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며
민법 제580조에 따라 물건의 하자담보책임을 묻고자 하는 매수인은 목적물에 하자가 존재한다는 점에 대하여 증명할 책임을 부담한다. 그러나 고도의 기술이 집약되어 대량으로 생산되는 상품의 하자로 인해 손해를 입은 경우 매수인, 특히 소비자가 그 하자를 입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하자담보책임에도 제조물책임에서와 같이 증명책임을 완화하여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에 대하여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제조업자나 수입업자로부터 제품을 구매하여 이를 판매한 자가 그 매수인에 대하여 부담하는 민법 제580조 제1항의 하자담보책임에는 제조업자에 대한 제조물책임에서의 증명책임 완화의 법리가 유추적용된다고 할 수 없다고 하면서 하자담보책임에 증명책임 완화 법리는 유추적용할 수 없음이 원칙임을 밝혔다.1) 이는 제조물책임에서 원고의 증명책임을 완화하는 것은 기술집약적 제조물의 경우 일반적으로 제품의 생산과정은 전문가인 제조업자만이 알 수 있어서 그 제품에 어떠한 결함이 존재하였는지, 그 결함으로 인하여 손해가 발생한 것인지 여부를 일반인으로서는 밝힐 수 없는 특수성이 있어서 소비자 측이 제품의 결함 및 그 결함과 손해의 발생과의 사이의 인과관계를 과학적·기술적으로 입증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는 정보의 편재 내지 불균형을 감안하여 손해의 공평·타당한 부담을 이루기 위한 것인데, 목적물이 제조되어 유통되는 경우 매도인이 단순 중간 상인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고 통상적으로 그러한 매도인은 목적물의 하자에 대한 지배가능성이 없으므로 매도인 역시 하자로 인한 손해의 발생을 예견하는 등 하자에 대한 지식과 능력을 갖추지 못하여 증명책임을 완화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하자담보책임에서 증명책임을 완화해야 한다는 논의의 배경에는 제조물책임법의 적용범위가 제한된다는데 있다. 즉, 제조물책임법은 당해 제조물에 대해서만 발생한 손해에 대하여는 법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2) 하자로 인한 손해가 당해 제조물에만 국한하여 발생한 경우에는 제조물책임을 묻지 못하고, 하자담보책임이나 채무불이행책임으로 해결하여야 한다.3) 이에 손해가 제조물에만 발생하였는지 혹은 확대손해가 발생하였는지 여부에 따라 원고의 청구원인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증명책임도 달라지는데, 기술집약적 대량생산 상품에서 결함 내지 하자를 증명하는 현실적인 어려움은 동일하므로 우연히 당해 상품에 국한하여 손해가 발생한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하자담보책임에서도 증명책임을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본고가 분석 대상으로 하는 하자담보책임 사건은 제조물의 결함으로 인한 손해가 제조물 자체에 국한되는 경우를 전제로 한다는 점을 먼저 밝혀둔다. 2017년 제조물책임법 개정으로 제3조의2(결함 등의 추정)가 신설되어 일정한 요건 하에서 결함과 인과관계를 추정하는 입증완화 구조가 도입되었으나, 이 규정은 제조물책임법 제3조가 전제하는 생명·신체 및 다른 재산에 대한 확대손해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제조물 자체 손해에 대하여는 적용이 배제된다. 따라서 최근 아파트 주차장 화재 사건 등에서 2차 손해·확대손해가 문제된 것과는 달리, 동일한 제조상의 결함임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손해가 당해 제조물에만 머무른 경우에는 여전히 민법상 하자담보책임·채무불이행책임이 문제되며, 이 영역에서의 구조적 입증곤란 문제는 제조물책임법의 존재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다. 본고는 바로 이 지점, 즉 손해범위의 차이만을 이유로 하여 하자담보책임 영역에서 매수인에게 전면적인 증명책임을 지우는 것이 정당한가, 그리고 증명책임 완화 법리 유추적용의 가능성과 한계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대법원도 제조물책임에서의 이론은 정보의 편재 내지 불균형을 감안하여 손해의 공평·타당한 부담을 이루기 위한 것이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제조업자나 수입업자로부터 제품을 구매하여 이를 판매한 자에게는 적용할 수 없다고 설시하면서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해당 법리를 유추적용 할 수 없다고 하여, 예외적으로 하자담보책임에서도 증명책임 완화 법리를 유추적용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다만 대법원은 ‘특별한 사정’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구체적 기준이 제시하지 않았는데, 서울중앙지방법원 2016. 1. 27. 선고 2015나9478 판결(이하 ‘대상판결’)은 매도인과 제조자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 예외 요건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설시하면서 원고(매수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대상판결은 하자담보책임 영역에서 제조물책임법상의 증명책임 완화 법리를 명시적으로 유추적용한 초기 사례로서, 매도인과 제조자의 관계, 정보·지배영역, 하자보수 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예외적 유추적용의 요건을 제시하고 실제로 매수인의 입증부담을 완화하였다. 이후 하급심 판례들도 대체로 대상판결이 제시한 틀을 원용하고 있으며, 그간 법리적 전환을 가져올 만한 입법이나 판례의 변화가 없었다는 점에서, 대상판결은 하자담보책임에서 증명책임 완화 법리의 유추적용 가능성과 그 한계를 검토하기 위한 적절한 분석 대상으로 판단된다.
본 논문은 하자담보책임에서의 증명책임 완화 가능성에 대하여, ① 하자담보책임에서의 증명책임 완화의 필요성과 근거, ② 제조물책임에서의 증명책임 완화 논리의 본질과 하자담보책임에 유추적용 가능성, ③ 소비자 보호 논리의 법리적 타당성과 균형성을 중심으로 하여 제조물책임에서의 증명책임 완화 논리를 하자담보책임에 유추적용하는 것에 대한 문제점을 분석하면서, 향후 입법적·해석론적 정립 방향을 도출해 보고자 한다.
Ⅱ. 대상판결 - 서울중앙지방법원 2016.1.27. 선고 2015나9478 판결4)
피고는 자동차 등의 제조·판매업을 영위하는 회사로서, 이 사건 자동차를 제조하여 2011. 6. 9. 소외인 A에게 매도하였다. 이후 2012. 6. 23 경 A가 이 사건 자동차를 운행하던 중 화재가 발생하여 차량이 파손되었고, 화재를 진압한 대구 서부소방서는 화재의 원인을 규명하지 못하였다.
한편 원고는 이 사건 자동차에 대하여 자동차 종합보험을 체결한 보험자로서 화재 사고 이후 차량 가액 상당의 보험금을 A에게 지급하였다. 이에 따라 원고는 A가 피고에 대하여 가지는 손해배상채권을 대위취득하였고 피고를 상대로 구상금 지급을 구하는 본소를 제기하였다.
