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며
사전적 의미에 있어 공제란 “받을 몫에서 일정한 금액이나 수량을 뺌”을 의미한다.1) ‘공제’라는 용어는 소득세법, 법인세법, 상속세 등 세법에 등장하기도, 손익상계를 할 때에도 손해액에서 이익을 공제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세법이나 손익상계 등에서 사용하는 ‘공제’는 말 그대로 사전적 의미의 표현으로 보면 될 것이다.2) 그러나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공제’는 사전적 의미의 그것이 아니라 상계와 유사한 효과를 가지고 있는 법리를 말한다. 우리나라 법에서는 공제에 관하여 일반적인 규정을 두고 있지 아니하나, 민법, 상법의 개별조문 또는 판례 등에 의하여 인정된다. 공제는 동종의 채권을 대등액에서 소멸시킨다는 점에서 상계와 매우 유사하지만, 공제와 상계를 엄격히 구분하여야 한다.
상계와 구별되는 공제를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기 어려우나, ‘대법원 1962. 4. 4. 선고 62다63 판결’은 “원고(채권자)는 1959. 12. 2.에 2,438,100환을 권면액으로 하는 채권압류와 전부명령을 받았으나 소외 회사(채무자)가 피고(제3채무자)에게 지급하여야 할 영업세와 부가세 지체상금과 하자보수금 도합 1,537,405환을 위 채권 3,000,000환 중에서 공제하면 1,462,525환이 확정적으로 원고에게 전부된다”라고 판시하였고, ‘대법원 1976. 8. 24. 선고 76다1032 판결’은 “건물임대차에 있어서의 전차보증금은 임대료는 물론이고 임차건물명도에 이르기까지의 임대차로 인한 일체의 임대인의 채권을 담보하는 것으로서 임대차 종료 후에 임차인이 이에 대한 반환청구함에는 임대건물을 임대인에게 명도할 때에 그 임대료의 체급분의 청산등3)을 필한 잔액이 있으면 이를 청구할 수 있는데 본건에 있어서 원고는 임차물인 위 다방을 피고에게 명도는 물론 이와 같은 청산을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므로 당장 임차보증금 반환청구를 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라고 판시하였다. 우리나라 법원은 오래전부터 공제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지만, 위 판결들만으로는 법원이 상계와 구분되는 공제를 인정한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이후에도 우리나라 법원은 여러 판결문에서 ‘공제’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나, 대부분의 판결들은 상계, 공제, 충당을 혼용하며 이를 구분하지 아니하였고, ‘공제’의 요건이나 효과 등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설시(說示)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법원은 ‘대법원 2007. 9. 28. 선고 2005다15598 전원합의체 판결’과 ‘대법원 2018. 1. 24. 선고 2015다69990 판결’ 등을 통해 ‘공제는 상계와 구분되고 공제에 대하여는 상계에 관한 규정이 적용되지 아니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이후 법원은 ‘대법원 2024. 8. 1. 선고 2024다227699 판결’(이하 ‘대상판결’이라 한다)에서 위 종전 판결들보다 공제의 요건과 효과 등에 관하여 세부적으로 설명하였다. 이 점에서 대상판결은 의미 있는 판결이라 할 것이다.
한편, 대상판결의 상고이유를 보면, 피고는 ‘자신이 항소심에서 공제의 항변을 하였음에도 제2심 법원이 이에 관하여 심리를 하지 아니하여 판단누락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위 피고의 상고이유에 관하여 대상판결은 “원심은 이 사건 확인서상 ‘공제 내지 상계’ 약정에 기초한 피고의 주장을 실질적으로 상계에 관한 주장으로 파악한 뒤 그 주장에 대하여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 법적 성격을 공제와 상계 중 무엇으로 보는가에 따라 채권 정산의 내용이 달라진다는 사정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원심이 피고의 주장을 상계 주장으로 보고 판단한 이상, 그 당부를 떠나 판결에 영향을 미친 판단누락이나 심리미진의 잘못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라고 판단하였다. 대상판결이 공제인지, 상계인지를 명확하게 판시하지 아니하여 공제에 관한 판례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대상판결은 공제에 의하든 상계에 의하든 결론이 달라지지 아니하므로 “판결에 영향을 미친” 판단누락의 잘못이 없다고 판단한 것일 뿐이다. 또한 대상판결이 지속적으로 ‘공제 내지 상계’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고 공제의 법리를 구체적으로 판시한 점에 비추어 볼 때 대상판결은 피고가 공제 항변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본 사안에서 피고가 공제항변을 할 수 없다면 대상판결은 ‘피고는 원심이 피고의 공제항변에 관한 판단을 누락하였다고 주장하나, 이 사건 확인서상 ’공제 내지 상계‘는 그 표현에도 불구하고 상계에 관한 합의로 보여야 하므로 피고의 주장을 상계 항변으로 본 원심 판단은 타당하다’는 취지로 판단하였을 것이다. 결국 대상판결은 공제에 관한 판례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4)
대상판결의 쟁점은 ‘수분양자가 공동주택을 분양받기 위하여 금융기관으로부터 중도금대출을 받았으나 수분양자에게 기한이익 상실 사유가 발생하여 시행사에게 사전구상금 채권과 위약금 채권이 발생한 사안에서, (i) 수분양자의 분양대금반환 채권에서 시행사의 사전구상금 채권, 위약금 채권을 공제할 수 있는지, (ii) 공제 기준시점을 기한이익 상실시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분양계약 해지시로 보아야 하는지’이다. 그러나 대상판결을 검토하다 보면 판시내용 중 공제의 요건, 공제기준 시점에 관하여 의문점이 발생한다. 이하에서는 대상판결의 사실관계와 각 심급마다의 판단을 요약하고 ‘공제’의 의의, 기능, 요건, 효과 등 일반론을 정리한 후 대상판결의 타당성을 검토하도록 하겠다.
Ⅱ. 대상판결의 요지와 경과
원고들은 아래 표와 같이 피고와 아파트(이하 ‘이 사건 각 아파트’라고 한다)분양계약(이하 ‘이 사건 각 분양계약’이라 한다)을 체결한 수분양자이고, 피고는 위 아파트를 건설하고 공급하는 사업을 하는 시행자이다. 피고는 소외 H 주식회사와 위 아파트에 관하여 관리형 토지신탁계약을 체결하였다.
원고들은 피고에게 계약금을 지급한 다음, 한국주택금융공사의 보증 하에 금융기관으로부터 중도금대출을 받아 그 대출금으로 피고에게 중도금을 납부하였다. 피고는 원고들이 금융기관으로부터 중도금대출을 받을 당시 원고들의 한국주택금융공사에 대한 구상금 채무에 대하여 연대보증을 하였다.
이후 중도금대출 만기일이 도래하여 원고들에게 기한이익 상실 사유가 발생하였고 한국주택금융공사는 원고들을 대위하여 금융기관에 중도금대출 원리금을 변제하였다. 피고는 아래와 같이 한국주택금융공사에 대하여 같은 공사가 대위변제한 돈 중 일부를 대위변제하였다.
피고는 2018. 2. 20. 원고들에게 이 사건 각 분양계약에 관한 해제통지를 하였다.
한편, 원고들과 피고는 중도금대출신청을 할 당시 아래와 같은 내용의 중도금대출신청에 따른 확인서(이하 ‘이 사건 각 확인서’라 한다)와 이 사건 각 분양계약서를 작성하였다.
