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이하 “WTO”)를 중심으로 하는 다자무역체제는 현재 그 존립 근거 자체를 위협받는 중대한 변곡점에 직면해 있다.1) 1995년 「세계무역기구 설립을 위한 마라케시 협정(Marrakesh Agreement Establishing the World Trade Organization)」(이하 “WTO 설립협정”)의 발효와 함께 출범한 WTO는 국제 무역의 비약적인 팽창을 주도하며, 글로벌 경제 거버넌스의 중요한 성취로 평가받아 왔다.2) 그러나 오늘날 WTO는 분쟁해결기구(Dispute Settlement Body, 이하 “DSB”)의 상소심 공백, 다자간 무역 협상의 입법적 교착, 그리고 강대국 간의 ‘상호의존성 무기화(weaponization of economic interdependence)’라는 세 가지 주요 과제에 직면하며 그 존립적 위기를 겪고 있다.3)
이러한 위기는 단순히 일시적인 마찰이나 개별 국가의 일탈적 정책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지난 30여 년간 누적되어 온 체제적 균열이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구조적 징후이다.4) 이러한 구조적 균열은 크게 제도적 설계의 내재적 결함, 지정학적 패러다임의 급격한 전환, 그리고 세계화에 대한 사회경제적 반발이라는 세 가지 차원의 단층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현되고 있다.5) 이 과정에서 각 차원은 서로를 강화하며, 위기를 국지적 사건이 아닌 전 지구적이고 체계적인(systemic) 차원으로 격상시켰다.6)
현 다자무역체제의 진화는 권력과 정치의 불확실성에서 규칙과 법의 확실성으로 이행하는 단순한 단방향적 발전이 아니었다.7) 오히려 「1947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of 1947)」(이하 “GATT 1947”) 체제가 제공했던 ‘최소한의 법(little law)’과 ‘합법적 출구(exit options)’가 1995년 WTO 체제 출범과 함께 강력한 법적 구속력으로 경직됨에 따라, 회원국들은 정치적 발언(voice)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체제의 틀 안에 갇히게 되는, 이른바 ‘요새화된 WTO(fortress WTO)’ 현상이 초래되었다.8) 즉 엄격한 규범이 회원국의 정책적 탈출구를 봉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조율하고 정당성을 부여할 정치적 참여 메커니즘의 발전은 정체됨으로써, 오늘날의 심각한 불균형과 체제 이탈이라는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9)
본 논문은 다자무역체제가 직면한 이러한 복합적 위기의 근본 원인을 법리적, 제도적, 지정학적 관점에서 다각도로 조명하고, 현행 WTO 대상협정(covered agreements, 이하 “WTO 협정”)의 구체적 조항에 대한 해석론적 분석을 토대로 실현 가능한 다층적 개혁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본 논문을 관통하는 핵심 논지는, 과거와 같은 전체 회원국을 아우르는 ‘단일하고 보편적인 다자주의(unitary, universal multilateralism)’로의 회귀는 더 이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나아가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10)이다. 오히려 다자무역체제의 미래는 최근 통상법학계에서 강조되는 비판적 관점과 같이, 다양한 수준의 법적 구속력을 포용하면서도 공통의 제도적 지붕을 유지하는 ‘다층적 기하학(variable geometry)’ 모델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점을 대전제로 한다.11) 아울러 사법적 완결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벗어나, 회원국 간의 외교적 타협과 정치적 해결의 공간을 확대하는, 이른바 ‘더 적은 법과 더 많은 정치(less law and more politics)’로의 구조적 전환이 21세기 무역 규범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한 핵심 조건임12)을 논증하고자 한다.
II. 다자무역체제 위기의 배경 및 구조적 원인
WTO는 1995년 출범 이후 일부 개별 협정의 채택에도 불구하고, 우루과이라운드(Uruguay Round)에 상응하는 포괄적인 다자간 무역 협상 라운드를 성공적으로 타결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2001년 출범한 도하개발아젠다(Doha Development Agenda, 이하 “DDA”)는 10년 이상의 지난한 협상에도 불구하고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장기 교착 상태에 머물러 있다.13) 이러한 입법적 교착(legislative inertia)의 근본 원인은 WTO의 의사결정 구조에 내재한다.14)
WTO는 2026년 4월 기준 166개 회원국의 상이한 정치경제 체제를 포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모든 개별 협정이 전체 회원국의 총의(consensus)에 의해 채택되는 의사결정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15) 경제 규모나 무역 체제에서의 지분과 관계없이, 단일 회원국이 전체 의제를 거부할 수 있는 사실상의 거부권(de facto veto power)을 보유한 것이다.16) 이러한 총의에 의한 의사결정 방식, 즉 총의제는 ‘일괄타결원칙(single undertaking)’과 결합될 경우 협상의 교착 가능성을 극대화하며, 이른바 ‘절차적 덫(procedural trap)’을 강화한다.17)
일괄타결원칙은 “모든 분야의 협상이 타결되기 전까지는 개별 의제에 대한 어떠한 합의도 인정되지 않는다(nothing is agreed until everything is agreed)”는 극단적 연계 원칙을 의미한다.18) 본래 이 원칙은 모든 회원국이 다양한 협상 의제 속에서 자국의 이익과 손실을 교환하여 균형 잡힌 타협안을 도출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고안되었다.19) 그러나 현실에서는 특정 의제에 타협 의사가 있는 회원국조차 부분적 합의가 제한되므로, 협상 의제가 확대될수록 이해관계의 충돌이 심화되어 교착 상태가 발생한다.20) 이는 일부 의제에 대한 반대가 전체 합의 거부로 이어지는 구조적 한계를 노출하며, 합의의 동력 자체를 상실케 한다는 점에서 자기파괴적(self-defeating)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21)