1심 법원은 민법상 하자담보책임에서의 '하자'라 함은 매매의 목적물에 물질적인 결함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하자의 존부는 일반적으로 어떠한 종류의 물건이 통상 가지고 있어야 할 품질·성능을 표준으로 하여 판단하여야 하고, 그에 대한 입증책임은 이를 주장하는 매수인에게 있으나, 이 사건 자동차와 같이 고도의 기술이 집약되어 대량으로 생산되는 제품에 대해 최종 소비자인 매수인이 매도인을 상대로 담보책임을 묻는 경우 매도인의 지위, 매도인과 제조자와의 관계나 제조물에 대한 정보 공유 가능성, 매도인의 하자 보수 능력 등을 감안하여 매도인을 제조자와 동일시 할 수 있다고 볼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다면 제조물책임의 입증책임 완화의 법리6)를 하자담보책임의 경우에 유추하여 하자 내지 하자와 손해와의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이 사건에서 인정된 사실에 따르면 A는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방법으로 이 사건 자동차를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자동차에서 화재가 발생하였고, 이 사건 화재는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사용에 의하여서는 통상 발생하지 아니하는 사고이며, 피고의 배타적 지배하에 있는 영역에서 발생한 것으로 인정되므로 이 사건 자동차에는 하자가 인정되고 제조자이자 매도인인 피고는 이 사건 자동차 매수인인 A에게 하자담보책임에 의한 손해배상의 의무를 부담하며 원고에게 이 사건 화재로 인한 손해배상액의 범위 내에서 지급한 보험금 상당의 구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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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이 사건 자동차 소유자인 A는 2012. 6. 23. 22:10 ∼ 22:30 경 경북 청도시에서 대구광역시를 향해 이 사건 자동차를 정상적인 용법에 따라 운행하던 중 대구 달성군 C에 있는 D앞 도로에서 적색신호에 정지하였다가 다시 주행하였다. 그런데 옆차가 경음기를 울리자 B는 일단 정차한 다음 이 사건 자동차를 확인해보니 불이 엔진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였고, 이에 15미터 정도 이 사건 자동차를 이동하여 갓길에 세운 후 이 사건 화재의 진화를 시도하였다. 그 후 이 사건 화재는 대구 서부소방서 가창소방소 진압 직원에 의해 소화되었으나, 이 사건 자동차는 이 사건 화재로 인해 엔진 등이 심하게 파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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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이 사건 화재는 이 사건 자동차 구매일로부터 약 1년 뒤에 발생하였고, 이 때까지 총 주행거리는 약 8,000킬로미터 정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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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피고는 이 사건 자동차의 엔진 및 변속기의 경우 5년/10만 킬로미터, 차체 및 일반 부품의 경우 2년/4만 킬로미터의 각 무상수리를 (품질)보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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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안전(화재) 공학 분야의 전문가인 F(제1심 증인)은 이 사건 화재가 이 사건 자동차의 엔진룸 중 좌측 부위에서 발생하였고, 화재원인으로 배터리 플러스(+)단자에 삽입하여 나사체결하는 고리의 전기적인 스파크로 인해 이 사건 화재가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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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피고가 2012. 7. 12. 이 사건 자동차에 관하여 장치별 세부(정밀)조사를 마친 결과 i) 이 사건 화재의 발화점은 엔진룸 내부(배터리 및 연료필터 부근)인 것으로 확인, ii) 화재 차량의 Engine ECU 탈거 후 동일사양 차량에 장착 후 DTC 확인결과 Error 항목 없음, iii) 차량 전체 고객 과실의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음이라고 조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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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피고 직원으로서 위 세부(정밀)조사에 참여한 제1심 증인 H도 이 사건 화재와 관련하여 차주(고객)의 과실로 인정할 만한 문제점은 발견하지 못하였고, 전용진단기로 고장코드를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자동차에 이상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증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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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A는 2012. 5.경 이 사건 자동차에 네비게이션을 설치한 이외에는 전기장치를 임의로 개조하거나 엔진출력을 증가하기 위한 개조 등을 한 적이 없다.
제조물책임에서 증명책임을 완화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 제품의 생산과정을 전문가인 제조업자만이 알 수 있어서 그 제품에 어떠한 결함이 존재하였는지, 그 결함으로 인하여 손해가 발생한 것인지 여부를 일반인으로서는 밝힐 수 없는 특수성이 있어서 소비자 측이 제품의 결함 및 그 결함과 손해의 발생과의 사이의 인과관계를 과학적·기술적으로 입증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는 정보의 편재 내지 불균형을 감안하여 손해의 공평·타당한 부담을 이루기 위한 것이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제조업자나 수입업자로부터 제품을 구매하여 이를 판매한 자가 그 매수인에 대하여 부담하는 민법 제580조 제1항의 하자담보책임에는 제조업자에 대한 제조물책임에서의 증명책임 완화의 법리가 유추적용된다고 할 수 없다(대법원 2011. 10. 27. 선고 2010다72045 판결). 그러나 매도인의 지위, 매도인과 제조자와의 관계나 제조물에 대한 정보 공유 가능성, 매도인의 하자 보수 능력 등을 감안하여 매도인을 제조자와 동일시할 수 있다고 볼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라면, 제조업자에 대한 제조물책임에서의 증명책임 완화의 법리를 민법 제580조 제1항 소정의 매도인의 하자담보책임에 유추적용할 수 있다.9)
법원은 위와 같은 법리를 기초로, 피고는 매도인이자 제조자이므로 하자담보책임에도 제조물책임에서의 증명책임 완화 법리를 유추적용할 수 있고, A가 이 사건 자동차를 정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자동차 엔진룸 내부에서 이 사건 화재가 발생하였고, 자동차의 엔진과 같은 핵심 부품은 피고의 배타적인 지배하에 있는 영역이라고 봄이 상당하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 사건 자동차(엔진)에는 거래통념상 기대되는 객관적 성질·성능을 갖추지 못한 결함(하자)이 있었고, 그러한 결함으로 말미암아 이 사건 화재가 발생하였다고 추정된다고 하며 피고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였다.10)
Ⅲ. 하자담보책임에서 매수인의 증명책임 완화의 가능성과 한계
증명책임은 소송상 어느 사실의 진위가 최종적으로 불명확한 경우에 불리한 법률판단을 받도록 되어 있는 당사자 일방의 위험 또는 불이익을 말하는 것으로, 사실의 불확정 상태에서 법률효과의 귀속을 결정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우리 민사소송법은 증명책임의 분배 기준을 명문으로 규정하지 않지만, 통설과 판례는 법규의 구조에 따라 증명책임을 분배하는 이른바 법률요건분류설(규범설)의 입장을 취한다. 이에 따르면 각 당사자는 자기에게 유리한 법규의 요건사실에 관하여 증명책임을 부담하고, 소송요건에 관한 요건사실 역시 원칙적으로 원고에게 귀속된다.11) 이러한 입장은 “어떤 사실을 누구의 책임 하에 입증하도록 할 것인가”를 개별 사건의 형평이 아니라 입법자가 구성한 법규범의 구조에서 찾으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법률요건분류설은 역사적으로 입법자의 우위와 법관의 법적 구속을 핵심 원리로 삼았던 자유주의 법치국가의 형성과 함께 정립된 이론으로서, 입법자의 가치판단이 법규범의 구조 속에 이미 구현되어 있으므로, 증명책임 역시 법규범의 구조에 충실하게 분배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12)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증명책임의 분배는 법규범 해석의 문제로 귀결되고, 그 결과 법적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이 확보된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소위 위험사회로 대변되는 현대사회에서는 정보의 편재, 당사자 간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불균형, 기술적 복잡성을 특징으로 하는 분쟁이 증가함에 따라, 형식적인 법률요건만으로는 실질적 정의를 구현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다수 발생하였다. 