원고들은 이 사건 각 분양계약서 제2조 제4항에 따라 상계적상 시점은 ‘이 사건 분양계약을 해제한 때’(2018. 2. 20.)로 보아야 하고, 위 시점을 기준으로 ‘분양대금반환 채권 및 이에 대한 이자채권’과 ‘피고들의 대위변제금 채권’을 상계하면 분양대금반환 채권이 남게 되므로, 피고는 원고들에게 그 남은 분양대금을 지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원고들은 제1심 법원의 판단에 불복하여 항소를 제기하였고 제2심에서의 원고와 피고의 주장은 제1심과 거의 동일하다.5)
제2심은 대법원 2021. 5. 7. 선고 2018다25946 판결 등 과거의 대법원 판례들의 판시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며 원칙적으로 쌍방의 채무가 모두 이행기가 도래한 때 각 당사자들은 대등액에 관하여 각 채권을 상계할 수 있고, 상계의 의사표시가 이루어지면 상계적상 시점으로 소급하여 쌍방의 채무가 소멸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제2심은 제1심과 달리 이 사건 각 확인서 제1조 제4항과 제2조는 피고의 사전구상권 행사사유와 절차적 요건을 완화한 것뿐이지 상계적상 시점을 기한이익 상실시(중도금대출 만기일)로 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제2심은 ‘피고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별도의 의사표시 없이 피고의 자동채권(사전구상금 채권)의 이행기(중도금대출 만기일)가 도래하면 자동적으로 상계된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하였다. 결국 제2심은 당사자들의 합의로 상계적상일을 변경할 수 있으나, 이 사건 각 확인서와 이 사건 각 분양계약서의 규정만으로는 기한이익 상실시(중도금대출만기일)을 상계적상일로 정한 합의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고 이에 상계적상일을 원고들의 수동채권의 이행기(이 사건 분양계약 해제일인 2018. 2. 20.)로 판단하며 원고의 청구를 인용하였다.
피고는 제2심 법원 판단에 불복하여 상고하였다. 피고는 원심이 이 사건 각 분양계약서 및 이 사건 각 확인서 관련 조항을 잘못 해석하여 상계적상일을 중도금 대출 만기일이 아닌 이 사건 각 분양계약 해제일로 판단하였고, 피고의 공제항변에 관한 판단을 누락하여 이에 관한 심리를 다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대상판결은 아래와 같이 계약자유의 원칙에 따라 당사자들은 공제 기준시점 또는 상계적상 시점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고 이 사건 각 확인서 제1조 제4항, 제2조를 해석하였을 때 원고들과 피고는 원고들의 분양대금반환 채권과 피고의 사전구상권의 공제 기준시점 또는 상계적상 시점을 ‘기한의 이익 상실시’로 정하였다고 판단하며 원심을 파기하였다.
공제는 복수 채권·채무의 상호 정산을 내용으로 하는 채권소멸 원인이라는 점에서 상계와 유사하다. 그러나 공제에는 원칙적으로 상계적상, 상계 금지나 제한, 상계의 기판력 등 상계에 관한 법률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 부동산임대차관계 등 특정 법률관계에서는 일정한 사유가 발생하면 원칙적으로 공제의 의사표시 없이도 당연히 공제가 이루어진다고 보는 점 등에서 공제는 상계와 구별된다. 또한 공제는 상계 금지나 제한과 무관하게 제3자에 우선하여 채권의 실질적 만족을 얻게 한다는 점에서 상계보다 강한 담보적 효력을 가진다. 한편 계약자유의 원칙에 따라 당사자는 강행규정에 반하지 않는 한 공제나 상계에 관한 약정을 할 수 있으므로, 공제나 상계적상 요건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공제 기준시점이나 상계적상 시점을 언제로 할 것인지, 공제나 상계의 의사표시가 별도로 필요한지 등을 자유롭게 정하여 당사자 사이에 그 효력을 발생시킬 수 있다. 또한 공제와 상계 중 무엇에 관한 약정인지는 약정의 문언과 체계, 약정의 경위와 목적, 채권들의 상호관계, 제3자의 이해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합리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라고 판시하였다.
대상판결은 “이 사건 확인서 제1조 제3항(제1, 2심 판결문에 비추어 볼 때, 제1조 제3항은 제1조 제4항의 오기 보인다), 제2조의 문언에 의하면, 원고들에게 중도금 대출에 관한 기한의 이익 상실 사유가 발생함과 동시에 대출원리금 등 일체의 금원에 대하여 피고의 사전구상권이 발생하고, 원고들은 해당 사유가 발생하는 ‘즉시’ 그 금원을 피고에게 지급하여야 하며, 피고는 ‘이와 동시에’ 원고들의 분양대금 등 반환채권에서 위 사전구상권에 기한 금원을 공제 내지 상계할 수 있다. 위 조항의 문언과 이로부터 추단되는 당사자의 의사, 이러한 조항을 둔 취지 등을 고려하면, 원고들과 피고는 이 사건 확인서에서 ‘기한의 이익 상실 시’를 공제 기준시점 내지 상계적상 시점으로 정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위 조항은 기한의 이익 상실 시점에 아직 이 사건 분양계약이 해제되지 않아 원고들의 분양대금 등 반환채권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장차 분양대금 등 반환채권이 발생하여 공제나 상계를 할 경우 그 공제 기준시점이나 상계적상 시점을 기한의 이익 상실 시점으로 보겠다는 취지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Ⅲ. 대상판결에 대한 평석
대상판결을 검토하였을 때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발생할 수 있다.
첫째, 대상판결은 이 사건 각 확인서 제1조 제4항, 제2조의 문언을 해석하였을 때 원고들과 피고는 원고들의 분양대금반환 채권과 피고의 사전구상금 채권에 관하여 공제합의를 하였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학설들 중에는 ‘공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원칙적으로 공제대상이 되는 채권들 사이에 견련관계가 필요한다’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분양대금반환 채권은 이 사건 각 분양계약서에 의하여 발생하는 채권이고, 사전구상금 채권은 대출계약서에 의하여 발생하는 채권이므로 채권 발생의 근거계약이 달라 견련관계가 없어 공제를 주장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이하에서는 공제합의를 함에 있어 위 각 채권들 사이에 견련관계가 필요한지, 견련관계가 존재하는지를 검토하겠다.
둘째, 대상판결은 시행사의 사전구상금 채권과 수분양자들의 분양대금반환 채권의 공제기준 시점을 ‘기한이익 상실시’로 판단하였다. 그런데 대상판결은 시행사의 위약금 채권과 수분양자들의 분양대금반환 채권의 공제기준 시점에 관하여 판시하지 아니하였다. 아래에서는 시행사의 사전구상금 채권과 수분양자들의 분양대금 등 반환채권의 공제기준 시점을 ‘기한이익 상실시’로 보는 것이 타당한지, 시행사의 위약금 채권과 수분양자들의 분양대금반환 채권의 공제기준 시점을 언제로 보아야 하는지를 살펴보겠다.
셋째, 대상판결은 계약자유의 원칙에 따라 당사자들이 강행규정을 위반하지 아니한 이상 공제에 관하여 약정을 하며 공제의 요건이나 공제의 기준시점 등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공제는 상계와 다르게 담보적 기능이 강하여 당사자들이 임의로 공제의 요건과 공제기준 시점 등을 정할 시 채권의 압류권자, 가압류권자, 양수인 등의 권리와 신뢰를 해할 수 있어서 위 대상판결의 판시내용에 일응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아래에서는 공제에 관한 일반론을 정리한 후 위 각 의문점들을 중심으로 대상판결의 타당성을 검토하고자 한다.
