연구의 필요성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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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학교 법학연구원 윤리위원회는 2020년 7월 31일 발간 법학논고 제70집에 수록된 논문 『미국 영업비밀보호법(DTSA)의 주요내용 검토』(김윤정, 충북대학교 법학연구원)에 대한 제재조치를 '연구부정논문 게재 취소', '향후 3년간 투고 자격 정지'로 확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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