이에 법률요건분류설에 따라 증명책임을 분배할 경우 구체적 타당성에 반하는 결과가 초래되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의료과오소송, 제조물책임소송, 환경소송 등이 대표적인 예로, 이러한 분쟁유형에서는 피해자에게 전통적 의미의 엄격한 증명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사실상 권리구제를 봉쇄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에 따라 법규범의 형식적 구조보다는 “어느 당사자가 그 위험을 지배했는가”, “어느 쪽이 관련 증거에 더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대안 이론들이 제기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독일에서 발전한 위험영역설이다.13) 위험영역설은 결과발생의 위험을 지배한 자에게 증명책임을 부담시켜야 한다는 입장에서 증명책임 분배를 실질적 위험지배의 문제로 파악하고14) 법률의 규범 구조가 아닌 위험영역을 기준으로 증명책임을 배분하므로 법관이 위험영역을 판단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법관에 의한 법형성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위험영역설에서는 이러한 법형성이 정당화되기 위해서 우선 법률의 흠이 존재한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하고, 나아가 동일한 사안을 함부로 달리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평등의 소극적 원칙, 피해자가 증명곤란 상태에 있고 상대방이 그 지배영역과 증거에 보다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는 경우에는 증명이 가능한 자에게 증명책임을 지워야 한다는 정의의 요청 및 손해배상책임의 예방적 기능 등이 함께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15)
위험영역설은 “증명책임 분배는 형식적 법규 구조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으며, 당사자 간 정보 비대칭과 사회적 형평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위험영역이라는 개념 자체가 추상적이고 탄력적이어서, 이를 증명책임 분배의 일반원칙으로 삼을 경우 법적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이 현저하게 저하될 위험이 있다는데 한계가 있다. 구체적 사건마다 법관의 가치판단에 따라 위험영역의 범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위험영역설은 일방의 증명곤란과 상대방의 증명가능성이라는 하나의 증거법적 관점에서 법률의 흠을 발견하고 이와 동시에 보충하나, 왜 이러한 측면을 중요하게 고려하는지에 대하여는 별다른 근거를 제시하지 아니하여, 해석론과 입법론의 경계를 흐리거나 심정사법(心情司法)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는 비판도 있다.16)
한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법률요건분류설의 약점은 변화한 사회 환경에서 다양하게 발생하는 사건 유형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형평의 이념에 맞지 않는 결과가 도출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에 우리 판례는 증명책임 분배의 근본 원칙인 법률요건분류설은 유지하되, 사실상 추정, 일응의 추정, 표현증명, 개연성 이론 등 다양한 완화 기법을 통하여 구체적 타당성을 보완해 왔다. 일정한 간접사실이 입증되면 주요사실의 존재를 경험칙에 따라 추정하거나, 높은 개연성이 인정되는 경우 그에 기초하여 법적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이 그것인데, 특히 고도의 개연성이 있는 경험칙을 이용하여 간접사실로부터 주요사실을 추정하는 것을 일응의 추정 또는 표현증명이라고 하며, 주로 손해배상 사건에서 인과관계나 과실의 인정에 사용된다. 제조물책임에서의 증명책임 역시 일응의 추정 방식을 통하여 일정 부분 완화되어 왔다.
이와 같은 접근은 증명책임 분배의 기본 틀로서 법률요건분류설을 유지하면서도, 구체적 사건에서의 형평과 절차적 정의를 확보하려는 절충적 시도라고 평가할 수 있다. 요컨대 증명책임은 “법적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이라는 가치와 “구체적 형평과 실질적 정의”라는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여야 하고, 당사자 사이에 공평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고려하여 분배되어야 한다.17) 위험영역설(또는 증거거리설) 역시 한계가 있으므로 이를 독립된 분배기준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나, 이들 견해가 제기하는 문제의식 - 증명책임 분배에 있어 당사자 간 정보 접근성·입증 난이도·사회적 지위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은 참고할 만하다. 따라서 증명책임 분배를 살핌에 있어서는 우리 통설과 판례가 취하고 있는 법률요건분류설의 틀 안에서 사실상 추정 등 완화 기법을 운용하면서 위험영역설의 접근 방식을 보완적 고려요소로 활용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제조물책임 사건은 고도의 기술을 기반으로 설계·제조·품질관리 등 여러 단계가 얽혀 있어 원인 규명시 이러한 복합적인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어 그 본질상 사실관계의 입증이 곤란하다는 점에서 법률요건분류설이 난점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영역 중 하나이다. 더욱이 제조공정과 관련 정보·자료는 대부분 제조자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일반 소비자나 피해자는 그 내부 구조나 과정에 접근하기 어려운, 이른바 증거의 편재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영역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증명책임 원칙을 그대로 적용하여 피해자에게 결함의 구체적 원인과 인과관계를 모두 입증하도록 하는 것은, 사실상 권리구제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제조물책임 분야에서는 이른 시기부터 증명책임 완화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우리 대법원은 1970년대 후반 이후 제조물의 결함으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 사건에서 경험칙에 기초한 사실상 추정 이론을 점진적으로 전개해왔다.18) 소위 사료 사건19), 변압변류기 사건20), TV 폭발 사건21) 등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판례에서, 피해자가 결함의 직접적 원인을 구체적으로 특정하지 못하더라도, ① 사고가 제조자의 배타적 지배영역 내에서 발생하였고, ② 그와 같은 유형의 사고는 통상 과실 없이는 발생하지 아니하며, ③ 제조자가 다른 원인(피해자의 관리소홀이나 제3자의 개입 등)을 입증하지 못한 경우에는 제조물의 결함 및 인과관계의 존재를 사실상 추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판례상 법리는, 증명책임의 전환을 선언하는 대신, 일정한 간접사실의 증명만으로 결함과 인과관계를 추정하는 구조를 취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피해자의 증명부담을 실질적으로 경감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는 위험영역설의 사고방식인 위험을 지배하는 자에게 증명의 부담을 지우려는 발상이 법률요건분류설의 틀 내에서 일응의 추정이라는 방식으로 작동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위와 같이 판례가 축적해 온 법리는 2017년 개정 제조물책임법에 의해 입법화되었다. 제조물책임법 제3조의2는 ① 제조물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는 과정에서 손해가 발생하였고, ② 그 손해가 제조업자의 실질적인 지배영역에 속하는 원인에 의해 초래되었으며, ③ 그 손해가 결함이 없었다면 통상 발생하지 아니한다는 점을 증명한 경우에 해당 손해는 제조물의 결함으로 인하여 발생한 것으로 추정한다는 구조를 취하고, 제조업자는 제조물의 결함이 아닌 다른 원인으로 인하여 손해가 발생하였음을 증명할 책임을 부담하도록 한다.
이는 입법자가 제조물책임 분야에서 증명책임 완화 법리를 채택하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제조물책임법에서 증명책임 완화가 제도적으로 수용된 배경에는, 첫째, 제조물 사고의 구조적 특성상 피해자에게 전통적인 증명책임을 부과하면 사실상 권리구제가 불가능하다는 현실, 둘째, 제조자가 정보·기술 측면에서 우월한 지위에 있어 관련 사실의 규명에 보다 적합한 위치에 있다는 점, 셋째, 결함 있는 제조물로 인한 위험은 사회 전체가 분담할 필요가 있다는 위험분담 이념이 있다. 다시 말해, 제조물책임에서의 증명책임 완화는 단지 피해자 보호라는 정책적 고려뿐 아니라, 정보비대칭 구조와 위험분담 원리를 반영한 규범적 조정이라고 볼 수 있다.