공제는 동종의 채권·채무를 대등액에서 소멸시킨다는 점에서 상계6)와 유사하다. 그러나 대법원에 의하면 공제는 상계에 관한 규정이 적용되지 아니하고7)8) 원칙적으로 별도의 의사표시가 필요하지 않다. 또한 공제는 상계와 달리 회생절차에서 제한되지 아니하고 소급효가 없다.9)
아직까지 공제에 관하여 확립된 정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10) 다만 일부 문헌들을 보면, 공제를 ① “하나의 계약관계에서 발생한 채권·채무 관계를 상호 가감하여 정산하는 것”11), ② “견련관계에 있는 양 채권을 대등액에서 소멸시키는 일방적 의사표시”12), ③“일차적으로는 뺄셈의 의미를 가지면서도 상계와 유사한 항변권”13)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대상판결이 “계약자유의 원칙에 따라 당사자는 강행규정에 반하지 않는 한 … 공제나 상계적상 요건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등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라고 판시한 점에 비추어 볼 때 대법원은 공제의 요건으로서 견련관계를 요구하고 있지 아니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대법원은 견련관계가 없는 채권들에 관한 공제합의를 인정하는 경우도 인정하고 있고 원칙적으로 공제는 별도의 의사표시가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으므로, ①, ②, ③의 정의는 대법원이 생각하는 공제의 정의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공제는 하나의 계약관계가 아니더라도 인정될 수 있으므로 ①의 정의는 부당한 것으로 보이고, 공제는 별도의 의사표시가 없더라도 이루어질 수 있어 ②, ③의 정의도 타당하지 아니한다고 생각한다. 공제는 ‘개별근거 규정이나 견련관계, 당사자들의 합의에 의하여 양 채권을 대응액에서 소멸시키는 법률적 효과 또는 일방적 의사표시’ 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공제는 소송이나 강제집행절차 등을 거치지 아니하고 당사자들의 명시적·묵시적 합의로써 채권·채무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각자의 채권을 만족을 얻는다는 점에서 사적 집행수단의 기능을 갖는다.
공제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은 담보적 기능과 우선변제적 기능이다. 변제자력이 있는 일방 당사자와 변제자력이 없는 상대방이 존재할 경우 그 일방 당사자는 상대방에게 채권을 이행하더라도 상대방으로부터 채권을 회수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 그 일방당사자는 공제를 통해 상호간의 채권을 소멸시키며 자신의 채권을 만족을 얻을 수 있고, 상대방의 다른 채권자들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별도의 절차 없이 이들보다 채권을 먼저 회수할 수 있는 효과를 얻는다. 상계도 이와 유사한 담보적 기능이 있다고 할 것이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공제는 상계보다 담보적 기능이 더 강하다.
첫째 상계는 상계의 의사표시를 하여야 효력이 발생하나 공제는 원칙적으로 별도의 의사표시 없이 이루어진다.14)
둘째 공제에 대하여는 민법 제496-498조의 규정이 적용되지 아니한다.15)
셋째 상계의 경우 수동채권에 대하여 압류 및 가압류가 이루어지면, 제3채무자가 압류채권자에게 상계로써 대항하기 위해서는, 압류 결정문이 채무자에게 도달할 당시에 양 채권이 상계적상의 상태에 있거나, 반대채권(자동채권)의 변제기가 피압류채권(수동채권)의 변제기와 동일하거나 그보다 앞서야 한다.16) 그러나 공제는 압류 및 가압류의 효력발생 당시 자동채권이 성립하였는지 여부나 자동채권의 변제기 및 피압류채권의 변제기의 선후와 관련 없이 효력이 발생한다.17)
넷째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공제는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권도 자동채권이 될 수 있다. 물론 상계의 경우에도 소멸시효가 완성되어 소멸한 자동채권이 소멸시효가 완성되기 전부터 수동채권과 상계적상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면 채권자는 상계를 주장할 수 있다(민법 제495조). 그러나 공제는 자동채권이 소멸시효가 완성될 당시에 상계적상에 있지 않더라도 이루어질 수 있어 상계와 차이가 있다.18)
다섯째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 제145조에 따라 회생절차가 개시한 후 상계권이 제한되나 공제는 위 규정을 적용받지 아니하여 회생절차가 이루어지더라도 공제가 이루어질 수 있다.19)
위와 같이 공제는 상계보다 담보적 기능이 더 강하므로 거래의 안전과 압류채권자, 가압류채권자, 채권양수인 등 제3자의 권리와 신뢰를 해칠 가능성이 있다.
상계와 달리 우리나라 법에는 공제에 관한 일반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다만 민법 제315조(전세권자의 손해배상책임), 민법 제727조(종신정기금계약의 해제), 상법 제677조(보험료체납과 보상액의 공제), 근로기준법 제43조(임금 지급), 이자제한법 제3조(이자의 사전공제), 사립학교교직원 연금법 제39조의2(미납금의 제공지급) 등 여러 법률에서 공제에 관한 개별규정을 찾을 수 있다.20) 상기와 같이 공제에 관한 개별규정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채권자는 해당 규정을 근거로 하여 공제 항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전세권자의 귀책사유로 전세목적물의 전부 또는 일부가 멸실되어 전세권이 소멸한 경우 전세권설정자는 민법 제315조 제2항에 근거하여 전세금에서 손해액을 충당하고 남는 것이 있으면 그 나머지를 전세권자에게 반환할 수 있다. 본 규정에서는 충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으나, 일반적으로 충당이란 “모자라는 것을 채워 메운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고 이 경우는 전세금채권과 손해배상채권을 대등액에서 소멸시킨다는 의미의 공제가 더 정확하다고 할 것이다.21) 결국 민법 제315조 제2항은 본고에서 검토하고자 하는 공제에 관한 규정에 해당한다.
정기금채무자가 정기금채무의 원본22)을 받는 유상 종신정기금계약의 경우, 정기금채무자가 정기금 지급 의무를 불이행하면 정기금채권자는 종신정기금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 종신정기금계약이 해제되면 정기금채무자는 정기금채권자에게 정기금채무의 원본을 반환하고 정기금채권자는 정기금채무자에게 기존에 받은 정기금을 반환하여야 한다. 민법 제548조가 적용되는 일반적인 원상회복 관계로 본다면 정기금채권자와 정기금채무자는 각자가 받은 금전 기타 재산 등에 대한 이자도 반환하여야 할 것이지만 정기금채무자의 귀책사유로 정기금계약이 해제된 상황에서 정기금채무자가 정기금채권자로부터 정기금의 이자를 받을 수 있다면 형평에 맞지 않게 된다. 이에 민법 제727조 제1항은 민법 제548조의 특례로서 정기금채권자로 하여금 정기금의 이자를 반환하지 않아도 되고 정기금채무자에게 반환하여야 할 정기금에서 정기금채무의 원본의 이자를 공제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이다.23) 민법 제727조 제1항도 정기금채권자가 정기금채권과 정기금채무의 원본의 이자채권을 대등액에서 소멸시킬 수 있는 공제에 관한 규정이라 할 것이다.
보험계약에서 보험계약자의 보험료 지급의무와 보험자의 보험금 지급의무는 상호 대가관계에 있으나24) 보험자는 다른 약정이 없는 한 보험계약자로부터 최초의 보험료를 받은 때로부터 책임이 발생하고(상법 제656조), 보험자의 책임이 발생한 이후 보험사고가 발생하면 보험계약자가 보험료를 체납하였더라도 보험자는 보험계약자에게 보험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 대신 보험계약자가 체납한 보험료가 존재하면, 보험자는 상법 제677조에 근거하여 보험계약자에게 지급할 보험금에서 미지급 보험료를 공제할 수 있다.
근로기준법 제43조 제1항에 의하면 임금은 직접 근로자에게 그 전액을 지급하여야 하므로, 사용자가 임의로 근로자에게 지급하여야 할 임금 중 일부를 공제하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다. 다만 법령 또는 단체협약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 사용자는 근로자에게 임금의 일부를 공제하여 지급할 수 있다.25) 법령에서 공제할 수 있는 것으로는 근로소득세, 국민건강보험 보험료, 국민연금 보험료 등이 있고26) 단체협약에 따라 공제할 수 있는 것은 택시운송종사자의 운송수입금 부족액27), 사고피해변상절차에 의한 변상판정금28) 등이 있다. 이런 경우도 근로자들이 부담하여야 할 채무액과 사용자가 지급하여야 할 채무액이 대등액에서 소멸하는 공제에 해당한다.