과거 상호 신뢰가 존재하고 반복적 게임의 긍정적 효과가 작동하던 GATT 초기 시절에는 총의제가 핵심 이익을 보호하는 안전장치로 기능하였다.22) 그러나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고 국가 간 신뢰가 현저히 약화된 오늘날에는 거부권 행사에 따르는 정치적 비용이 극단적으로 낮아지면서 이른바 ‘값싼 거부권(cheap vetoes)’이 남발되고 있다.23)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이하 “IMF”), 세계은행(World Bank) 등 브레튼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의 다른 기구들이 경제력(quota)에 비례한 가중의결권(weighted voting)과 상시(day-to-day 내지 daily) 의사결정기구인 집행이사회(IMF의 Executive Board, 세계은행의 Boards of Directors 등)를 갖추고 있는 것과 극명하게 대조적으로, WTO는 입법적 교착을 타개할 아무런 제도적 우회로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24) 결국 오늘날 WTO의 입법 기능은 일괄타결원칙의 경직성과 총의제가 초래한 이른바 ‘합의의 역설(paradox of consensus)’이라는 절차적 덫에 빠져 사실상 마비된 것으로 평가된다.25)
제도적 결함과 더불어 다자무역체제의 근간을 위협하는 것은 지정학적 패러다임의 구조적 전환이다. 수십 년 동안 글로벌 통상 체제의 정신적 기반으로 기능해 온 ‘자본주의적 평화론(capitalist peace theory)’은 최근 들어 그 전제에 근본적인 도전을 받고 있다.26) 국가 간의 경제적 상호의존성이 무력 충돌을 억제하고 협력을 촉진할 것이라는 믿음, 즉 무역이 전쟁을 억제한다는 기존의 인식27)은, 상호의존이 오히려 전략적 경쟁과 압박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현실 속에서 더 이상 자명한 명제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워진 것이다.28)
오늘날의 강대국 경쟁 구도 하에서 상호의존성은 더 이상 협력을 담보하는 자산으로 기능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국가의 중대한 전략적 취약성(strategic vulnerability)으로 인식되고 있다.29) 국가들은 이제 글로벌 공급망, 금융 네트워크, 디지털 인프라 등에서의 중심적 입지를 활용하여, 동맹국에게는 보상을 제공하고 적대국에게는 강압을 행사하는 ‘상호의존성의 무기화’ 전략을 적극적으로 구사하고 있다.30) 특히 미국과 중국 간의 패권 경쟁은 초기의 무역 불균형이나 지식재산권 분쟁을 넘어, 첨단 기술·국가안보·정치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우위를 포함하는 포괄적 체제 경쟁 양상으로 격화되었다.31) 양국 모두 경제 관계를 국가안보의 관점에서 투영하고, 시장의 경제적 효율성(efficiency)보다는 국가의 생존성(survivability)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있다.32)
이와 동시에, 세계화에 대한 사회경제적 반발은 자국 우선주의를 강화하는 정치적 토양을 제공했다. 세계은행 등이 분석한 글로벌 소득 분포의 이른바 ‘코끼리 곡선(elephant curve)’은 다자무역체제 하에서 개발도상국의 신흥 중산층과 선진국의 글로벌 엘리트 계층이 막대한 부를 축적한 반면, 선진국의 전통적 노동자 계층과 하위 중산층은 소득 정체, 일자리 상실, 지역 사회 붕괴를 경험했음을 시사한다.33) 이러한 분배의 불평등은 선진국 내 보호무역주의적 포퓰리즘 지도자의 부상을 야기하고, 주요국 정치권 내에서 자유무역과 WTO 규범에 대한 초당적 반발을 초래하였다.34) 최근의 산업정책 부활과 공급망 재편(본국 회귀(reshoring) 및 우방국 이전(friend-shoring)), 그리고 전략자산 보호주의의 강화는 세계 경제의 근간이었던 신자유주의 합의의 붕괴를 방증한다.35)
WTO 체제가 정치적 교착 상태에 머무르는 동안 글로벌 경제 지형이 급변하였고, 그 결과 체제의 규범과 경제적 현실 간의 현격한 괴리가 드러났다.36) 이러한 괴리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영역은 디지털 무역, 기후 변화 대응, 그리고 공급망 안보의 세 분야로 집약된다.37)
첫째, 글로벌 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부상한 디지털 경제 분야에서 현행 WTO 체제는 여전히 과거 아날로그 시대에 정립된 규범 체계에 머물러 있다.38) 특히 국경 간 데이터 흐름, 데이터 현지화 요구, 소스코드 보호 및 알고리즘 투명성, 인공지능 거버넌스 등 21세기 디지털 통상의 핵심 의제들을 체계적으로 규율할 수 있는 포괄적인 다자 규범은 여전히 미비한 실정이다.39) 더욱이 WTO 회원국들은 ‘전자적 전송물에 대한 한시적 관세 부과 유예(moratorium on customs duties for electronic transmissions)’라는 임시방편적 조치가 제14차 각료회의(14th Ministerial Conference, 이하 “MC14”)를 기점으로 더 이상 연장되지 않음에 따라, 그간 유지되던 임시적 균형이 와해되며 새로운 불확실성에 직면하게 되었다.40) 나아가 이러한 규범적 공백 속에서 각국이 개인정보 보호, 콘텐츠 규제, 플랫폼 책임 등에 대해 상호 비호환적인 규제 체계를 독자적으로 구축하면서, 글로벌 인터넷망은 이른바 ‘스플린터넷(splinternet)’으로 분절될 위기에 처해 있으며, 안보와 주권을 명분으로 한 새로운 디지털 보호무역주의가 확산되고 있다.41)
둘째, 기후변화 대응 역시 다자무역체제에 근본적인 도전을 제기한다.42) 전 지구적 탈탄소화라는 시대적 과제는 생산·소비·투자 구조의 근본적 전환을 요구하지만, 현행 무역 규범은 환경 문제가 부차적 사안으로 인식되던 시기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43) 유럽연합(European Union, 이하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 이하 “CBAM”)와 같이 기후 규제의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국가로부터의 수입품에 비용을 부과하여 탄소 누출(carbon leakage)을 방지하고자 하는 환경 조치는, 남반구(Global South) 개도국의 관점에서는 수출 시장 진입을 제약하는 위장된 보호무역주의(disguised protectionism)로 비판될 수 있다.44) WTO는 합법적인 환경 정책과 위장된 무역장벽을 구분할 수 있는 명확한 법적 프레임워크를 제시하는 데 한계를 보이고 있으며, 이는 녹색 산업보조금이나 탄소 가격 책정과 같은 정책이 잠재적 무역 분쟁의 도화선이 되는 이른바 ‘기후 무역 전쟁(climate trade wars)’을 초래할 가능성을 내포한다.45)
셋째,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명확히 부각된 공급망 안보 현안 또한 기존의 효율성에 기반한 다자무역체제와 긴장 관계를 형성한다.46) 재고를 최소화하고 글로벌 분업을 극대화했던 적시 생산(just-in-time) 시스템의 취약성이 드러나면서,47) 각국은 안보와 회복력(resilience)을 명분으로48) 핵심 광물·반도체·의약품 공급망을 지정학적 경쟁자로부터 분리하려는 ‘디리스킹(de- risking)’ 정책을 본격화하고 있다.49) 이는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의 파편화를 초래하여, 생산 비용을 높이고 전통적인 비교 우위 원리에 따른 전문화의 이익을 잠식하고 있다.