하자담보책임에 제조물책임의 완화 법리를 유추 적용할 수 있는지 여부를 논의할 때에는 위와 같은 제조물책임에서 증명책임이 완화된 배경이 고려되어야 한다. 제조물책임에서는 그 책임의 구조적 특성과 정책적 목적을 전제로 입증완화가 제도화되었지만, 하자담보책임 영역은 그 전제와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법경제학적 관점에서 증명책임을 정보를 보유하거나 보다 저비용으로 증거를 수집할 수 있는 자에게 귀속시키는 것이 사회 전체의 거래비용을 최소화한다는 논리가 있다.22) 예를 들어 제조물책임 영역의 경우, 제조물에 대한 정보와 자료는 제조자가 집중적으로 보유하고 있고, 피해자는 그 정보를 파악하는 데 막대한 비용을 부담해야 하거나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정보를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증명책임의 부담을 피해자에게 지우는 원칙을 엄격하게 유지하는 것은 다수의 정당한 청구를 좌절시키고, 제조자에게는 사고 예방에 필요한 적정 수준의 주의 의무를 기울이는 것을 유인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23) 반대로, 일정한 요건 하에 제조자에게 반증부담을 지우는 방식으로 증명구조를 조정하면, 제조자가 사고 예방조치와 품질관리 비용을 감수하는 대신 그 결과 사고의 발생 가능성이 줄어들어 장기적으로는 사회 전체의 사고비용과 분쟁비용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정보의 집중도가 높고 피해자의 접근비용이 과도한 영역에서 일정한 범위 내의 입증완화는 ’누가 위험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가‘라는 기준에 따라 위험과 비용을 재배분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증명책임을 완화하는 경우 제조자 내지 소송 상대방의 방어권을 과도하게 제약할 위험이 있다. 현실에서 제조물로 인한 손해 발생의 원인이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률적인 추정 구조는 결함이 아닌 다른 요인(사용상의 과실, 외부적 개입 등)에 기인한 손해까지 포섭하여 부당한 책임 전가와 과중한 부담을 초래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사용상의 과실의 경우 그에 대한 정보-물건 사용과 관련된-는 대부분 피해자가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24)
증명책임의 완화는 궁극적으로 어떠한 요건 하에, 어느 범위에서 허용할 것인지의 문제이다. 그 판단에 있어서는 사안의 성격, 증거의 분포, 당사자의 관리가능성, 외부요인의 개입 가능성 등 구체적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 그러한 고려 없이 결과적 타당성을 기하기 위한 증명책임의 완화는 개별 사건에서의 부당한 책임 귀속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분쟁 당사자 모두에게 과도한 방어비용·보험비용의 부담을 초래하여 거래비용을 전반적으로 상승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결국 증명책임 완화 법리는 사회적 형평의 확보와 법리적 정합성, 경제적 효율성 사이의 균형 속에서만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데, 제조물책임 영역에서와 같이 구조적 정보 비대칭과 위험분담의 필요성이 명백한 경우에는, 증명책임의 완화를 제도적으로 인정할 이유가 크지만, 그러한 전제가 없는 영역인 경우 완화 법리를 확장하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하자담보책임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제조물책임에서 정립된 증명책임 완화 법리를 하자담보책임에 유추 적용할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할 때에는, 단순히 피해자 보호의 필요성만이 아니라, 해당 영역에서의 정보 비대칭 구조, 위험분담의 필요성, 계약책임과 위험책임의 관계, 법체계 전체의 정합성을 함께 고려하여야 하는 것이다.25)
하자담보책임은 매매계약의 목적물이 계약에서 정한 내용에 부합하지 아니하는 경우 매도인이 매수인에게 부담하는 특수한 책임을 의미한다. 민법 제580조 제1항은 매매의 목적물에 하자가 있는 때에는 매도인은 하자에 대하여 담보책임을 진다고 규정함으로써 일반적인 채무불이행책임과는 별도로 목적물의 하자에 관한 규율을 두고 있다. 하자담보책임은 매도인의 과실 유무와 관계없이 일정한 요건 하에서 책임이 인정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무과실책임적 성격을 가지며, 거래안전과 계약신뢰 보호를 중시하는 계약책임의 특수형태로 이해된다. 하자담보책임은 계약해제, 대금감액, 보수를 수반하는 이행청구, 손해배상청구 등 다양한 구제수단이 병존하며, 당사자는 사안에 따라 그 중 적절한 수단을 선택하여 행사할 수 있다. 손해배상청구 역시 하자담보책임의 중요한 기능이지만, 제도의 핵심은 계약상 급부의 내용적 불완전성을 시정하고 계약 균형을 회복하는 데에 있다.
한편 급부목적물의 하자는 그 자체의 교환가치·사용가치 감소에 그치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목적물 외의 다른 법익에까지 손해가 확대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예컨대 하자 있는 기계의 폭발로 인하여 인접 재산이 손해를 입거나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경우와 같이, 이른바 확대손해가 문제되는 영역에서는 하자담보책임만으로 책임 분담 구조를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이러한 영역에서는 일반 채무불이행책임이나 불법행위책임, 나아가 제조물책임 법리와의 관계에서 책임 분담이 논의된다. 따라서 하자담보책임은 무엇보다도 급부목적물 자체의 하자와 그로 인한 계약 내부의 손해를 중심으로 위험과 손해를 조정하는 제도로 기능하며, 그 외부로 확장되는 손해에 대하여는 다른 책임법리가 보완적으로 작동하는 구조라고 이해된다.
이처럼 민법 제580조의 구조와 기능을 전제로 할 때, 하자담보책임은 계약관계 내부의 위험과 손해를 조정하는 계약책임의 특수형태라는 점이 분명하다. 따라서 제조물책임상의 증명책임 완화 법리를 그대로 도입할 경우, 그 법리가 상정하고 있는 안전성 중심의 위험책임 구조 및 확대손해의 구제와 민법 제580조가 담당하고 있는 계약 내부의 위험조정 기능 사이에 마찰이 발생할 수 있다.
법률요건분류설에 의할 경우, 민법 제580조 제1항에 따라 매수인이 하자담보책임에 기하여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건사실의 존재를 주장·입증하여야 한다.