계약자유의 원칙상 선이자 공제 약정은 강행법규 위반 등의 무효 사유가 있지 않은 이상 당사자가 약정한 대로의 효력이 인정된다.29) 그러나 채권자가 공제한 선이자가 이자제한법 제2조 제1항에서 정한 최고이자율을 초과하는 경우 그 초과부분은 강행규정에 위반되어 무효이므로 채권자는 채무자에게 초과부분의 이자를 부당이득으로 반환하여야 할 것인데, 이자제한법 제3조는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초과부분의 이자를 반환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원금에서 초과부분의 이자를 공제하도록 규정한 것이다.30)
사립학교교직원 연금법 제39조의2 제1항은 공단이 교직원 등이 사망하여 교직원 등에게 퇴직급여 등을 지급할 사유가 발생한 경우 그 퇴직급여 등에서 교직원 등이 납부하여야 할 미납금 등 채무를 공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법에는 공제에 관한 일반규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여러 법률에서는 개별규정을 두며 공제 자체를 인정하고 있어 상계와 구분되는 공제라는 법리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을 것이고 오히려 이를 부인할 근거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공제에 관한 개별규정이 없는 경우에도 공제를 인정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문헌은 확인되지 아니하여 실제 학자들의 의견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견해가 나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먼저 개별규정에 근거하지 아니하면 공제를 인정하여서는 안 된다는 견해(부정설)가 있을 수 있다. 이 견해는 공제의 경우 원칙적으로 상계에 관한 규정이 적용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상계보다 더 강한 담보적 기능을 가지고 있어 채권자평등의 원칙, 거래의 안전과 제3자의 권리, 신뢰를 침해할 수 있으므로 이를 제한하여야 한다는 점, 공제가 아니더라도 상계를 통해 당사자들은 충분히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채권·채무관계를 소멸 또는 정리할 수 있다는 점, 개별규정이 존재하는 이유는 입법자가 그러한 경우에 한하여 공제를 인정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아야 한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당사자들의 공제합의가 있을 시 공제를 인정하자는 견해(긍정설)이다. 이 견해는 근대민법의 3원칙 중 하나인 사적자치의 원칙과 이에 파생되는 계약자유의 원칙에 따라 당사자들이 공제합의를 할 경우 그 효력을 인정하여야 하고, 강행규정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당사자들의 공제합의의 효력을 부정하거나 제한할 이유나 규정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당사자들의 합의에 의한 공제를 인정하되, 견련관계나 밀접한 계약관계가 있는 경우에 한하여 인정하자는 견해(제한적 긍정설)이다. 이 견해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절충적인 입장으로서 사적자치의 원칙과 채권자평등의 원칙, 거래의 안전, 제3자 권리 침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견해이다.
개인적으로 개별규정이나 견련관계가 있는 경우뿐만 아니라 견련관계가 없더라도 공제합의가 있는 경우 공제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공제합의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법률상 금지되거나 강행규정에 위반된다고 할 수 없으므로 원칙적으로 법률상 유효하다고 할 것이고 계약자유의 원칙상 허용된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견련관계가 없음에도 무제한적으로 공제합의를 인정한다면 상계를 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위 공제합의를 악용하여 채권의 소멸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개별규정이나 견련관계가 없는 경우 공제대상이 되는 채권에 관하여 가압류권자, 압류권자, 양수자 등 이해관계인이 존재한다면,이해관계인들로서는 견련관계가 없는 양 채권의 소멸을 예상하기 어려우므로 공제합의의 당사자들은 이해관계인에게 공제합의의 존재를 이유로 대항할 수 없다고 하여야 한다.
공제는 대외적으로 공시가 되지 아니하므로 어느 채권을 압류 또는 가압류하거나 양수한 이해관계인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공제합의로 인하여 채권이 소멸할 수 있다는 불안에 떨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채권양도나 채권을 담보로 한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공제는 상계와 유사하여 가장 많이 비교된다. 공제의 요건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상계의 요건과 비교하고자 한다. 상계의 경우 원칙적으로 채권자와 채무자 쌍방이 서로 대립하는 채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채권자의 자동채권은 채무자에 대한 것이어야 하고, 마찬가지로 채무자의 수동채권은 채권자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다만 예외적으로 연대채무와 보증채무의 경우를 들 수 있다. A, B가 C에 대하여 연대채무를 부담하는 경우 A가 C에 대하여 자동채권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더라도 A는 B의 부담부분 범위 내에서 B의 C에 대한 채권을 자동채권으로 상계권을 행사할 수 있다(민법 제418조 제2항). A가 주채무자로서, B가 보증인으로서 C에 대하여 각 채무를 부담하고 있는 경우 보증인 B는 주채무자 A의 C에 대한 채권을 자동채권으로 하여 상계를 주장할 수 있다(민법 제434조).
반면 공제의 경우 양 당사자 사이에 대립하는 채권이 존재할 필요는 없고 양 채권이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예를 들어 임대차계약에 있어 임대차계약이 존속하던 중 임대인이 차임채권을 제3자에게 양도하였다고 하더라도 임대차계약 종료시 별도의 의사표시 없이 양도된 차임이 보증금에서 당연히 공제된다.31) 이는 ‘임차인의 채무를 담보하는 임대차보증금의 법적 성격’과 ‘임대차보증금 채권과 차임 채권 사이의 견련관계’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채권 간에 견련관계가 없는 경우 채권의 귀속주체가 다른 상황에서 합의에 의한 공제는 제한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각 채권이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계약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임에도 채권자, 채무자, 제3자가 ‘추후 제3자의 채권자에 대한 채권이 발생할 시 그 제3자의 채권을 자동채권으로 하여 채권자의 채무자에 대한 채권을 공제한다는 합의’를 하는 상황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이러한 합의가 존재한다면 제3자의 채권이나 채권자의 채권에 관하여 이해관계를 가지는 자(채권압류권자, 채권가압류권자, 채권양수인 등)들의 권리를 해칠 수 있으므로 견련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상기한 바와 같이 공제합의의 당사자들은 위 공제의 합의를 이유로 이해관계인에 대하여는 대항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공제에 대하여 민법 제418조 제2항, 제434조를 유추적용하여 연대채무자나 보증인이 다른 연대채무자나 주채무자의 채권을 자동채권으로 하여 채권자에게 공제를 주장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부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공제는 원칙적으로 별도의 의사표시 없이 당연히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연대채무자나 보증인이 연대채무자, 주채무자의 채권을 자동채권으로 하여 채권자에 대하여 공제에 관한 권리를 대신 행사할 여지가 없다. 가사 예외적으로 별도의 의사표시가 있어야 공제가 이루어지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민법 제418조 제2항, 제434조를 유추적용할 수 없다. 공제를 인정하는 개별규정(민법 제315조, 민법 제727조, 상법 제677조, 근로기준법 제43조, 이자제한법 제3조, 사립학교교직원 연금법 제39조의2 등)들을 살펴보면, 민법 제418조 제2항, 제434조을 준용한다는 규정이 없다. 법적 근거가 없음에도 연대채무자나 보증인이 임의로 다른 연대채무자나 주채무자의 채권을 자동채권으로 공제할 수 있다면 다른 연대채무자나 채무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위 채권이 소멸하게 되므로 이들의 권리를 침해하여 부당하기 때문이다. 결국 연대채무자나 보증채무자는 다른 연대채무자 또는 주채무자의 채권으로 공제주장을 할 수 없고 단지 공제에 의하여 다른 연대채무자 또는 주채무자의 채권과 채권자의 채권이 소멸하였다고 항변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공제는 쌍방의 채권을 대등액에서 소멸시킨다는 점에서 상계와 동일하므로 공제의 대상이되는 채권들은 동종의 채권이어야 한다. 금전채권 간 공제가 대부분이기는 하나 쌀, 사과, 맥주, 기름 등 같은 종류의 종류채권끼리도 공제가 가능할 것이다. 상계에 관한 오래된 판결이기는 하나 대법원 1960. 2. 18 선고 4291민상424 판결은 “동채권은 금전급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인즉 백미 급부를 목적으로 하는 원고의 본소 청구채권에 대하여는 상쇄 적격이 없으므로 위 의사표시에 의하여 상쇄의 효력이 발생할 수 없을 것이니”라고 판시하며 다른 종류의 종류채권간 상계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는 공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다.