III. 현행 WTO 체제의 규범적 한계와 구조적 취약성
현재 다자무역체제가 직면한 가장 가시적이고 치명적인 위기는 WTO DSB 산하 상소기구(Appellate Body)의 기능 정지로, 이는 한때 ‘왕관의 보석(crown jewel)’으로 평가되던 제도의 붕괴를 의미한다.50) 2019년 12월 이래, 미국이 공석이 된 상소기구 위원의 신규 임명에 대한 동의를 지속적으로 거부함에 따라, 상소기구는 심리에 필요한 의사정족수(quorum)를 충족하지 못한 채 사실상 마비된 상태에 있다.51) 이는 단순한 단발적 조치가 아니라, 수십 년간 누적된 미국 정부의 구조적 불만이 표출된 결과이다.
여러 행정부에 걸쳐 미국은 WTO 상소기구가 「분쟁해결규칙 및 절차에 관한 양해(Understanding on Rules and Procedures Governing the Settlement of Disputes)」(이하 “DSU”) 제17조 제6항상 엄격히 제한된 법률적 쟁점 심리 권한52)을 넘어, 회원국이 협상에서 결코 동의한 적 없는 새로운 의무를 창설하고 권리를 축소하는 ‘사법 적극주의(judicial activism)’를 전개해 왔다고 지속적으로 비판해 왔다.53) 보다 구체적으로 미국은 상소기구가 사실관계 판단이나 국내법 해석 영역에까지 권한을 넘어 관여하고, 분쟁해결에 불필요한 사안에 대해서조차 조언적 의견(advisory opinions)을 반복적으로 제시하며, WTO 협정에 선례 구속의 원칙(stare decisis)이 명시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전 상소기구 보고서를 사실상 구속력 있는 판례로 취급해 왔다는 점을 지적해왔다.54) 더불어 DSU에 명시된 90일 이내 보고서 제출 기한을 반복적으로 도과한 것 역시 중대한 절차적 결함으로서, 주요 비판의 논거가 되어 왔다.55)
이러한 상소기구의 마비가 초래한 가장 파괴적인 실무적 결과는, 이른바 ‘허공으로의 상소(appeals into the void)’라는 기형적 현상의 구조적 고착화에 있다.56) 패널 단계에서 패소하여 WTO 협정 위반 판정을 받은 회원국은 이를 수용하는 대신, 기능이 정지된 상소기구에 상소할 수 있다. 이 경우 상소 절차가 종료되지 못함에 따라 최종 판정의 확정이 차단되는 법적 공백 상태가 발생하며, 결과적으로 패널보고서는 실질적인 구속력을 상실하게 된다.57) 그 결과 WTO 분쟁해결제도는 법의 지배가 권력에 우선하던 규칙 기반의 분쟁해결 메커니즘에서,58) 판정의 이행이 당사국의 자발적 준수에 의존하고 보복 조치의 전략적 활용이 심화되는 권력 기반의 정치적 경쟁 구조로 변질되고 있다.59)
EU를 비롯한 수십 개의 회원국들이 이러한 사법적 공백을 보완하기 위해 DSU 제25조의 중재 제도를 활용한 「다자간 임시상소중재약정(Multi-Party Interim Appeal Arbitration Arrangement)」(이하 “MPIA”)을 출범시켰으나, 해당 제도가 상소기구 마비 사태를 타개할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기에는 그 제도적 한계가 상당하다.60) 미국을 비롯한 주요 무역국들이 참여하지 않는 상황에서, MPIA는 필연적으로 통상 규범의 파편화를 초래하며, 동일한 규범이 일부 회원국에게만 구속력을 갖는 이중 잣대의 법적 질서(two-tier legal order)를 형성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61) 이는 역컨센서스(negative consensus) 원칙에 기반한 DSU의 엄격한 판정 자동 채택(automatic adoption) 구조로 인해 체제 출범 당시부터 회원국들의 이탈(exit)이 사실상 차단되었음에도, 이에 반발하는 회원국들이 판정 내용을 수정하거나 견제할 수 있는 정치적 발언(voice)의 통로, 즉 정치적 대화 메커니즘이 부재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체제 내적 자가당착적 붕괴의 결과이다.62)
오늘날 다자무역체제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또 다른 요인은, 회원국들이 통상적인 무역제한조치를 국가안보의 담론으로 재구성하여 정당화하는 ‘무역의 안보화(securitization of trade)’ 현상이다.63) 그 법적 쟁점의 중심에는 「1994년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of 1994)」(이하 “GATT 1994”) 제21조에 규정된 ‘안보상의 예외(security exceptions)’ 조항이 자리하고 있다.