즉, 매수인은 인도 당시 목적물에 하자가 존재하였음을 주장·입증하여야 하고, 매도인은 반증으로서 그 하자가 매수인의 사용·보관상의 사유로 새로이 발생한 것임을 주장·입증함으로써 책임을 면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입증구조가 현대의 기술집약적 상품거래 현실에서 매수인, 특히 소비자인 매수인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자동차, 전자제품 등 고도의 기술집약적 제품에서 하자의 발생원인은 대부분 설계·제조·품질관리 단계에 있는데, 매수인이 인도 시점에 하자가 존재하였는지 여부를 기술적으로 특정하고, 그 원인을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이와 같은 구조적 입증곤란을 이유로, 매수인의 입증부담을 완화하거나 일정한 사실상 추정구조를 도입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견해가 있다.26) 제조물책임의 증명책임 완화 법리를 가져오거나, 인도 후 일정 기간 내에 발생한 하자에 대하여는 인도 시 존재를 추정하는 규정을 두거나, 정상적인 사용 중에 발생한 특정 유형의 손해에 대하여는 하자 존재 및 인과관계를 일응 추정하는 방식이 거론된다. 실제로 독일 민법은 제477조에서 매수인이 인도 후 1년 이내에 하자를 발견한 경우, 그 하자는 인도 시 이미 존재한 것으로 추정한다는 규정하고 있다.27) 이 규정은 EU 소비재매매지침(1999/44/EC)28) 제5조 제3항을 국내법으로 수용한 것으로,29) 현대의 기술적으로 복잡한 소비재 거래에서 소비자가 인도 당시 존재하던 하자의 구체적 내용과 발생 시점을 입증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고려하여, 일정 기간 내에 드러난 하자에 관하여는 인도 시 존재를 제도적으로 추정함으로써 소비자의 입증부담을 구조적으로 경감하려는 취지로 이해된다.30) 우리나라 자동차관리법 제47조의331)에서도 자동차가 인도된 날부터 1년 이내에 발견된 하자는 인도된 때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는 추정규정을 두고 있다. 이러한 규정이 하자의 존재 자체를 추정하는 규정은 아니나, 적어도 하자의 존재 시기와 관련하여 증명곤란을 일정 부분 제도적으로 완화하기 위한 장치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민법에는 하자담보책임의 증명책임과 관련된 규정이 없고, 대법원 또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라는 단서를 두어 예외 가능성을 전면 배제하지는 않았으나, 제조물책임 영역에서 발전해 온 완화 법리를 하자담보책임에 적용하는 것을 부정한바, 우리 법제에서 하자담보책임의 증명구조는 여전히 원칙적 분배에 머물러 있고, 현실적인 입증곤란을 이유로 한 완화·추정 구조는 판례·입법 어느 쪽에서도 명확히 정립되어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입증곤란의 구조가 제조물책임에서의 결함 입증곤란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제조물책임에서 형성된 증명책임 완화 법리를 하자담보책임에도 유추적용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해결방안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나 증명 곤란의 유사성만을 이유로 이러한 유추적용을 허용할 수 있는지는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
하자담보책임과 제조물책임은 모두 목적물의 결함 또는 하자를 원인으로 하는 손해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그 법적 성질과 보호목적은 근본적으로 상이하다. 하자담보책임이 계약상의 급부불이행을 전제로 한 계약책임인 반면, 제조물책임은 사회적 안전보장과 위험분담을 목적으로 하는 특수한 불법행위책임으로 이해된다.32) 이에 따라 하자담보책임의 직접적인 목적은 계약상 이행이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매수인의 기대이익을 보전하는 데 있는 반면, 제조물책임의 목적은 제조물의 결함으로 인한 생명·신체·재산상의 손해로부터 소비자를 보호하는 데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하자담보책임은 계약관계 내에서의 불완전급부에 대한 구제제도이고, 제조물책임은 위험분담의 원리에 기초한 일종의 사회적 손해배상제도로서 그 기능과 범위가 다르게 규정된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자담보책임에서도 제조물책임의 증명책임 완화 논리를 유추적용할 수 있는가? 이 논의의 배경에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술집약적 상품의 하자로 인한 손해가 발생하였음에도 손해가 해당 제조물에만 국한된 경우에는 제조물책임법이 적용되지 않고 하자담보책임에 기하여 구제되어야 하는 현재의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 즉 동일한 원인(제조상의 결함)에 의해 발생한 손해임에도 불구하고, 손해의 유형(제조물 자체 손해인지, 다른 재산·신체에 대한 확대손해인지)에 따라 적용 법리가 달라지는 불합리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제조물책임의 입증완화 법리를 하자담보책임에도 유추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은 이러한 사안의 실질적 동일성을 근거로 한다.33) 제조상의 결함으로 인해 발생한 손해라는 점에서는 사안의 구조가 동일하고, 단지 손해가 제조물에만 그쳤는지 여부에 따라 적용 법률이 달라지는 것은 증명의 구조적 측면에서 보면 우연적 요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체계상 서로 다른 책임구조를 전제로 설계된 제도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사안의 실질적 동일성뿐만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법적 근거와 체계적 정합성이 확보되어야 하기 때문에 단순한 사안 유사성만으로 유추적용의 정당성이 확보되지는 않는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증명책임의 분배는 원칙적으로 법률요건 분류설에 따르되, 구체적 사안에서 발생하는 증명곤란을 고려하여 표현증명, 일응의 추정 등 다양한 완화기법을 통해 합리적으로 조정될 수 있다. 계약책임이라는 이유만으로 증명책임 완화가 원칙적으로 금지되는 것은 아니며, 증명책임의 귀속에 관하여 절대불변의 고정적 기준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별다른 논리적 설명이나 제도적 장치 없이, 결론의 타당성만을 이유로 증명책임 완화 법리를 다른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의료·환경·제조물과 같이 고도의 전문성과 구조적 정보 비대칭이 전제된 특수영역에서 발전해 온 증명책임 완화 법리를, 아무런 추가적 정교화 없이 일반 민사거래의 매매계약에까지 확장하는 것은 신중하여야 한다.34)
주지하다시피 현행 민법은 매도인의 담보책임을 선언할 뿐, 입증책임의 분배나 완화에 관한 명문규정을 두지 않고, 제조물책임에서 입증책임 완화가 판례를 통해 점진적으로 확립되어 입법된 것과 달리, 하자담보책임의 영역은 여전히 원칙적 입증책임 구조에 머물러 있다.
유추적용은 통상 법률의 규율 공백이 존재하는 경우, 그 공백을 보충하기 위하여 유사한 사안에 적용되는 다른 규정을 차용하는 해석기법으로 이해된다.35) 다만, 여기서 말하는 공백이란 언제나 유추적용을 정당화하는 법의 흠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입법자가 특정 상황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아무런 특별 규율을 두지 않고 일반원칙에 맡긴 경우라면, 이는 규범의 결여라기보다는 입법적 선택으로 평가하여야 하며, 이런 경우까지 곧바로 ‘입법의 흠결’로 파악하여 유추적용을 시도하는 것은, 입법자가 의도적으로 설정한 규율 범위를 사후적으로 확장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36)
또한 유추적용은 단순히 공백을 메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두 단계의 심사를 필요로 한다고 보아야 한다. 첫 번째는 당해 사안과 유추하려는 규정의 전형적 규율대상 사이에 법적으로 중대한 유사성이 존재하는지(유사성 판단)를 살피는 단계이고, 두 번째는 그러한 유사성을 전제로 하더라도 해당 규정의 법적 효과를 그대로 귀속시키는 것이 정당한지(정당성 판단)를 검토하는 단계이다.37) 즉, 유사성 판단은 어디까지나 유추적용의 전제에 불과하며, 입법취지·보호법익·체계정합성·예측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정당성 판단이 별도로 뒤따르지 않는다면, 유추적용은 정당화되기 어렵다.38)
이러한 관점에서, 민법 제580조 하자담보책임에서의 증명책임 규율을 ‘입법의 흠결’로 볼 수 있는지 살펴보자. 물건 하자담보책임에서 증명책임의 귀속에 관하여 민법이 별도의 규정을 두지 않고 있다는 사정만으로, 입법자가 이를 간과하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입법자가 증명책임 일반원칙(법률요건분류설에 따른 원고 부담)을 그대로 적용하는 구조를 선택하였다고 이해할 여지가 크다. 더구나 자동차관리법과 같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영역에 대해서는 하자의 추정 규정 등 명문상 입증완화 장치를 별도로 두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입법자가 모든 하자담보 영역에서 일반적인 증명책임 완화 규정을 도입하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도 이를 누락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민법 제580조가 물건 하자에 관한 증명책임 규율을 ‘빼먹은 것’이라기보다는, 일반 원칙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입법정책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39)
설령 일정 부분에서 규율 공백의 소지가 있다고 보더라도, 곧바로 제조물책임법상의 증명책임 완화 규정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본 것처럼 유추적용의 정당성 여부는, 단순한 사실관계의 유사성이 아니라 입법목적과 보호법익, 책임구조, 법체계 전반과의 조화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한다. 제조물책임법 제3조의2는 제조물의 결함으로 인한 생명·신체 및 다른 재산에 대한 손해라는, 사회적 위험책임의 전형적 영역을 전제로 한다. 정보의 편재와 피해자의 입증곤란을 배경으로, 결함과 인과관계를 일정한 요건 하에 추정함으로써 제조자에게 위험부담을 보다 두텁게 지우는 것이 입법취지이다. 이에 비해 민법 제580조의 하자담보책임은 계약상 급부의 불완전성을 전제로 하여 당사자 사이의 교섭·대가관계를 기초로 계약의 등가성을 회복하는 것을 규범목적으로 하는 제도이며, 손해의 유형 역시 통상 목적물 자체의 상품적합성 결여에 국한된다.40)
특히 제조물책임법은 제3조에서 제조물 자체에만 발생한 손해를 명시적으로 적용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이는 확대손해에 한정하여 제조물책임을 인정함으로써, 제조자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는 정책적 선택의 결과이다.41)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조자가 매도인의 지위까지 겸하는 경우를 매개로 하여, 하자담보책임의 틀 안에서 제조물책임법상 결함 추정 구조를 유추적용한다면, 형식적으로는 민법 제580조를 근거로 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제조물 자체 손해에까지 제조물책임법상의 입증완화 법리를 확장하여 배상받게 하는 효과를 낳게 된다. 이는 입법자가 제조물책임법에서 설정한 적용범위(제조물 자체 손해 배제)를 사법해석을 통하여 우회적으로 무력화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유추는, 법의 흠결을 메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입법적 한계를 넘어서는 해석에 가까워 보인다.