공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양 채권간의 고도의 견련관계가 필요한지에 관하여 판례의 입장은 명확하지 않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대상판결은 공제합의와 상계합의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양 채권의 상호관계’를 하나의 고려사항으로 보고 있기는 하나, 직접적으로 견련관계가 공제의 요건이라고 판시하지는 않고 있다.
이에 반하여 대부분의 견해는 공제의 요건으로 견련관계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32) 그러나 견련관계의 정의가 무엇인지 확립되어 있지 않다.33) 견련관계가 필요하다는 보는 학자 중 한 분은 견련관계를 “양 채권 사이에 존재하는 특별한 어떠한 관계”라고 정의하며, 선급관계, 대가관계, 원상회복관계 등으로 유형을 나누어 논한 바 있다.34)
상기한 바와 같이 계약자유의 원칙상 견련관계가 없더라도 합의에 의한 공제도 인정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견련관계가 없는 공제합의가 이루어진 경우 합의당사자들은 이해관계인에게 위 공제합의를 이유로 대항할 수 없다고 할 것이므로 이해관계인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견련관계는 필요하다. 개인적으로는 ‘위 견련관계에 관한 정의’와 ‘견련관계를 선급관계, 대가관계, 원상회복관계 등 유형으로 나누는 방법’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아래에서는 각 유형별로 공제를 인정한 판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선급관계는 대표적으로 공사선급금과 미지급공사대금의 관계, 물품대금선급금과 미지급물품대금의 관계를 들 수 있다.
도급인과 수급인이 공사도급계약을 체결할 경우, 일반적으로 도급인은 수급인이 자재확보, 노임지급 등에 어려움이 없이 공사를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수급인에게 선급금(또는 선금)을 지급하고 있다.35) 다수의 공사도급계약서를 보면, 선급금은 공사대금에 대한 일정비율로 정해지고 기성비율에 따라 선급금을 정산하며, 선급금의 용도를 자재구입 및 노임지급 등 해당 공사를 위한 비용 지급으로 한정하기도 한다. 또한 공사도급계약서에는 공사가 진행되는 도중 공사도급계약이 해지되거나 수급인이 용도를 위반하여 선급금을 사용한 경우 도급인이 수급인에게 선급금 반환 청구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 경우 도급인의 선급금 반환 청구시까지 도급인이 수급인에게 지급하지 못한 기성금이 있으면 선급금에서 그 미지급 기성금을 우선 공제하고, 공제 후에도 선급금이 남으면 수급인은 도급인에게 그 남은 선급금을 반환하여야 한다.36)
수급인이 정해진 용도가 아닌 다른 용도로 선급금을 사용하였고, 이에 도급인이 수급인에게 선급금의 반환을 요청하였으나 수급인이 선급금을 반환하지 아니하여 도급인이 선급금반환채무의 보증인인 건설공제조합에 선급금반환보증금을 청구한 사안에서, 대법원 1997. 12. 12. 선고 97다5060 판결은 ‘수급인이 하도급을 주었는지 여부와 관계 없이 도급인이 지급한 선급금은 별도의 의사표시 없이 기성고에 당연 충당된다’고 판단하였다.
매도인과 매수인이 물품구매기본계약을 체결함에 있어 지원자금 명목으로 선급금을 지급하면서 장차 이를 물품대금과 분할 상계처리하기로 약정한 사안에서, 대법원 1997. 5. 23. 선고 96다41625 판결은 “선급금상환채무와 물품대금채무는 동일한 물품구매기본계약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상호 그 이행에 있어서 고도의 견련성이 있으므로 위 선급금은 원칙적으로 을이 납품한 물품대금에 당연히 충당되는 성질의 것이라 할 것”이라고 판시하였다. 위 대법원 판결은 선급금의 성격과 위 채권들 간의 고도의 견련성을 고려하여 별도의 의사표시 없이 물품대금 채권에서 선급금 채권이 당연공제된다고 판단하였다.
위와 같이 법원은 선급관계가 있는 채권들 사이에는 견련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고, 이에 관하여 공제합의가 있으면 별도의 의사표시 없이 당연공제된다고 판단하였다.
대가관계는 당사자 일방이 상대방에게 금전 등 일정한 급부를 이행하는 대가로 상대방으로부터 동종의 급부를 제공받는 관계를 말한다. 대표적으로 ‘보험계약에서 보험계약자의 보험료 지급의무와 보험자의 보험금 지급의무’, ‘사립학교교직원의 공단에 대한 채무와 공단의 퇴직급여ㆍ퇴직유족급여ㆍ재해유족급여 또는 퇴직수당 지급 의무’ 등을 들 수 있다. 위 대가관계에서의 공제는 상법 제677조(보험료체납과 보상액의 공제), 사립학교교직원 연금법 제39조의2(미납금의 제공지급) 등 개별 근거규정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한편, 조합원의 공동수급체(조합)에 대한 출자의무와 공동수급체의 이익분배의무가 대가관계로서 견련관계가 있는지 여부가 문제가 된 바가 있는데, 대법원 2018. 1. 24. 선고 2015다69990 판결은 조합원의 이익분배 청구권과 공동수급체의 출자금 청구권은 별개의 권리·의무라고 보이므로 원칙적으로 이익분대금에서 조합원이 지급하지 아니한 출자금을 공제할 수 없고 위 두 채권이 상계적상의 상황에 있으면 민법에 따라 대등액에서 상계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위 대법원 판결은 조합원의 출자의무와 공동수급체의 이익분배금 지급 의무의 견련관계를 부정한 것으로 보인다.
담보관계는 당사자 일방이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무 이행을 담보하기 위하여 일정한 금원 등을 제공하였으나 그 당사자 일방이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하여 담보로 제공한 금원 등에서 당사자 일방이 이행하지 아니한 채무를 공제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대표적으로 전세금과 임대차보증금을 들 수 있다. 전세금의 경우 민법 제315조에서 명시적으로 전세금의 공제를 규정하고 있다.
반면에 임대차는 당사자 일방이 상대방에게 목적물을 사용, 수익하게 할 것을 약정하고 상대방이 이에 대하여 차임을 지급할 것을 약정하여 성립하는 계약으로서 전세권과 달리 임대차보증금이 필수적인 사항이 아니다. 또한 민법이나 주택임대차보호법,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에는 임대차보증금과 차임 등 채무의 공제에 관한 규정이 없다. 그럼에도 대법원은 임차인이 임대인에게 지급하는 임대차보증금은 임차인의 모든 채무를 담보하기 위하여 지급되는 것이므로 임대차관계가 종료하여 임대차목적물이 반환될 때 별도의 의사표시 없이 임대차보증금에서 임차인의 모든 채무가 공제된다고 판단하였다.37) 대법원은 임대차보증금의 담보적 성격과 임대차계약의 관례 등을 고려하여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에 묵시적으로 보증금과 임차인의 채무에 관한 공제합의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보험계약자는 보험계약상 보험환급금 범위 내에서 보험회사에 대출을 신청할 수 있는데, 대법원은 대출금이 보험금이나 보험환급금의 선급금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보험계약자가 대출금을 변제하지 못할 시 보험회사는 보험금이나 보험환급금에서 대출금을 공제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38) 개인적으로는 보험계약자가 보험금 또는 보험환급금을 기초로 그 범위 내에서 보험회사로부터 대출금을 받았다는 점에서 보험환급금과 대출금 사이에 견련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보험금 또는 보험환급금은 위 대출금의 담보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위 두 채권 간에는 선급관계가 아니라 담보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원상회복관계는 계약이 무효, 취소, 해제가 되어 당사자들이 상호간에 수령한 급여를 반환하여야 하는 경우에 인정되는 견련관계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유상 종신정기금계약이 해제되는 경우 정기금채권자는 민법 제727조 제1항에 근거하여 정기금에서 원본의 이자를 공제한 금원을 반환할 수 있는데, 이 경우가 원상회복관계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대법원 1997. 5. 23. 선고 96다41625 판결은 “선급금상환채무와 물품대금채무는 동일한 물품구매기본계약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상호 그 이행에 있어서 고도의 견련성이 있으므로” 위 선급금은 물품대금에서 당연공제하여야 한다고 하며 공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치 고도의 견련성을 요구되는 것처럼 판시하였다.