GATT 1994 제21조 제(b)항은 특정 회원국이 “자신의 필수적인 안보이익(essential security interests)의 보호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간주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을 협정이 방해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핵물질, 무기 및 군사용 물질의 거래, 그리고 “전시 또는 국제관계의 그 밖의 비상시에 취하는 조치(action taken in time of war or other emergency in international relations)”가 포함된다. 이처럼 해당 조항은 본래 전쟁이나 그에 준하는 극단적 비상 상황을 상정하여 도입된 예외적 장치였다.64)
그러나 최근 강대국들은 이 조항을 사실상의 만능열쇠로 활용하여, 광범위한 산업정책과 보호무역을 정당화하는 포괄적 수단으로 오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예컨대 2018년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은 「1962년 무역확장법(Trade Expansion Act of 1962)」 제232조를 근거로 적성국과 동맹국을 불문하고 수입 철강 및 알루미늄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면서, 해당 산업의 유지가 국가안보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65) 한편 중국 역시 희토류, 게르마늄, 갈륨 및 첨단 기술에 대한 수출통제를 단행하면서 이를 명백한 경제적·지정학적 고려가 아닌 국가안보 조치로 정당화하였다.66)
법리적으로 가장 첨예한 쟁점은 제21조가 전적으로 자기판단적(self-judging) 성격을 가지는지, 나아가 그 결과 사법심사의 대상에서 배제되는 비사법적(non-justiciable) 영역에 속하는지 여부에 있다.67) 미국은 해당 조항의 해석과 적용이 이를 원용하는 국가의 전권(absolute discretion)에 속하는 주권적 재량에 해당하며, 따라서 WTO DSB는 특정 조치의 안보 관련성 여부를 실질적으로 심리할 관할권을 가지지 않는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해 왔다.68)
그러나 2019년 ‘러시아-통과운송(Russia - Traffic in Transit)’ 사건에서 WTO 패널은 획기적인 선례를 제시하였다.69) 패널은 회원국이 자신의 필수적 안보 이익을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지에 관하여 폭넓은 재량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해당 조치가 제21조가 예정하는 ‘객관적 상황(전시 또는 국제관계의 비상시 등)’ 하에서 취해졌는지, 그리고 신의성실의 원칙(good faith)에 부합하게 원용되었는지 여부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된다고 판시하였다.70) 이러한 판시 기조는 2020년 ‘사우디-지식재산권(Saudi Arabia - IPRs)’ 사건 및 2022년 ‘미국-철강 및 알루미늄 제품(United States - Steel and Aluminium Products)’ 사건 등 후속 판정에서도 재확인되었으며, 이들 패널 역시 안보예외가 전적으로 자기판단적이거나 사법심사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영역이 아님을 보다 명확히 하였다.71)
이러한 법리적 긴장은 WTO 체제에 근본적인 구조적 딜레마를 제기한다. 만약 패널이 안보예외를 남용한 강대국의 조치에 대해 협정 위반을 인정할 경우, 해당 회원국은 주권 침해를 이유로 판정을 거부할 가능성이 크며, 이는 체제의 권위 실추로 이어질 수 있다. 반면 패널이 그러한 안보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사법적 심사를 극도로 자제한다면, 제21조는 규범 기반 체계 전체를 잠식하는 거대한 허점(loophole)으로 작용하여 다자무역체제 자체를 형해화(evisceration)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72)
최근 강대국들이 선호하는 무역 제한 조치는 직접적인 관세 부과에서 벗어나, 보다 불투명하고 비가시적인 ‘경제적 강압(economic coercion)’의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73) 이러한 강압은 정당한 정책 수단과 불법적 압력 사이의 회색 지대(gray zone)에서 주로 작동하며, 이로 인해 국제법적 판별과 대응을 어렵게 한다.74) 상대국의 정치적 양보를 유도하기 위해 특정 산업이나 제품을 표적으로 삼아, 통관 절차의 의도적 지연, 위생 및 식물위생(sanitary and phytosanitary, 이하 “SPS”) 기준의 자의적·선별적 적용, 인허가 발급의 무기한 보류, 금융기관에 대한 비공식적 행정지도(informal guidance) 등 다양한 비관세장벽을 기습적으로 동원하는 사례가 빈번해지고 있다.75)
문제는 WTO의 기본 설계 구조가 이러한 비정형적이고 은밀한 경제적 강압을 통제하기에는 구조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76) 현행 WTO 체제는 분쟁 대상 조치가 가시적이고 공식적인 법령의 형태로 존재하며, 일정 기간에 걸쳐 증거가 축적되어 법적 판단이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설계되어 있다.77) 그러나 현대의 경제적 강압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로 인해 이러한 전제를 근본적으로 잠식한다.
먼저 시간적 압축(time compression)의 문제이다.78) 강압 조치로 인한 공급망 붕괴와 상업적 피해는 단기간 내에 발생하는 반면, WTO 분쟁해결절차는 패널 설치부터 최종 판정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79) 피해가 고착되고 무역 경로가 재편된 이후에 내려지는 사후적 판정은 실질적 구제수단으로 기능하기 어렵다. 다음으로 불투명성(opacity)과 부인 가능성(deniability) 역시 문제가 된다.80) 강압국은 조치의 정치적 목적을 부인하고 이를 통상적인 행정 절차나 기술적 규정의 집행으로 위장할 수 있다. 공식 문서로 남지 않는 행정적 마찰(administrative friction)은 분쟁해결절차에서 입증이 극히 어렵다.81) 이러한 시간적 불일치와 입증의 한계로 인해 다수의 피해국들은 제소 자체를 포기하고 체제 밖에서 정치적 타협을 시도하게 되며, 이는 결과적으로 규칙 기반 체제로서의 WTO에 대한 신뢰도와 유용성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핵심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82)