증명책임의 완화 여부와 범위는 그 성격상 입법정책의 영역에 속한다. 어느 범위에서 누구의 입증부담을 경감·전환할 것인지는, 해당 분야에서의 위험분담 구조, 비용 귀속, 산업정책과 소비자보호 정책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설계하여야 한다. 이러한 강한 정책적·규범적 판단이 수반되는 영역을 법원이 유추해석을 통하여 광범위하게 확대하는 경우, 법률이 예정한 한계를 넘어서는 해석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고, 법적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을 해칠 위험도 존재한다. 우리 법이 형식상 판례법 체계를 채택하고 있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하급심에서 형성된 유추적용 논리가 반복·인용되어 누적될 경우42), 사실상 일반 규범처럼 기능하게 되는 점도 간과하기 어렵다.
이러한 점을 종합하면, 제조물책임에서 형성된 증명책임 완화 법리를 유추해석의 방법으로 민법 제580조 하자담보책임 영역에 광범위하게 도입하는 것은 법체계상·입법론 측면으로나 수긍하기 어렵다. 하자담보책임에서 입증구조의 조정이 필요하다면, 이는 개별 판결에 의한 점진적 확장이 아니라 입법자가 필요성과 범위를 검토하여 명문의 형태로 규율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타당하다.
Ⅳ. 대상판결의 평가와 정책적 검토
대상판결은 고도의 기술이 집약되어 대량으로 생산되는 제품에 대해 최종 소비자인 매수인이 매도인을 상대로 담보책임을 묻는 경우, 매도인이 제조업자와 동일하거나 이에 준하는 지위에 있을 때 제조물책임의 입증책임 완화 법리를 하자담보책임에도 유추적용할 수 있다고 판시하였다. 구체적으로 판결은 “매도인의 지위, 제조자와의 관계, 제조물에 대한 정보 공유 가능성, 매도인의 하자보수 능력 등”을 고려하여 매도인이 제조자와 동일시될 수 있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입증완화 법리의 유추적용을 허용하였다.
이는 기존 대법원 2010다72045 판결이 원칙적으로 유추적용을 부정한 입장과 비교할 때, 매수인의 증명책임 완화를 인정한 대표적인 하급심 판결로서 의미를 가진다.43) 하자담보책임과 제조물책임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불합리를 해소하려는 시도로서, 소비자거래 현실에서의 증명곤란을 고려하여 법리를 정책적으로 보완하려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대상판결은 그 적용 기준으로 ‘매도인과 제조자의 동일시 가능성’이라는 추상적 요소를 제시함으로써 법적 예측가능성에 불확실성을 초래하였다. 판결이 제시한 고려요소들은 위험영역설의 사고와 유사하며, 위험영역설에 제기되는 비판이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즉, ‘특별한 사정’의 범위는 법리의 정당성보다 소비자 보호라는 정책적 목표를 우위에 둔 접근으로 평가될 여지가 있다. 또한 대상판결은 매도인의 지위, 제조자와의 관계, 정보공유 가능성 등을 이유로 매도인을 제조자와 동일시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제조물책임법이 확대손해를 전제로 설계된 위험책임 체계라는 점과 민법 제580조가 계약책임 구조 속에서 기능한다는 점 간의 관계에 대한 분석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그 결과 유추적용의 기초가 되는 규범적 정당성에 대한 판단이 충분히 제시되지 않은 채, 입증곤란이라는 정책적 고려만이 전면에 부각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개별 사안의 구체적 타당성 측면에서 보면, 본건은 화재사고로 인해 양측의 과실 여부를 판단하기 매우 어려운 사안이었다. 증명책임을 엄격히 적용할 경우 사실관계 불명에 따른 불이익은 원고에게 돌아가야 하나, 법원은 심증상 그러한 결론이 타당하지 않다고 보아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제조물책임 관련 사안과 유사하되 청구원인만 상이한 사안에서 개별적 부당함을 시정하기 위해 손쉽게 해당 법리를 유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남는다.
대상판결이 제시한 유추적용의 예외 조건을 다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매도인의 지위, 매도인과 제조자와의 관계나 제조물에 대한 정보 공유 가능성, 매도인의 하자 보수 능력 등을 감안하여 매도인을 제조자와 동일시할 수 있다고 볼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이러한 조건은 ① 고도의 기술이 집약되어 대량으로 생산되는 제품의 하자일 것, ② 매도인을 제조자와 동일시할 수 있는 관계에 있을 것이라는 두 가지 핵심 요건으로 구성된다. 이하에서는 각 요건의 의미와 한계를 차례로 검토한다.
‘고도의 기술이 집약되어 대량으로 생산되는 제품’이라는 요건44)은 적용 대상 제품군을 한정하려는 취지로 보이나, 실질적으로는 그 범위가 지나치게 광범위하다. 현대사회에서 소비되는 물건은 대부분 대량생산 방식으로 제조되고, 문제가 되는 제품군 역시 상당한 기술집약성을 띠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결국 이 요건만으로는 하자담보책임 전반으로 확대 해석될 위험을 차단하기 어렵다. 이는 하자와 결함을 개념적으로 구분하여 살펴보더라도 그러하다.
하자담보책임의 전제가 되는 ‘하자’의 개념은 제조물책임법상 ‘결함’의 개념과 일정 부분 유사한 측면이 있으나, 법적 평가기준과 보호목적에서 본질적인 차이를 가진다. 제조물책임에서의 결함45)과 하자담보책임의 하자46)는 이론이 없는 것은 아니나 제조물의 흠을 제조물의 사용가치 내지 상품성에 기하는 ‘하자’와 제조물의 안전성에 기하는 ‘결함’으로 나누어 대체로 양자는 구별되는 개념으로 본다. 하자담보책임에서 ‘하자’는 안전성과 무관하더라도 목적물이 통상 가져야 할 품질이나 성능을 갖추지 못하였거나 매도인이 특히 보장한 성능을 갖추지 못하는 등의 경우에 해당하면 하자가 인정될 수 있다.47) 이와 달리 제조물책임에서 ‘결함’은 제조물에 안전성이 결여된 경우로 안전성이 결여된 상품은 통상적으로 가져야 할 품질을 갖추지 못한 경우에 해당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본다면, 결함은 하자의 한 유형으로 포섭될 수 있다. 이를 도식화하면, “하자”라는 넓은 개념 안에 “안전성 결여”라는 의미의 결함이 부분집합으로 위치하는 구조를 상정할 수 있다.