그런데 최근 대상판결은 “계약자유의 원칙에 따라 당사자는 강행규정에 반하지 않는 한 … 공제나 상계적상 요건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 등을 자유롭게 정하여 당사자 사이에 그 효력을 발생시킬 수 있다.”라고 판시하였다. 이 부분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자면 계약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의사로 공제의 요건으로 견련관계(또는 견련성)를 배제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대상판결은 “공제와 상계 중 무엇에 관한 약정인지는 약정의 문언과 체계, 약정의 경위와 목적, 채권들의 상호관계, 제3자의 이해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합리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라고도 판단하며 공제와 상계를 구분하기 위한 기준으로 채권들의 상호관계, 제3자의 이해관계를 제시하였다. 즉. 대상판결에 의하면 약정의 내용이 공제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상계에 해당하는지가 불분명한 경우 채권들의 상호관계(견련관계) 유무, 제3자에게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하여 공제 또는 상계로 해석하여야 한다. 상계는 원칙적으로 상호관계나 견련관계를 요건으로 하고 있지 아니하므로 상호관계나 견련관계가 있다면 공제로 보아야 할 것이고, 해당 합의가 제3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적을수록 공제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 대법원 판례 중 견련관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당사자들의 합의로서 공제를 할 수 있다고 본 사례도 존재하는데 이를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첫 번째는 임대차보증금에서 임대차계약과는 관련이 없는 채무를 공제할 수 있는지 여부가 문제된 판례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임차인 A, B, C는 공동으로 임대인 D와 임대차계약을 체결한 후 임차인 A 명의로 식당을 운영하였는데, 임차인 3명 전원이 아닌 임차인 A와 임대인 D만이 ‘임대차보증금에서 연체차임, 임차인 A의 식당 운영상 채무와 임금채무 중 임대인 D가 인수한 일부 채무, 임대인 D가 임차인 A에게 대여해 준 식당운영자금 등을 공제하는 합의’를 하였다. 이에 관하여 대법원 2023. 3. 30. 선고 2021다264253 판결은 ”이 사건 임대차계약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소외 1(임차인 A)의 이 사건 식당 운영에 관한 채무는, … (당사자들 사이에) 별도의 합의가 없는 한 이 사건 임대차보증금으로 담보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그런데 이 사건 공제합의는 불가분채권자의 1인인 소외 1이 다른 불가분채권자인 원고들(임차인 B, C)의 관여 없이 혼자서 피고와 합의한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그 효력이 원고들에게 미치지 않는다.“라고 판시하였다. 위 대법원 판결은 나머지 임차인 B, C가 공제합의에 관여하지 아니하여 임차인 B, C에 대하여 공제합의의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고 판시하였다. 위 판결을 반대해석하면 만약 임차인 B, C도 위 공제합의에 관여하였다면 임대차계약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식당 운영 채무라고 하더라도 임대차보증금에서 이를 공제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두 번째는 앞서 인용한 대법원 2018. 1. 24. 선고 2015다69990 판결이다. 위 판결은 원칙적으로 ‘조합원의 공동수급체(조합)에 대한 출자의무’와 ‘공동수급체의 조합원에 대한 이익분배의무’ 사이에 견련관계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다만 위 판결은 ‘예외적으로 계약자유의 원칙상 공동수급체들이 이익분배의무와 출자의무를 연계시키는 특약을 체결할 수 있고, 이익분배금에서 출자금 및 이에 대한 지연이자를 공제하는 약정도 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만약 당사자들 간의 공제합의가 있으면 견련관계가 없는 이익분대금와 출자금을 공제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세 번째는 대법원 2023. 6. 1. 선고 2022다252417 판결이다. 위 사안에서, 원고는 ‘원고가 조합원 지위를 상실하였으므로 지역주택조합은 원고에게 분담금을 반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지역주택조합은 ‘설령 지역주택조합이 분담금을 반환할 의무를 부담한다고 하더라도 조합규약 제12조 제2항 제4호에 따라 분담금에서 업무대행비가 공제되어야 한다’고 항변하였다. 피고 지역주택조합 규약 제12조 제2항 제4호는 ‘조합원 자격을 상실할 시 기존에 납부한 분담금에서 공동부담금을 공제한 남은 금액을 무이자로 지급한다. 공제할 공동 부담금과 반환 시기에 관하여는 조합원 총회의 의결로써 정할 수 있다. 업무대행비는 반환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위 대법원은 ‘위 조합규약 제12조 제2항 제4항에 의하여 원고는 피고 지역주택조합이 실제 사용하였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업무대행비를 반환받을 수 없다’고 하며 분담금에서 업무대행비를 공제하여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지역주택조합은 조합원들로부터 수령한 분담금으로 재원을 마련하여 지역주택사업에 필요한 비용을 지출한다. 조합원의 분담금반환채권은 조합계약이 해제됨으로 인하여 발생한 채권임에 반해 지역주택조합의 업무대행비는 지역주택조합이 조합원으로부터 수령한 분담금으로 지출한 비용에 불과하다. 두 금원 사이에는 선급관계, 대가관계, 담보관계 원상회복관계 등 견련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더군다나 위 대법원 판례에 의하면 지역주택조합이 실제 업무대행비를 사용하였는지 여부와 관련없이 공제가 된다. 즉 위 대법원 판례도 견련관계가 없는 금원이라고 하더라도 비법인사단의 정관 내지 규약(조합원들의 합의)을 근거하여 공제할 수 있다고 판단한 사례라 할 것이다.
공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의사표시가 필요한지 여부에 관한 판례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종전 대법원 판례들은 ‘원칙적으로 당사자들의 특별한 의사표시가 없더라도 공제는 당연히 이루어진다’고 판단하였다.39) 다만 임대차 계약에 관한 사안에서, 대법원은 ‘임대차계약 종료하기 전에는 임차인이 차임을 연체하였다고 하여 보증금에서 연체차임이 당연공제되는 것은 아니고 임대인이 임차인에게 공제의 의사표시를 하여야 보증금에서 연체차임을 공제된다’고 판단한 바 있다.40) 이는 수동채권(보증금반환채권)의 이행기가 도래하지 않는 상황에서 임대인이 자신의 선택에 따라 기한의 이익을 포기하고 보증금에서 연체차임을 공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대상판결은 원칙적으로 공제는 상계와 달리 별도의 의사표시가 없더라도 당연히 이루어지지만, 당사자들의 합의로써 공제의 의사표시 유무를 결정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정리하자면 대법원 판결에 의하면 원칙적으로 공제는 별도의 의사표시가 필요 없이 당연히 이루어진다. 예외적으로 당사자들의 합의로 의사표시가 필요하다고 정한 경우, 수동채권의 이행기가 도래하기 전인 경우에는 공제의 의사표시를 하여야 공제의 효력이 발생한다.
공제의 의사표시가 필요한지 여부에 관한 논의의 실익은 공제의 효력 발생 시점과 관련있다. 별도의 의사표시가 없이 공제가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개별규정이나 약정에 따라 그 공제가 이루어지기로 한 시점에 효과가 발생할 것이다. 이에 반해 공제의 의사표시가 필요한 경우에는 그 의사표시가 상대방에게 도달한 때 공제의 효력이 발생한다. 공제는 상계와 다르게 소급효가 없으므로, 공제의 효력이 발생한 시점까지 이자가 발생한다. 이에 공제로 소멸하는 양 채권 간 이자율이나 지연이자율이 다르면 공제시점에 의해 누군가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해질 수 있다.