중국의 국가자본주의 모델의 부상은 현행 「보조금 및 상계조치에 관한 협정(Agreement on Subsidies and Countervailing Measures)」(이하 “SCM협정”)이 지니는 근본적인 구조적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83) SCM협정 하에서 제재 대상이 되는 보조금(actionable subsidies)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정부 또는 ‘공공기관(public body)’에 의한 재정적 기여(financial contribution)가 존재하고, 이로 인해 수혜자에게 혜택(benefit)이 부여되어야 한다.84)
현행 WTO 규범은 기본적으로 정부의 개입이 예외적인 시장경제 체제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다.85) 따라서 국가가 국영기업(state-owned enterprises), 국유(상업)은행, 다양한 산업정책 수단 등을 통해 주도적으로 전략 산업에 자원을 집중하고 국가대표기업(national champions)을 육성하는 체제를 규율하기에는 본질적인 한계를 지닌다.86) 특히 WTO 상소기구는 SCM협정상의 ‘공공기관’ 개념을 해석함에 있어, 단순히 국가가 소유하거나 통제하는 법인이 아니라 ‘정부 권한을 위임받은 기관(vested with governmental authority)’으로 그 범위를 엄격하고 협소하게 한정하였다.87)
이러한 보수적 법리 해석으로 인해, 중국 국유은행의 특혜성 대출이나 국영기업 간의 원자재 저가 공급과 같은 행위가 WTO 규범상의 보조금 요건을 충족함을 제소국이 입증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워졌다.88) 미국, EU, 일본 등은 현행 보조금 법리가 국가자본주의의 불공정 경쟁을 다자 규범의 규율로부터 차단하는 치명적인 구조적 결함으로 작용해 왔다고 비판하며, 공공기관 정의의 외연 확대, 국가의 지원 전반에 대한 투명성 강화, 그리고 소위 ‘좀비기업’이라 일컬어지는 한계기업89)에 대한 무제한적 지급보증 등을 ‘금지보조금(prohibited subsidies)’ 범위에 산입하기 위한 3자 공조(Trilateral Initiative)를 모색하고 있다.90) 해당 쟁점은 단순한 조문 해석의 이견을 넘어, 근본적으로 상이한 정치경제 체제들이 단일한 법적 틀 내에서 양립할 수 있는가에 대한 체제론적 충돌을 시사한다.91)
IV. 다자무역체제의 구조적 전환을 위한 법제적 개혁 방안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행 다자무역체제는 그 보편성과 경직성으로 인해 작동상 한계에 직면해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회원국의 총의를 전제로 한 포괄적 단일 조약 중심의 접근에서 벗어나, 유연하고 다층적인 규범 구조로의 실용적 전환이 필수적이라 사료된다.92) ‘더 적은 법과 더 많은 정치(less law and more politics)’라는 관점은 이러한 개혁의 핵심 철학을 제공한다.93) 이는 규범의 경직성을 완화하고 회원국 간 외교적 타협과 정치적 관여의 여지를 법제적 틀 내로 수용하는 새로운 거버넌스 아키텍처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본 장은 이러한 논리적 기저 위에서 분쟁해결제도의 실효성 회복 방안, 안보예외의 제도적 관리 체계, 경제적 강압에 대한 실용적 대응 전략, 그리고 복수국간 협정을 통한 규범의 다변화 가능성을 순차적으로 고찰한다.
제3장 제1절에서 논의한 상소기구 마비에 따른 사법적 공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분쟁해결제도의 절차적 정당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회복할 수 있는 구조적 재편이 시급하다. 이와 관련하여 초국가적 사법 권력이라는 이상화된 인식에서 벗어나, 고도로 사법화된(legalized) 규범 운용을 정치적 정당성과 균형감각에 의해 조정할 필요가 있다.94) 이는 무역 분쟁해결의 본질적 목표가 ‘추상적인 무역 법리의 정립’이 아니라 ‘현실적인 무역 마찰의 해결 및 협상된 양허 균형의 유지’에 있기 때문이다.95)
이를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다음의 개혁 조치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상소기구 또는 향후 신설될 재판부의 ‘심사 표준(standard of review)’을 DSU에 명시적으로 성문화하여 사법 적극주의를 차단해야 한다.96) 사실관계의 조사 및 국내법에 대한 독자적 해석 권한을 상소심에서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기존 판례에 대한 구속력이 인정되지 않음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97) 둘째, 보고서 제출의 90일 시한을 엄격히 준수하도록 함으로써, 불필요하게 비대해진 판결문 작성을 억제하고 신속한 분쟁해결을 도모하여야 할 것이다.98) 셋째, 판결의 채택 과정에 회원국의 통제권(member control)을 강화하는 일종의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특히 상소기구의 판정이 회원국 간 정치적 합의의 범위를 현저히 일탈하는 경우, 전 회원국의 3분의 2 또는 4분의 3 이상과 같은 가중다수결(supermajority vote)을 통해 해당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입법적 거부(legislative reversal)’ 권한, 이른바 ‘빌라르 프레임워크(Villars Framework)’의 도입이 검토되어야 한다.99) 이는 사법적 판정의 최종성을 보장하는 한편, 중대한 월권행위에 대해서는 최고 의사결정기관의 견제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사법 절차에 대한 회원국들의 정치적 수용성을 제고할 수 있을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MPIA 참여국을 지속적으로 확대하여, 해당 제도가 사실상의 상임 중재 메커니즘으로 기능하도록 그 제도적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100)
제3장 제2절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안보예외 규정의 남용은 다자무역체제의 규범적 예측 가능성을 저해하는바, 이를 제도권 내로 수용하여 투명하게 관리할 수 있는 합법적 출구(exit options) 메커니즘의 정교화가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회원국 내부의 폭발적인 정치적 압력과 지정학적 필요성을 일방적으로 억누르기보다는, 기존 WTO 체제 내에 내장된 유연성 조항(flexibility options)을 일종의 합법적 안전판(legal safety valves)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101) 체제의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은 역설적으로 일정한 범위의 제도화된 이탈(exit)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회원국의 완전한 탈퇴나 판결의 전면적 불이행과 같은 극단적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체제 내부에 합법적 출구를 법제적으로 공식화할 필요가 있다.102)