대상판결은 매도인을 제조자와 동일시할 수 있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하자담보책임에도 제조물책임에서의 증명책임 완화 법리를 유추적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결함이 하자의 하위 개념이라면, 이러한 입장은 표면상으로는 “결함이 문제되는 A영역”에서의 증명책임 완화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판결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면, 안전성과 무관한 “순수 하자(B영역)”에 대해서도 동일한 완화 구조가 작동할 여지가 생긴다.
예를 들어, 구입 후 3년째 되는 냉장고가 갑자기 작동을 멈추었으나, 화재 등 안전성 문제는 발생하지 않은 사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경우는 제조물책임법상 결함에 해당하지 않고, 확대손해도 발생하지 않았으므로 제조물책임법의 적용대상은 아니다. 전통적인 하자담보책임 이론에 따르면, 매수인은 냉장고에 하자가 존재하였고 그 하자가 인도 시부터 존재하였다는 점을 입증하여야 한다.
그런데 대상판결의 논리를 확장하면, 매도인이 제조자와 동일시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경우, 매수인이 “정상적인 사용”, “제조자의 지배영역에 속하는 원인”, “그러한 하자가 없었다면 손해가 발생하지 않을 유형의 손해”를 입증하면, 냉장고의 하자 존재 및 인도 시 존재가 일응 추정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안전성과 무관한 순수 하자 사건에까지 제조물책임법상의 증명완화 구조가 적용되는 셈이 된다.
하자와 결함이 중첩되는 A영역에서도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 제조물책임법은 제조물 자체에 발생한 손해에 대해서는 적용을 제외하고, 그러한 손해는 계약상 책임(하자담보책임·채무불이행책임)으로 해결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는 입법자가 제조물 자체 손해에 대하여는 계약법의 논리에 따라 위험과 비용을 배분하겠다는 정책적 선택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매도인과 제조업자가 동일시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계약상 책임인 하자담보책임에까지 제조물책임과 동일한 증명완화 구조를 도입한다면, 일부 요건(예컨대 소 제기 기간)을 제외하고는 양 제도가 사실상 동일하게 작동하게 되고, 제조물책임법이 제조물 자체 손해를 적용대상에서 제외한 규정의 의미가 퇴색된다.
더 나아가, 매도인이 반드시 제조자에 한정되지 않고 단순 유통업자나 대리점인 경우까지 포함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제조공정에 관여하지 않았고 관련 정보에도 실질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자에게까지 제조물책임법 수준의 입증완화 구조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위험의 과도한 전이로 이어질 수 있다.48) 이는 기업 부담의 급증뿐만 아니라, 가격 전가 및 거래구조의 변경을 통해 다시 소비자의 비용부담이 증가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정리하면, 하자담보책임의 구조는 계약적합성에 대한 무과실책임이라는 점에서 이미 상당히 강한 책임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그 전제가 되는 하자 개념은 안전성의 결여까지 포섭할 수 있을 만큼 넓게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제도에 제조물책임에서 발전한 증명책임 완화 법리를 추가로 적용할 경우, 하자와 결함의 개념 관계(A·B영역)를 고려하더라도, ① 순수 하자 사안에까지 완화 구조가 확장될 위험, ② 제조물 자체 손해를 계약법 영역에서 해결하겠다는 입법자의 선택과의 충돌, ③ 매도인·유통업자에게의 위험 전가와 그로 인한 2차적 비용 전가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하자담보책임에서의 증명책임 완화 논의는, 제조물책임에서의 완화 법리를 단순히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자담보책임 고유의 구조와 하자·결함 개념의 범위, 그리고 입법적 선택과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그 필요성과 범위를 정교하게 조정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다음으로 대상판결은 유추적용의 전제조건으로 매도인을 제조자와 동일시 할 수 있는 관계를 제시한다. 즉, 매도인의 지위, 매도인과 제조자의 관계, 제조물에 대한 정보공유 가능성, 매도인의 하자보수 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정보비대칭의 완화, 제조공정에 대한 통제, 제품 품질정보의 공유 여부를 핵심 요소로 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매도인과 제조자의 동일시 가능성’이라는 기준은 실질적으로 매우 좁은 범위에 한정된다. 현실적으로 제조물에 관한 정보는 대부분 영업비밀에 해당하며, 제조자 외의 자가 이를 공유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제조물에 관한 정보는 대부분 영업비밀에 해당하며, 제조자 외의 자가 이를 공유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도인이 제조자와 동일시될 정도로 정보 접근성을 가진 경우는 제조사와 매도인이 동일 법인인 경우 정도로 제한된다.49) 이와 달리 일반적 유통구조(독립 딜러, 수입총판, 온라인 플랫폼 등)에서는 매도인이 제조자의 정보에 접근하기 어렵고, 하자 보수능력 또한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기준의 추상성으로 인하여 대상판결의 논리를 확장 적용될 경우, 매도인의 예측가능성을 침해하고 국내 유통업자에게 과도한 책임을 전가할 위험이 있다.
또한 이러한 기준은 형평의 문제도 야기한다. 동일한 제조물이라 하더라도 제조자가 국내 기업인지 해외 기업인지에 따라 증명책임의 정도가 달라지는 결과적 불균형이 발생한다. 국내 제조사는 직접 판매 형태가 많아 예외적으로 원고의 증명책임이 완화될 가능성이 높지만, 해외 제조사의 경우 대부분 딜러사를 통해 판매하므로 동일한 사안에서도 증명책임 구조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국내 제조사 간이라 하더라도 판매형식에 따라 증명책임이 달라지는 것은 소비자보호의 형평이라는 관점에서도 쉽게 수긍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판매 형식에 따라 실체법상 책임이 실질적으로 달리 적용되는 결과도 초래할 수 있다.50) 이러한 차별적 상황이 소비자 보호를 위하여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하기에는 국제거래 현실에 비추어 형평에 반하며, 우리 민법에는 ‘소비자’ 개념이 일반 규정으로 도입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소비자 보호 관점에서 증명책임을 달리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결국 대상판결이 제시한 기준은 현대 거래구조에서 매도인·제조인 관계가 복잡해지고 제조자가 사실상 판매자 기능까지 수행하는 경향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하자담보책임의 본질이 계약상 급부불이행에 대한 책임임을 감안한다면, 제조물책임의 위험분담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예외적 경우로서 ‘특별한 사정’이 인정되려면 적어도 정보비대칭성과 기술적 복잡성으로 인한 실질적 입증불가능 상태가 명백히 존재하는 때로 엄격히 한정되어야 하며, 법원의 포괄적 유추해석보다는 입법자가 합리적 기준을 설정하는 것이 제도적 안정성 측면에서도 바람직하다.
대상판결의 논리는 표면적으로는 소비자보호라는 정책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소비자보호는 분명 헌법상 중요한 가치이지만, 법적 구속력의 근거는 실체법적 규정에 있어야 하며, 정책 목적이 법리적 판단을 대체할 수는 없다. 소비자보호의 강화가 법리적 균형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면, 결국 법체계 전반의 신뢰를 훼손하게 된다. 또한 소비자보호의 목적이 무제한적으로 확장될 경우, 매도인뿐 아니라 제조업자와의 책임배분 체계도 흔들리게 된다. 하자담보책임은 어디까지나 계약관계에 기초한 책임이므로, 위험분담의 주체를 계약상 당사자 내부로 한정하는 것이 원칙이며, 사회적 위험책임 논리를 무차별적으로 도입하여서는 안된다.
증명책임은 단순한 위험분담의 문제가 아니라 법규범의 적용범위를 결정하는 규범적 장치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증명책임 완화가 단순히 사후적 형평을 맞추는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법체계 내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법리적 근거가 뒷받침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소비자 보호라는 가치는 증명책임 구조 변경의 고려요소는 될 수 있으나 유일한 근거가 될 수는 없으며, 완화의 범위 또한 법리적 정당성이 인정되는 한계 내로 국한되어야 한다.