한편, 상계의 경우 그 상계권의 행사가 상계 제도의 목적이나 기능을 일탈하거나 법적으로 보호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경우에는 권리의 남용에 해당할 수 있다.41) 그러나 의사표시가 필요없이 공제가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공제합의가 권리의 남용에 해당하는지는 별론으로 하고, 그 공제합의에 의하여 발생하는 공제 자체는 법률행위가 아니므로 권리남용에 해당할 여지가 없다고 할 것이다. 다만, 별도의 의사표시가 없이 공제가 이루어지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민사소송의 변론주의 특성상 당사자가 공제의 주장을 하여야 법원은 이를 판단할 수 있다.42) 별도의 의사표시 없이 공제가 이루어지는 사안에서 당사자가 공제와 상계를 모두 주장하였다면, 법원은 먼저 공제에 대한 판단을 한 뒤 공제의 주장이 인정되지 아니할 시 상계에 대한 판단을 하여야 할 것이다.43)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공제가 이루어지면 공제의 대상이 되는 양 채권은 대등액에서 소멸하게 된다. 공제는 소급효가 없으므로 공제가 이루어지는 시점까지는 양 채권에 대한 이자가 발생한다. 별도의 의사표시가 필요 없는 공제의 경우 개별규정이나 공제합의에 따라 공제가 이루어지는 시점에, 의사표시가 필요한 공제는 그 의사표시가 도달한 때 각 효력이 발생한다.
공제대상이 되는 채권이 제3자에게 양도되는 경우에도 공제가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임대차계약에 있어 임차인이 대항력을 갖춘 뒤 임대인이 제3자에게 임대차목적물을 매도하면 새로운 소유자인 매수인이 임대인의 지위와 보증금반환채무를 승계한다. 이때 매수인은 임대차보증금에서 자신이 승계한 이후에 발생한 연체차임뿐만 아니라 승계하기 전 발생한 연체차임도 공제할 수 있다.44) 또한 임대인이 차임채권을 제3자에게 양도하는 경우, 제3자가 차임채권에 대하여 압류·추심명령을 받은 경우에도 임대차계약이 종료할 시 임대차보증금에서 그 차임은 당연공제된다.45) 다만 여기서 임대차계약 종료시와 임대차계약 종료 전을 구분하여야 한다. 대법원은 임대인이 제3자에게 차임채권을 양도하였다면, 임대인은 임대차계약이 종료하기 전 임차인에 대한 의사표시로 임대차보증금에서 위 양도한 차임 채권을 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46) 위 대법원 판결은 임대인이 제3자에게 차임 채권을 양도하는 순간 그 양도한 차임에 대하여는 공제할 권리가 없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임대차계약 종료 전과 종료 후를 구분하여서 달리 판단한 이유를 생각해보면, 아마 대법원은 임대차계약 종료 전에는 임대차보증금반환채권의 이행기가 도래하지 아니하여 임차인에게는 공제의 권리가 없고, 임대인에게는 기한이익을 포기하고 공제할 권리가 있다고 본 것으로 사료된다,47) 그런데 임대인이 제3자에게 차임채권을 양도하는 행위는 스스로 그 차임채권에 대한 공제권리를 포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임대차계약이 종료한 후에는 임대차보증금반환채권의 이행기가 도래하게 되어 임차인에게도 공제의 권리와 그 권리를 누릴 이익이 있고 임차인으로서는 임대차보증금에서 자신이 미지급한 일체의 채무가 공제될 것으로 신뢰하였을 것이므로 그 신뢰를 보호하기 위하여 임대차보증금에서 양도된 차임채권도 공제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대상판결의 경우 원고인 수분양자들은 한국주택금융공사의 보증 하에 각 금융기관으로부터 중도금대출을 받았고, 피고인 시행사는 수분양자들의 한국주택금융공사에 대한 구상채무에 대하여 연대보증하였다. 대상판결의 공제대상이 되는 채권은 수분양자들이 반환받아야 분양대금과 시행사의 사전구상금, 위약금이다. 위 분양대금채권은 수분양자에게, 사전구상금 채권과 위약금 채권은 분양자에게 각 귀속되어 존재하고 위 모든 채권은 금전채권으로서 동일하다. 공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견련관계가 필요한지 여부에 관하여는 견해가 나뉘나 견련관계가 없더라도 합의에 의한 공제가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본건의 경우 원고와 수분양자들은 이 사건 각 합의서를 통해 공제합의를 한 것으로 보이므로 피고는 공제 항변을 할 수 있다.
다만 견련관계가 없는 경우 공제합의의 당사자들은 이해관계인에게 대항할 수 없다고 할 것이므로, 분양대금반환 채권, 위약금 채권, 사전구상금 채권 사이의 견련관계를 검토하고자 한다.
먼저, 위 각 채권 중 분양대금반환 채권과 위약금 채권 사이에 견련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면, 두 채권은 공통적으로 분양계약이 해제되어야 발생하는 채권이고 분양대금과 위약금은 분양계약 해제에 따른 정산과정에서 상호간 주고받아야 할 금원이므로 견련관계(원상회복 관계)가 인정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사전구상금 채권은 대출계약(또는 이에 부속하여 체결한 보증계약), 이 사건 각 확인서(중도금대출신청에 따른 확인서)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이고 위 대출계약, 이 사건 각 확인서는 분양계약과 구분되는 별개의 계약이다. 이에 분양대금반환 채권과 사전구상금 채권 사이에 견련관계를 인정할 수 있는지 의문일 수 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로 두 채권의 견련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아파트 분양이 이루어지면, 통상적으로 위 대상판결의 사안과 같이 수분양자들은 시행사에서 주선한 금융기관과 중도금대출계약을 체결하여 그 대출금으로 중도금을 납부하고 위 중도금대출채무에 대하여 한국주택금융공사나 주택도시보증공사가 보증을 한다. 그런데 수분양자들이 공동주택을 분양받기 전 분양계약이 해제되면 그 분양계약을 전제로 이루어진 중도금대출도 해제가 된다. 이때 한국주택금융공사나 주택도시보증공사는 수분양자들을 대위하여 중도금대출채무를 변제한다. 한국주택금융공사나 주택도시보증공사는 위 대위변제로 발생할 구상금채권을 담보받기 위하여 보증계약을 체결할 당시 시행사로 하여금 구상금채권에 대하여 연대보증을 하게 하고, 수분양자들로부터는 시행사에 대한 중도금반환채권을 담보로서 양수받거나 위 채권에 대하여 질권을 설정한다.
위와 같이 수분양자들이 중대금대출을 받는 과정에서 시행사가 한국주택금융공사나 주택보증공사의 구상금 채권에 대하여 연대보증하는 절차는 사실상 관습처럼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위 절차를 통해 받은 중도금대출로 분양대금이 지급된다는 점, 중도금대출계약이 분양계약을 전제로 이루어진다는 점, 분양계약이 해제되면 중도금대출계약도 해제되는 관계에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두 계약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할 것이고, 수분양자들의 분양대금반환 채권과 시행사의 사전구상금 채권 사이에도 원상회복관계로서 견련관계가 인정된다고 할 것이다.
위와 같이 대상판결의 원·피고가 체결한 위 각 채권에 관한 공제합의는 공제의 요건을 모두 충족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위 각 채권을 공제할 수 있다고 본 대상판결의 결론은 타당하다.
대상판결은 계약 자유의 원칙상 강행규정에 위반되지 않는 한 당사자들이 공제 기준시점과 상계적상 시점을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이 사건 각 확인서 제1조 제4항, 제2조에 따라 시행사의 사전구상권과 수분양자들의 분양대금반환 채권의 공제 기준시점 및 상계적상 시점을 기한의 이익 상실 시라고 판단하였다.