대표적인 규정이 바로 GATT 1994 제28조(양허표의 수정)이다. 국내 주요 산업의 위축을 방지하기 위해 관세율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될 경우, 상대국에 대한 일방적인 보호무역 조치보다는 제28조에 명시된 구조화된 협상 채널을 통해 국제 규범 내에서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유도해야 한다.103) 제28조상의 절차에 따라, 회원국은 WTO에 양허표 수정을 통보하고, 주요 공급 이해관계(principal supplying interest) 또는 실질적 이해관계(substantial interest)를 가진 회원국과의 협상을 거쳐 무역혜택의 상실에 상응하는 ‘적절한 보상(adequate compensation)’을 제공해야 한다.104) 보상 협상이 결렬될 경우, 해당 이해관계국은 규정에 따라 상응하는 양허(substantially equivalent concessions)를 철회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105) 이러한 절차의 활성화는 자칫 통제 불능의 불법적 무역 보복으로 비화할 수 있는 상황을, 투명성과 비례성의 원칙이 작동하는 합법적인 ‘균형 재조정(rebalancing)’의 과정으로 승화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106)
GATT 1994 제21조 안보예외 조항의 해석과 적용에 있어서도, 이를 단순히 전면적인 사법심사의 대상으로 환원하는 협소한 접근 방식은 지양해야 한다.107) 강대국들이 국가안보 주권에 대한 국제기구의 사법적 개입을 수용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예외 조항 원용의 진위를 가리는 법적 공방에 매몰되기보다는, 조치의 투명성과 비례성에 기반한 관리 체계 구축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108) 즉 안보예외를 발동하는 회원국이 그 정당성을 사전에 검토·공개하도록 하여 정치적 책임을 부담하도록 하는 절차와 함께, 해당 조치로 인해 발생하는 무역 교란의 정도에 비례하여 (제28조와 유사하게) 재균형 및 보상 청구권을 제도화하기 위한 별도의 전문적 검토기구의 도입이 요구된다.109) 안보 논리를 앞세운 조치라 하더라도, 원칙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경제적 비용(cost)을 부담하도록 함으로써 정치적 수사로 포장된 보호무역주의의 남용을 제도적으로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제3장 제3절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최근 급증하는 경제적 강압 행위들은 기존 WTO 분쟁해결절차의 시간적·절차적 한계를 여실히 노정하여 왔다. 비공식적이고 변칙적인 경제적 강압 조치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무역 신뢰성 위험(trade reliability risk)’이라는 중립적 프레임워크를 수용할 필요가 있다.110) 이는 특정 국가를 정치적으로 지목·비난(naming and shaming)하여 진영 간 양극화를 심화시키기보다는, 무역의 예측 가능성을 훼손하는 ‘행위 자체’를 신속하게 규율하는 데 초점을 둔다.111)
관련하여 제시된 대안 중 가장 핵심적인 제안은 DSU 체제 내에 ‘신속 대응 트랙(rapid response track)’을 도입하는 방안이다.112) 상대 회원국에 실질적 피해를 초래하는 갑작스러운 수출입 제한, 통관 지연, 혹은 집중적인 사후 검증과 같은 사실상의 무역제한적 행정조치가 발생할 경우, 장기간 소요되는 기존 분쟁해결절차를 대체하여 90일 이내에 예비적 판정(preliminary findings)을 도출할 수 있는 신속 절차(expedited procedure)를 마련해야 한다.113) 또한 이러한 예비 판정을 근거로 최종 판정 이전에도 피해 확산을 막기 위한 ‘잠정적 구제 조치(provisional relief)’를 허용해야 한다.114) 회복 불가능한 상업적 피해 위험이 현존하고 조치의 불투명성이 높은 경우, 피해국은 임시 대응 조치의 시행이나 회원국 간의 공조를 통한 대체 시장의 확보 등 다각적인 방어 메커니즘을 가동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115)
그리고 음영지대(shadows)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강압 조치의 특성을 무력화하기 위해, 입증 책임의 전환(shifting the burden of proof) 방안116)을 전향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정 회원국의 통관 기간, SPS 검사 비율, 라이선스 발급 시간 등이 정상 범위를 벗어나 급격히 변경될 경우, 피해국이 해당 조치의 불법성을 입증하는 대신, 조치 시행국이 행정 처분의 비차별성과 정당성을 소명하도록 규범을 재설계하는 방안이다.117) 이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WTO 사무국 내 ‘무역 교란 및 신뢰성 관측소(Trade Disruption and Reliability Observatory)’ 신설이 제안되며, 해당 기구는 통관 지연 및 행정 백로그(backlog) 데이터를 익명화된 형태로 상시 수집하고 비정상적 패턴이 감지될 경우 조기 경보를 발령하는 ‘투명성 유틸리티(transparency utility)’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제고할 것으로 기대된다.118)
다자무역체제의 마비를 타개할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전통적인 총의제 원칙의 경직성을 탈피하고, 복수국간 협정(plurilateral agreements)을 통한 ‘다층적 기하학(variable geometry)’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119) 특히 제3장 제4절에서 상술한 보조금 규율의 사각지대와 국가자본주의 문제는 166개 회원국 전체의 일괄타결을 기대하기 어려운 대표적인 영역이다. 이에 따라 모든 회원국의 총의 형성을 전제하기보다, 특정 의제에 대해 규범적 합의를 도출할 의지와 역량을 갖춘 ‘의지 있는 국가들(coalitions of the willing)’이 선도적으로 규범을 형성하고, 이를 점진적으로 확산시키는 ‘개방적 복수국간주의(open plurilateralism)’ 방식이 요구된다.120) 현재 전자상거래, 투자원활화, 국내 서비스 규제 등에서 진행되고 있는 공동성명 이니셔티브(Joint Statement Initiatives)는 이러한 소다자주의 접근법의 실질적인 작동 가능성을 시사한다.121)