따라서 소비자보호는 입증구조의 변형이 아니라 제도적 장치를 통한 균형 있는 실현으로 접근해야 한다. 예컨대, 입법적으로 증거개시제도를 도입하거나, 인도 후 일정기간 내 발생한 하자에 대한 존재 추정규정을 명문화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 대안이 될 수 있다.51)
V. 결론
본 논문은 물건의 하자담보책임에서 제조물책임의 증명책임 완화 법리를 유추적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를 검토하였다.
민법 제580조의 하자담보책임은 계약상 급부의 불완전성을 전제로 하는 계약책임적 제도인 반면, 제조물책임은 사회 전체의 위험분담에 기초한 불법행위 책임체계라는 점에서 양자는 출발점이 다르다. 이러한 법적 성질의 차이를 고려할 때, 단순히 ‘소비자보호’라는 정책적 이유만으로 제조물책임의 법리를 하자담보책임에 유추적용하는 것은 계약책임과 위험책임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법리적 정합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
대상판결은 이러한 법리적 구분이나 성질의 차이에 대하여 직접적인 언급을 하고 있지는 않으나, 매도인이 제조자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경우, 다시 말해 민법 제580조가 예정하고 있는 통상의 매도인과는 다른 ‘특별한 사정’이 존재하는 때에는 제조물책임법상의 증명책임 완화 법리를 적용할 수 있다고 판시하였다. 이는 대법원이 ‘원칙적 유추 부정 + 특별한 사정’이라는 구조를 제시한 이후, 하급심이 그 예외적 완화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인정한 대표적 사례로서 일정한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동시에 그 ‘특별한 사정’의 구체적 의미와 적용 범위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은 채, 매도인의 지위·제조자와의 관계·정보공유 가능성·하자보수 능력 등 포괄적 기준만을 나열하는 데 그쳤다는 한계도 분명하다. 이는 어떤 경우에 매도인을 제조자와 동일시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명확한 판단 기준을 제공하지 못한 채, 사실상 법관의 재량에 맡기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 결과 동일한 사실관계임에도 유통구조나 기업 형태에 따라 증명책임 구조가 달라질 위험이 있고, 법적 예측가능성을 저해하며, 실질적인 정보 접근이 없는 매도인에게까지 불합리한 책임이 전가될 우려가 있다. 특히 우리 민법 체계에는 일반적 소비자 개념이 도입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소비자 보호를 이유로 한 예외론을 일반화하는 방식으로 확대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증명책임 완화 논의의 핵심은 결국 특정 정책 목표를 얼마나 강하게 추구할 것인가의 선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법체계와 사회·경제적 현실 사이의 균형을 어떤 기준으로 조정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입증곤란을 이유로 증명책임을 전환하거나 완화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강한 규범적 효과를 가지므로, 법원이 판례를 통해 유추적용을 선언하고 점진적으로 완화 범위를 넓혀 가는 방식보다는, 입법자가 책임구조·기간·대상·요건을 명확히 설계한 명문 규정을 도입하는 방식이 더 바람직하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입법적 개선 방향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첫째, 앞서 살펴본 독일 민법 제477조와 같이 인도 후 일정 기간 내에 나타난 하자에 대하여 인도 시 존재를 추정하는 규정의 도입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현행 민법 제580조 체계에서는 매수인이 하자의 존재 시점까지 입증해야 하는데, 제조물의 기술적 복잡성으로 인해 하자가 제조·인도 시에 이미 존재하였는지 아니면 이후 사용 과정에서 발생하였는지를 구별하는 것 자체가 극히 어렵다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 이는 소비자의 구조적 입증곤란을 완화하는 비교법적 모델로서, 소비자의 입증부담을 경감하면서도 기간을 한정함으로써 매도인의 위험부담 범위를 예측가능한 수준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독일 민법 제477조는 소비재 매매에 한정하여 적용되는 규정으로, 우리 민법의 일반 체계에 이를 전면 도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소비자 보호의 특수성이 강조되는 영역에 한하여 특별법적 차원에서 단계적으로 명문화하는 방안이 매수인의 증명곤란을 해소하고 매도인의 책임 범위를 명확히 하는 합리적 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제조자·판매자의 정보우위를 제도적으로 조정하기 위한 증거협력의무 내지 증거개시제도의 도입을 검토할 수 있다. 증거개시제도는 미국의 디스커버리(discovery) 제도가 대표적이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소 제기 후 본안 심리에 들어가기 전에 소송 당사자들이 상대방(및 제3자)을 상대로 문서 제출, 서면질문서, 증인신문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관련 정보를 광범위하게 수집·공개하도록 하는 절차로서, 기업·전문가에게 편중되어 있는 정보와 증거를 구조적으로 개방·공유하게 함으로써 실체적 진실 발견과 당사자 사이의 ‘무기대등’을 도모하고, 소송 초기 단계에서 쟁점과 입증가능성을 명확히 하여 불필요한 소송을 억제하고 자발적 화해를 촉진하는 기능을 가진다. 우리나라의 현행 문서제출명령 제도(민사소송법 제344조 이하)는 문서 소지자가 명령에 불응하더라도 법원이 직접 문서를 압수할 수 있는 강제집행 수단이 없고, 불이행 시 과태료도 최대 500만 원에 불과하여 대규모 소송에서 실질적 제재수단으로 기능하기 어렵다는 점, 즉시항고를 통한 불복으로 소송절차가 장기간 지연되는 등 방어권 남용의 여지가 크다는 점, 불이행 시 상대방 주장을 진실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이른바 ‘증거방해의 법리’도 실제 인정이 극히 엄격하여 실효성이 낮다는 점 등 여러 한계를 노출하고 있어, 디스커버리 제도의 도입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법원이 당사자에게 관련 자료의 제출을 보다 실효성 있게 명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것은 증명책임의 전환 없이도 증거 비대칭을 상당 부분 완화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으며, 이는 입증구조를 곧바로 “누가 입증책임을 질 것인가”의 문제로 재편하기보다, 먼저 “누가 보다 용이하게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가”를 조정함으로써 절차적 형평을 확보하려는 보다 온건한 대응 방식으로 평가할 수 있다.52)
하자담보책임에서의 증명책임 완화 논의는, 소비자 보호라는 목적 아래에서도 법리적 정합성과 체계적 안정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소비자 보호라는 가치가 절대적 원리처럼 작동하여 계약책임과 불법행위책임의 경계를 사실상 소멸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자담보책임 영역에서의 증명책임 완화는 어디까지나 예외적·보충적으로, 그리고 명확한 요건과 한계를 전제로 입법자가 설계해야 할 과제이다. 이러한 입법적 뒷받침이 있어야 비로소 법적 예측가능성과 형평, 거래비용 측면의 효율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 논문에서 다룬 쟁점은 단순히 소비자 보호의 강화를 위한 기술적 논의에 그치지 않고, 현대 거래사회의 복잡한 정보비대칭 구조 속에서 '누가, 어떤 기준에 따라 위험을 합리적으로 부담할 것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법리적·정책적 형평성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는 AI 및 디지털 기반 신유형 거래처럼 알고리즘이나 데이터 처리 구조 등 핵심 정보가 사업자 측에 집중된 영역에서도 유사하게 제기될 수 있는 본질적 과제이다. 향후 입법적 보완과 학계의 심층적인 논의를 통해, 하자담보책임과 제조물책임 사이의 경계와 교차지점을 보다 정교하게 재구성하는 작업이 우리 법제의 다음 과제가 될 것이다.