먼저 당사자들이 공제 기준시점을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다고 판단한 부분에 관하여 검토하자면, 결론적으로 이 부분의 대상판결의 판단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합의에 의한 공제는 사인간의 사적자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계약자유의 원칙상 당사자들이 공제 시점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고 하여야 한다. 또한 공제합의를 함에 있어 당사자들 중 일방이 수동채권의 이행기가 도래하기 전 자신의 기한이익을 포기하여 공제의 시기를 앞당길 수 있다. 나아가 양 당사자가 모두 기한의 이익을 포기하고 공제의 시기를 앞당기는 합의도 가능할 것이다. 이에 당사자들은 공제 기준시점을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다고 할 것이므로 이에 관한 대상판결의 판단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견련관계가 있는 채권들에 관한 공제합의라 하더라도, 자동채권 또는 수동채권에 대하여 압류 또는 가압류가 이루어지거나 자동채권 또는 수동채권이 양도된 이후에 공제합의 체결할 시, 거래의 안전과 이해관계인(채권압류권자, 채권가압류권자, 채권양수인 등)의 권리 및 신뢰보호를 위하여 당사자들이 공제의 시점을 임의로 설정하는 것을 방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안에서 공제합의 당사자들은 임의로 설정한 공제시점를 이유로 그 이해관계인에게 대항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대상판결의 경우 공제합의가 이루어지기 전 분양대금반환 채권과 사전구상금 채권, 위약금 채권 등에 대하여 압류나 가압류가 이루어진 사실이 없는 것으로 보이므로, 대상판결의 원고들과 피고는 공제 기준시점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48)
이어서 공제합의의 공제 기준시점을 ‘기한이익 상실시’로 본 대상판결의 판단이 타당한지를 살펴보자면, 원고들과 피고는 중도금대출에 대한 기한이익 상실이 이루어지면 그 즉시 원고들이 피고에게 대출금 원금과 이자를 지급하기로 합의하였다(이 사건 각 확인서 제1조 제4항), 민법 제442조에 의하면 수탁보증인은 변제기가 도래한 경우 채무자에게 사전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다. 수탁보증인이 사전구상권을 행사하면 채무자는 수탁보증인에게 채무의 원본과 이미 발생한 이자 및 지연손해금 등을 지급하여야 한다.49) 이 사건 각 확인서 제1조 제4항은 기한이익 상실 시 대출채무자인 원고들이 보증인인 피고에게 대출금 원금과 이자를 지급하기로 하는 사전구상권을 규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사건 각 확인서 제2조는 제1항에서 정한 기한이익 상실사유가 발생하면 그와 동시에 분양대금반환 채권에서 사전구상금을 공제 내지 상계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문리해석을 하자면 ‘원고들의 기한이익 상실 시점에 분양대금반환 채권에서 사전구상금 채권을 공제할 수 있다’고 해석하여야 하므로 분양대금반환 채권과 사전구상금 채권 사이의 공제 기준시점은 ‘기한이익 상실 시점’으로 보아야 한다. 이에 위 두 채권의 공제기준 시점을 ‘기한이익 상실 시점’으로 본 대상판결은 타당하다.
한편, 대상판결은 피고 시행사의 위약금 채권과 수분양자들의 분양대금반환 채권의 공제기준 시점에 관하여는 명시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분양대금반환 채권과 위약금 채권의 공제 기준시점은 달리 봐야 한다. 이 사건 각 확인서 제2조는 분양대금반환 채권과 사전구상금 채권에 관하여만 기재하고 있고, 위약금 채권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공제합의는 거래의 안전과 제3자의 권리와 신뢰에 미치는 영향이 크므로 공제의 대상이 되는 범위는 엄격하게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이 사건 각 확인서에 ‘위약금 채권’이 명시되어 있지 아니하므로 ‘분양대금반환 채권’과 ‘위약금 채권’의 공제 기준시점을 ‘기한이익 상실 시점’으로 볼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이 사건 각 분양계약서 제2조 제4항은 ‘분양계약이 해제 또는 해지되면 분양대금에서 위약금, 연체료 등 순서로 충당이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위 충당은 공제를 의미한다고 할 것이고 ‘분양대금반환 채권’과 ‘위약금 채권’의 공제 기준시점은 ‘분양계약 해지시’로 보아야 한다.
‘대법원 1997. 5. 23. 선고 96다41625 판결’는 선급금상환채무와 물품대금채무 사이에 고도의 견련성이 인정되어 물품대금에서 선급금이 당연공제된다고 하며, 마치 공제의 요건으로 견련관계가 요구되는 것처럼 판단하였다. 그런데 대상판결은 강행규정에 위반하지 않는 한 계약자유의 원칙에 따라 당사자들이 공제요건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고 하며 견련관계가 없더라도 공제합의를 할 수 있는 것처럼 판시하였다. 한편으로 대상판결은 공제인지, 상계인지 여부가 불명확한 경우 ‘채권들의 상호관계’, ‘제3자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여야 한다고 판시하며 공제와 상계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채권들의 상호관계’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대상판결은 공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견련관계가 요구된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계약자유의 원칙상 당사자들의 합의에 의한 공제를 인정할 수 있다고 할 것이지만 견련관계가 없는 채권 간의 공제합의는 이해관계인에게 대항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대상판결이 어떠한 견해에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견련관계가 단지 상계와 구분하기 위한 기준으로 이용되는 것에 불과한지 아니면 공제의 요건인지, 대항하기 위한 요건인지 등 명확히 판시하면 더 좋을 것으로 판단된다.
Ⅳ. 맺음말
과거 판결들을 살펴보면 우리나라 법원은 오래 전부터 공제의 용어를 사용하였으나, 대부분 상계, 공제, 충당의 용어를 명확히 구분하지 아니한 채 사용하였고, 공제를 사실상 상계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대법원은 ‘대법원 2007. 9. 28. 선고 2005다15598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공제는 상계와 달리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의 적용이 되지 아니하여 회생절차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판단하였고, ‘대법원 2018. 1. 24. 선고 2015다69990 판결’을 통해 공제는 상계적상이나 별도의 의사표시가 필요하지 않다는 점을 판시하였다. 그러나 법원은 공제의 정의나 요건, 효과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반하여 대상판결은 ‘계약자유의 원칙에 따라 당사자들이 공제합의를 할 수 있다는 점’, ‘공제의 요건, 공제의 기준시기, 의사표시의 필요 유무는 당사자들이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다는 점’, ‘공제는 상계적상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점’, ‘공제에는 민법이나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 등 관련 법령에서 정한 상계에 관한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 ‘공제합의인지, 상계합의인지 불명확할 때 이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채권들의 상호관계, 제3자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여야 한다는 점’ 등을 밝히면서, 종전 판결들과 달리 공제에 관하여 의의나 요건, 효과 등을 자세히 판시하였다.
대상판결은 시행사와 수분양자의 공제 내지 상계합의가 유효하다고 하며 시행사의 사전구상권과 수분양자들의 분양대금반환 채권의 공제 기준시점 내지 상계적상 시점을 ‘기한이익 상실시’로 판단하였다. 시행사와 수분양자의 공제합의는 공제의 요건을 모두 충족한 것으로서 피고가 공제 항변을 할 수 있다고 본 대상판결은 타당하다. 또한 이 사건 각 확인서 제1조 제4항, 제2조를 해석하였을 때, 제1조 제4항은 피고 시행사의 사전구상권에 관한 규정이고, 제2조는 분양대금반환 채권과 사전구상금 채권의 공제시점을 기한이익 상실시로 정한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대상판결이 분양대금반환 채권과 사전구상금 채권의 공제시점을 ‘기한이익 상실 시점’으로 본 것도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대상판결은 시행사의 위약금 채권과 수분양자들의 분양대금반환 채권 간의 공제 기준시점에 관하여 판단하지 아니하였다. 이 사건 각 확인서 제1조 제4항과 제2조는 공제대상 채권으로서 분양대금반환 채권과 사전구상금 채권만을 규정하고 있을 뿐이지 위약금 채권은 명시하고 있지 아니하다. 이 사건 각 분양계약서 제2조 제4항은 ‘분양계약 해제 또는 해지시 분양대금반환 채권에서 위약금, 연체료 등 순서로 충당한다’고 있다. 이에 분양대금반환 채권과 위약금 채권의 공제 기준시점은 분양계약 해지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