이와 관련하여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법적·경제적 쟁점은 GATT 1994 제1조 제1항에 명시된 ‘일반적 최혜국대우(most-favoured-nation, 이하 “MFN”)’ 원칙의 해석 및 적용 문제이다.122) 본래 MFN 원칙은 한 회원국이 특정 회원국에 부여한 무역상의 혜택을 다른 모든 회원국에게 즉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확장하도록 함으로써123) 차별적 특혜로 인한 무역전환(trade diversion)을 방지하고 비차별성에 기초한 다자무역체제를 유지하는 핵심 기제로 기능해 왔다.124) 그러나 미국의 WTO 개혁 논의에서 제기되듯, 비시장경제 국가들의 관행과 회원국 간의 이질성이 심화된 현 상황에서 MFN 원칙의 기계적인 적용은 협상 당사국 간 상호 양허의 결과를 비참여국에게 자동적으로 확장시키는, 즉 비참여국이 혜택만을 향유하는 ‘무임승차(free-rider)’ 문제를 야기한다.125) 이처럼 협상상의 의무는 회피하고 그 편익만을 취하려는 일부 국가들의 전략적 행위로 인해, 새로운 규범 창출을 위한 협상 인센티브가 현저히 저해되고 있는 것이다.126)
반면 개도국 그룹과 EU는 MFN 원칙의 약화 또는 포기가 무역장벽의 부활과 다자무역체제의 파편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여, 이에 대해 신중한 접근을 견지하고 있다.127) 이러한 팽팽한 대립을 조정하기 위한 실질적 대안으로 이른바 ‘세밀하게 조정된 MFN 원칙의 유연화(calibrated loosening of the MFN principle)’를 고려할 수 있다.128) 즉 새로운 복수국간 협정을 체결함에 있어 모든 회원국에게 일률적으로 MFN 혜택을 기계적으로 확장하는 대신, 협정 참여의 기회는 개방적으로(open and inclusive) 유지하되, 객관적 참여 기준이나 상응하는 의무를 수용하는 회원국에 한하여 혜택을 부여하는 조건부 MFN 방식을 제도화하는 것이다.129) 이때 복수국간 협정의 결과물을 WTO 법체계 내의 ‘공통 참조 문서(common reference paper)’ 형태로 반영하여 개별 회원국의 양허표에 직접 편입시키는 전략은, 기존의 법적 틀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규범의 예측 가능성과 정합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실효적인 경로가 될 수 있다.130)
나아가 복수국간 협정의 실효성은 단순히 새로운 규범을 명문화하는 수준을 넘어, 강력한 이행 관리 기제의 구축을 통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보조금 규정 위반이나 통보 의무 미이행에 대해 의장 지명권을 제한하거나 반론 통지(counter-notification)를 활성화하는 등131) 구체적인 행정적·정치적 제재 수단을 복수국간 협정의 틀 내에 명시함으로써 기존 다자무역체제의 집행력 한계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방식은 전략적 방해 유인을 억제하고 실질적인 상호주의적 양허를 촉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다자화로의 이행을 위한 디딤돌(building blocks)로 기능할 수 있다.132)
V. 다층적 거버넌스의 이행 전략과 제도적 로드맵
지금까지 논의한 법리적 재해석과 제도적 혁신은 단일 조약의 형태로 일거에 완성되기 어렵다. 이는 지정학적 경쟁과 체제의 파편화라는 현실을 수용하면서도 규범적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실용적 이행 전략으로서, 이른바 ‘다층적 구조(multi-tiered architecture)’의 설계로 귀결된다.133)
미래의 WTO는 모든 회원국에 동일한 의무를 부과하는 포괄적 일괄타결원칙의 평면적 적용 구조를 탈피하여, 각국의 정치적 의지와 수용 능력에 따라 참여 수준이 세 개의 동심원 구조로 차등화된 다층적 시스템으로 작동하여야 한다.134) 각 층위는 규범의 밀도와 통합의 깊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법적·제도적 특성을 지닌다.
가장 내부의 동심원을 형성하는 핵심 층위(core layer)는 미국, EU 및 주요 선진국과 고소득 신흥 경제국들이 참여하여 선도적인 통상 규범을 형성하는 연합체이다.135) 동 층위는 국가자본주의 규율을 위한 산업보조금 및 국영기업 관련 규범, 디지털 통상, 그리고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환경 조치의 규범화 등 21세기의 핵심 통상의제를 주도한다. 특히 분쟁 발생 시 구속력 있는 2심제 분쟁해결절차와 실효성 있는 집행 기제를 전면 수용하며, 그 결과물을 WTO 설립협정 부속서 4(Annex 4) 형태의 복수국간 협정으로 체제 내에 공식 편입함으로써 다자무역체제의 현대화를 위한 규범적 동력을 제공한다.136)
중간 원에 해당하는 기반 층위(base layer)에는 현행 다자무역체제의 근간을 지탱하는 다수의 중견국과 개도국이 포함된다. 이들은 GATT 1994의 핵심인 비차별원칙과 관세 양허를 엄격히 준수하되, 투자원활화나 디지털 규범 등 국내 법령 및 제도의 광범위한 정비가 요구되는 신규 규범에 대해서는 선택적 참여를 허용받는다.137) 아울러 분쟁해결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국가 주권의 침해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상소 절차에 대한 일률적 의존 대신 당사자 합의에 기초한 중재 등 대안적 분쟁해결절차(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를 활용할 수 있는 제도적 유연성이 인정된다.138)
가장 외곽의 원에 위치하는 포용 층위(inclusive layer)는 구조적 빈곤과 개발 제약에 처한 최빈개도국을 포괄한다. 이들에게는 시장 개방 및 관세 인하와 같은 상호주의적 의무 이행이 유예 또는 면제되는 한편, 무관세·무쿼터 방식의 일방적 무역 특혜 접근권이 보장된다.139) 나아가 WTO와 OECD 등 국제기구는 무역을 위한 원조(Aid for Trade)140)와 ‘무역 관련 기술지원 및 역량강화(Technical Assistance and Capacity Building, 이하 “TACB”)’ 프로그램141)을 통해 해당 국가들이 궁극적으로 다층적 구조의 상위 단계로 이행할 수 있도록 이른바 ‘발전의 사다리(ladder of development)’142)를 제공하는 제도적 기반을 구축한다.
이러한 삼중의 층위 구조는 MFN 원칙과 무임승차 문제 간의 구조적 딜레마를 ‘신뢰성 콤팩트(reliability compacts)’와 연계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완화할 수 있다.143) 즉 고수준의 규범적 의무를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회원국(내부 권역)에게 신속 대응 절차의 우선적 활용이나 간소화된 상호인정협정의 체결 등 실질적 혜택을 배타적으로 부여함으로써, 규범 수용에 대한 제도적 유인 구조를 강화하는 것이다.144)
WTO 개혁 문제와 관련하여, 2026년 3월 25일부터 3월 29일까지 카메룬에서 개최된 MC14에서 일정 수준의 정치적 타협 도출이 기대되었으나 최종 합의에는 이르지 못하였다.145) 미결된 개혁 의제는 일반이사회로 회부되어 후속 논의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나,146) 정치적 결단이 요구되는 핵심 쟁점에 대해서는 실질적 진전이 제한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향후 WTO 개혁의 성패가 전면적 구조 개편이라는 거대 담론에 매몰되기보다는, 작지만 구체적인 성과의 축적을 통해 체제의 적응 능력을 입증하는 데 달려 있음을 시사한다.
먼저 디지털 무역의 근간을 지탱해 온 ‘전자적 전송에 대한 무관세 유예’가 실효된 상황에서,147) 해당 조치의 항구적 제도화 또는 획기적인 장기 연장을 통해 자국 우선주의에 기반한 디지털 장벽의 확산, 즉 스플린터넷 위기를 억제하고 통상 환경의 불확실성을 완화하는 것이 시급하다. 다음으로 다수의 선진국 및 개도국이 참여한 「개발을 위한 투자원활화협정(Investment Facilitation for Development Agreement)」(이하 “IFDA”)을 WTO 체제 내 제도적으로 수용하려는 시도는, 복수국간 합의가 다자무역체제와 어떠한 방식으로 공존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148) 특히 IFDA는 시장접근이나 투자자 보호와 같은 실체적 의무 없이 행정절차의 투명성·간소화에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WTO가 새로운 규범 수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상소기구 마비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한 복원의 즉각적 실현을 전제하기보다, 주요 무역국들의 MPIA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통해 이를 사실상의 상설 기구로 정착시키는 징검다리 전략이 요구된다.149) 나아가 경제적 강압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무역 신뢰성 위험’이라는 프레임워크를 장관급 선언의 형태로 공식화함으로써, 향후 제재 규범 논의를 위한 공통의 언어와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150)
아울러 WTO 내부의 정치적 대화 메커니즘을 복원하기 위해, 의사결정의 과도한 경직성을 완화하는 비공식적 관행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한다.151) 특히 위원회 의장 선출이나 회의 의제 채택과 같은 단순 행정 및 내규 사안에 대해서는 WTO 설립협정 제9조 제1항에 따른 보충적 투표 절차, 즉 다수결에 의한 의사결정 방식을 실질적으로 가동하거나, 적어도 그 활용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투표의 그림자(shadow of a vote)’를 통해 합의를 유도할 필요가 있다.152) 현저히 낮아진 거부권 행사의 비용을 상승시켜 전략적 방해를 억제하고, 타협의 인센티브를 회복시키는 정치적 지렛대가 요구된다.
다자무역체제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WTO 거버넌스의 민주적 정당성을 제고하고, 비국가 행위자의 실질적인 참여를 보장하는 제도적 개선이 필수적이다. 즉 WTO는 정부 관료와 일부 이해관계자 중심의 폐쇄적인 의사결정 구조에서 탈피하여, 거버넌스의 민주적 외연을 확장하고 투명성을 강화해야 한다.153) 무역 정책의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노동자와 중소기업, 그리고 기후·인권 분야의 비정부기구(non-governmental organization, 이하 “NGO”) 등 다양한 비국가 행위자(non-state actors)가 정책 형성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통로가 마련되어야 한다.154) 이는 NGO와 시민을 위시한 시민사회가 기구의 승인을 구하던 수동적 존재에서 벗어나, WTO 체제 자체가 정책의 민주적 정당성과 이행력을 확보하기 위해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지를 구하는 능동적 거버넌스로 전환되어야 함을 의미한다.155)
물론 비국가 행위자의 참여가 특정 이익집단의 영향력 확대나 의사결정의 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될 수 있다. 특히 풍부한 자본과 전문성을 갖춘 선진국 중심의 시민사회가 논의를 주도할 경우, 개도국의 입장이 소외되는 ‘비대칭적 참여’의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단순히 참여의 문호를 개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개도국 NGO의 전문성 제고를 위한 TACB 프로그램을 체계화하고 참여 비용을 지원하는 등 실질적 기회의 형평성을 보장하는 장치가 병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보완책이 전제될 때, 비국가 행위자의 참여는 비민주성을 확대하는 기제로 변질되지 않고 거버넌스의 정당성을 보완하는 진정한 민주적 외연 확장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거버넌스의 민주화라는 제도적 틀의 정비와 함께, 환경 및 노동 기준은 협정문의 상징적인 부속 서한(side letter)을 넘어, 실질적인 핵심 통상 의무로 격상될 필요가 있다.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핵심 협약과 주요 다자간 환경 협약을 ‘무역과 지속가능발전(Trade and Sustainable Development)’ 챕터에 명문화하고, 위반 시 DSU를 통한 실질적인 이행력을 확보할 때 비로소 다자무역체제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156) 또한 모든 합의를 구속력 있는 경성법(hard law)으로만 포섭하려는 경직된 접근에서 벗어나, 특정 민감 사안에 대해서는 연성법(soft law)이나 정치적 선언을 활용함으로써 유연한 다자간 합의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외연을 넓힐 필요가 있다.157)
Ⅵ. 결론
결론적으로 다자무역체제는 1995년 출범 당시 지향했던 단일하고 보편적이며 엄격한 사법 적극주의에 기반한 평면적 구조로는 더 이상 회귀할 수 없으며, 회귀해서도 안 된다.158) 현재의 위기는 강대국 간 지정학적 무기화와 국가자본주의의 부상이라는 현실을 수용하기에는 기존의 법리가 지나치게 경직되었던 반면, 이를 보완할 정치적 대화 메커니즘이 부재했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결과이다.159)
다자무역체제의 지속 가능성은 ‘체계화된 소다자주의’로의 이행, DSU의 사법적 월권 방지를 통한 회원국의 통제력 회복, 경제적 강압 조치에 대한 신속·중립적인 구제 기제의 확보, 그리고 GATT 1994 제28조 등 유연성 조항의 적극적 활용이라는 실용적 대안들을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계·통합해 내는가에 달려 있다. 이는 결코 다자주의의 포기나 무법칙 상태로의 전락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회원국 간의 극심한 이질성을 포용하면서도 최소한의 공통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과거의 이상주의에서 탈피하여 ‘더 적은 법과 더 많은 정치(Less law and more politics)’라는 현실 세계의 지혜160)를 체제 내부로 내재화하는 질적 전환으로 이해된다.
국제사회는 과거 보호무역의 난립과 무차별적인 관세 보복이 초래한 전례 없는 경제공황을 역사를 통해 이미 목도한 바 있다. 규칙 없는 세계는 각자의 주권이 회복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오직 힘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a war of every man against every man)’의 장에 불과하다.161) 미국, 중국, EU 등 주요 경제권의 결단과 중견국들의 적극적인 가교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에 따라 다자무역질서의 급격한 분절을 방지하고 실용적인 ‘다층적 기하학’의 질서로 연착륙하는 것은 21세기 무역 규범이 직면한 핵심적 과제이자 중요한 선택지로 사료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